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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정치 후진국 권력자들 ‘법대로’ 빙자 권력남용”

등록 2010-01-07 21:46수정 2010-01-11 16:58

김인섭 변호사는 “법은 잘 만들어야 하지만 운용도 잘해야 한다. 정치 후진국일수록 권력자들이 편의에 따라 ‘법대로’를 빙자한 권력의 남용을 즐긴다”고 말했다.  김태형 기자 <A href="mailto:xogud555@hani.co.kr">xogud555@hani.co.kr</A>
김인섭 변호사는 “법은 잘 만들어야 하지만 운용도 잘해야 한다. 정치 후진국일수록 권력자들이 편의에 따라 ‘법대로’를 빙자한 권력의 남용을 즐긴다”고 말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굿소사이어티 김인섭 운영위원장
법무법인 태평양 명예대표변호사, 재단법인 굿소사이어티 운영위원장 김인섭(74). 그는 두개의 긴 직함을 갖고 있지만 ‘법치주의 시민운동가’로 소개해줄 것을 요청했다. 자신은 ‘보수’에 속하지만 <한겨레> 같은 진보매체와도 터놓고 얘기하고 싶다며 반겼다. “지금 한국 사회는 보수나 진보, 좌나 우 같은 이념대립을 벗어나 ‘자유민주주의 공동체’를 회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고, 그 수단은 법치”라는 ‘소신’을 그는 갖고 있다. 이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많겠지만, 어쨌든 그의 얘기에서 지금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보수 주류세력의 한 시각을 엿볼 수 있다.

 -2002년 말 대표변호사 은퇴와 함께 법치주의 운동을 시작했는데, 구체적인 계기나 동기가 있었나?

 “나의 40여년 법조인 생활은 무에서 유를 창조해낸 개발연대의 압축성장 기간과 거의 겹친다. 특히 은퇴할 무렵 개혁의 물결과 압축성장의 후유증으로 우리 사회가 갈등과 분열, 투쟁의 혼란에 휩싸여 법치주의가 계속 후퇴하고 있었다. 내 딴에는 법조인의 한 사람으로서 법치주의 정착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보람있게 살아왔다고 자부했지만 막상 은퇴하면서 보니 내 법조인생이 너무나 허무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사회에 조금이나마 빚을 갚고 가야겠다는 생각에 ‘포럼1912’를 시작했는데, 2004년 법조인을 비롯한 학자·언론인·전문가 등을 망라한 지식인 포럼으로 커졌다. 단 정치인은 대상이 아니다.”

 -‘법치주의 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은, 현실 사회가 그렇지 못하다는 뜻도 되는데, 그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제헌 헌법으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도입했지만 반세기가 넘도록 제도와 현실은 따로 겉돌았다. 그 원인은 한마디로 집권자와 국민 개개인의 규범의식이 부족해서다. 그처럼 법 인식이 둔감해진 데는 복합적인 이유가 있다. 전통적인 유교 사상과 가부장제는 자유민주주의 헌법 질서에 정서는 물론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면이 있었다. 일제의 통치법령은 저항하는 것 자체가 독립운동이었고, 오랜 군사독재로 법이 국민을 지배하는 권력의 수단이라는 인식이 자리잡았다. 또 초고속 경제성장 속에서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의 상대적 박탈감이 커지면서, ‘법은 있는 자만을 위한 것’이라는 회의론도 퍼졌다. ‘배고픈 병은 참을 수 있으나 배 아픈 병은 참을 수 없다’는 선동으로 한국병에 휘발유를 부은 일부 정치인들의 책임도 있다. 입시 위주 교육을 받고 자란 출세지상주의 세대들에게 사회 지도자의 필수 덕목인 ‘노블레스 오블리주’나 페어플레이 정신, 절차적 정당성을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일 뿐이기도 했다. 역대 정권은 하나같이 그때그때의 특수상황을 핑계로 법을 편법 운영해서 법의 생명인 절차적 정의를 경시하는 풍조를 만연시켰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했는데 말이다.”

헌법은 독재정권과 수십년 싸워 얻은 성과
갈등해법 있는데 제대로 활용 못하고 있어


-지금의 한국 사회를 법치주의 기준에서 평가한다면 어느 수준인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 나라 가운데 27위이니, 우리의 경제 규모에 비춰볼 때 부끄럽기 짝이 없다. 법치의 수준은 그 나라의 신용도와 국격을 나타내는 중요한 가치 기준인데 이처럼 바닥이니 국민 전체에게 돌아오는 유·무형의 피해가 대단히 크다. 법치의 수준이 하루속히 향상되지 않으면 더 이상의 경제발전도, 선진화의 진입도 불가능하다.”

-대통령을 비롯한 권력자들이 ‘법대로’를 내세울 때 종종 정치적 반대세력이나 노조, 소외계층의 요구를 탄압하는 수단으로 악용된 사례 때문에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다. ‘법치주의’와 ‘법대로’는 어떻게 다른가?

 “법의 선용과 악용의 차이로 비유할 수 있다. 서양에는 ‘나라의 법을 너무 엄격하게 기계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하면 국민들 모두 형무소에 들어가 남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라는 취지의 법언(法諺)이 있다. 법은 첫째 잘 만들어야 하지만 운용도 잘해야 한다. 그래서 인류는 법을 만드는 자, 집행하는 자, 판단하는 자로 나누는 ‘삼권분립’ 제도를 고안해 냈지만 정치 후진국에서는 당대의 권력자들이 편의에 따라 ‘법대로’를 빙자한 권력의 남용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지난 연말 이명박 대통령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한 사람만을 특별사면했다. 이처럼 비리 기업인이나 정치인을 대통령이 자의적으로 사면하는 건 법치주의 정신에 반하는 거 아닌가?

 “(이건희 회장의 사면 자체에 대한 언급은 하고 싶지 않다고 전제하고) 역대 대통령은 모두 사면권을 정략적으로 남용했다. 이런 현상은 법치주의가 잘 정착된 미국 같은 정치 선진국에서도 가끔 논란을 일으킨다. 원초적으로 법치주의에 어긋나는 재량권을 대통령에게 부여한 데서 비롯된 모순 현상인데, 우리 정치사에서는 도를 넘었다. 근본 해결책은 사면법을 개정해 대통령의 사면권 남용을 견제할 수 있는 사면심사위원회 제도를 만드는 것이다.”

법치주의 어긋나는 사면권 대통령에 부여
남용 견제할 수 있는 심사위원회 만들어야

 -‘법조인’의 시각에서 용산참사 사건의 해법을 어떻게 보나?

 “용산참사 사건은 우리 모두에게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사건’이란 경종과 교훈을 줬다. 법치주의 관점에서 보면, 이 사건은 입법의 미비에 근본 책임이 있다. 과거 보수정권에서 세입자와 재개발 혜택에서 소외받는 계층을 소홀히 했다면, 민주화 이후 국회와 행정부를 구성한 진보정권에서라도 개혁정책을 개발하고 특별법 같은 ‘법치 인프라’를 갖췄어야 했다. 지난 1년 내내 위헌 판결이 난 법조차 수십건씩 제쳐놓고 정쟁에만 몰두하는 국회를 지켜보면서 의원 299명 전원을 ‘세금낭비·직무유기’로 고발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제라도 국회는 1년 12개월 상시 개원해 부지런히 정책 경쟁, 입법 경쟁을 했으면 한다.”

 -지난해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를 계기로, 검찰의 사법권 남용 논란과 검찰 신뢰의 추락이 심각했다. 이 문제를 어떻게 보나?

 “노무현 전 대통령은 내가 사법연수원 교수 시절 연수원생으로 가르친 법조 후배이기도 해서 뭐라 말하기 부담스럽다. 또 검찰이 수사 기록이나 내용을 발표하지 않아 구체적 사실관계도 알지 못하고…, 단지 신문의 추측성 기사만을 토대로 왈가왈부하기가 매우 조심스럽다. 다만, 형사상의 정의실현을 위한 공익의 대표자로서 검찰은, 직접 수사를 하든 수사 지휘를 하든 항상 피의자의 인권이 부당하게 침해되지 않도록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직 국가원수가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졌으니 검찰 역사에 큰 오점이 아닐 수 없다. 만고의 교훈으로 삼아야 하겠다.”

 -그동안 10여 차례 굿소사이어티 포럼을 통해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의 화해, 보수와 진보의 화합, 사회통합과 토론문화의 정립 등을 주창해 왔는데, 그 접점이 있다고 생각하나?

 “원래 자유민주주의 사회는 개인의 행복과 사회 전체의 안녕 사이의 상충과 갈등이라는 어려운 과제를 숙명적으로 갖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의 대립 문제는 ‘대한민국’이라는 사회 공동체에 살고 있는 모든 개체가 최대한으로 행복해질 수 있느냐, 또 그러기 위해서 개체와 개체 간, 개체와 전체 간의 갈등을 어떻게 절충하느냐에 관한 견해차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는 이미 국민적 합의로 기본법인 헌법을 만들어 그 속에 해답을 다 정해놓고 있다. 더욱이 이 헌법은 과거 수십년간 독재정권과 싸워서 얻어낸 귀중한 선물이자 길잡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애타게 갈구하고, 외치고, 싸워서 얻은 귀중한 민주주의를 20년째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우리 스스로 짓밟고 망가뜨리고 있다. 왜냐? 법치의 틀을 벗어난 민주주의는 그 내용이 아무리 훌륭해도 결국 허구로 끝난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굿소사이어티 대표로서 언론이나 사회에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화이부동과 구동존이의 자세로 공동체 의식을 바로 세우고 21세기형 사회통합의 모델을 이루어 나가자는 게 내 일관된 제안이다. 그러자면 다시 강조하지만 법치주의가 뿌리내려야 한다. 갈등을 합리적으로 해결하는 최선의 방법은 토론이다. 법무법인 설립 초기, 민주적인 토론문화를 정착시키고자 해마다 한번씩 전 구성원이 편한 차림으로 둘러앉아 ‘끝장토론’을 시도했다. 처음 3년은 ‘말로 먹고산다’는 변호사들이 밤새도록 설전을 하다 주먹다짐으로까지 번지곤 했지만 5년쯤 되자 서로 통해 밤을 새울 필요가 없어지더라. 지금 우리 사회가 부정부패와 불신이 팽배해 큰 문제라고 걱정하는 원로들이 많지만 그 해법을 ‘법치주의 정착’에서 찾아야 한다고 제창하는 사람은 적다. ‘법과 원칙대로’는 모든 한국병을 치유·봉합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이다.”

 -법무법인 시대를 연 ‘1세대 변호사’로서 초기 어려움을 많았다고 했는데, 태평양이 ‘한국형 로펌’으로 불리는 이유는?

 “80년 변호사 개업했을 때나 법률회사로 전환한 86년이나 다 아다시피 정치적 격변기이자 혼란기였다. 법률 서비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나 시스템이 미비한 상태여서 솔직히 집에 생활비를 가져가지 못한 적도 있을 정도로 초기엔 경영이 곤란했다. 다행히 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고비로 경제가 활기를 띄면서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일화를 하나 소개하자면, 90년대 초반인가 당시 우리 최대 고객인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이 대권 도전을 하고자 국민당을 창당할 때 발기인으로라도 참여해달라고 했는데 거절했다. ‘왕 회장’이 노발대발해 1년 이상 모든 계약이 끊진 적도 있었다. ‘한국형’이라는 의미는, 아마도 김앤장과 비교한 데서 나왔을 텐데, 우선 나를 비롯한 창립 멤버들이 유학파가 아닌 토종이라 그런 것 같다. 또 초기부터 철저하게 ‘토론’을 통한 민주적 운영 원칙을 지켜와 개방적이면서도 공동체적인 경영 문화가 특징으로 꼽힌다. 그래서 변호사 수나 매출실적을 보면 김앤장이 규모가 크지만, 외국형 주식회사 형태여서 법무법인인 우리를 비롯한 다른 로펌들과 단순 비교는 의미가 없다. 또 지난해 하반기엔 일부 분야 실적에서는 태평양이 전체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용산참사의 근본 책임은 입법미비에 있어
소외받는 계층 위한 ‘법치 인프라’ 갖춰야

 -정치권이나 공직 진출 기회도 많았을 텐데, 계속 ‘재야’에 남았다. 어떤 생각이 있었기 때문인가?

 “애초 1972년 유신 출범 직후 판사직을 그만둘 작정이었는데, 박정희 정권에서 법관들의 집단사퇴를 막고자 ‘13년 이상 근무 경력자만 연고지 변호사 개업을 허가한다’는 규정을 만드는 바람에 발이 묶였다. 79년 12·12 쿠데타를 보면서 ‘더 이상 희망이 안 보여’ 결단을 내렸다. 80년 개업 이후 사무실 운영은 늘 위기였다. 하지만 결코 ‘돈’이나 ‘명예’만을 좇지는 않았다고 자부한다. 6공화국 출범 이후 비리 혐의로 구속된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 경환씨, 박종철씨 고문치사 사건을 은폐한 혐의로 구속된 박처원 치안감 쪽에서 가까운 지인의 이름을 대며 ‘현금 가방’을 들고 와 변호를 의뢰한 적도 있다. 당시 직원들 월급도 주기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거절했다. 운동권 여학생의 무료변호를 맡은 적도 있는데 인권변호사가 아니란 이유로 거부해 충격을 받기도 했다. 법조인도 정치나 공직에 나설 수 있다. 다만, 법치주의 원칙을 지키고 공익을 위해 일해야지 경력이나 명함으로만 이용한다면 ‘더 큰 악’이 될 수 있다.”

로펌대표 은퇴 뒤 법치주의 시민운동 시작

대학생 이명박 신원보증 인연
“정치인 이명박과는 인연 끊어”

굿소사이어티 김인섭 운영위원장
굿소사이어티 김인섭 운영위원장
그는 소문대로 달변가였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4시간을 거의 쉼없이 얘기했다. 부러 질문을 할 겨를도 필요도 없을 정도로 자신의 칠십 평생과 굿소사이어티 활동 구상까지 열정적으로 쏟아냈다.

“충청도 영동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가난과 전란 탓에 자주 옮겨다니느라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공부는 곧잘 했으나 졸업장을 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재능을 아까워한 스승과 지역 유지들의 추천서 덕분에 고려대 법대에 입학하고, 입주과외 때 만난 좋은 학부모 덕분에 뜻을 세워 법관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런 경험 탓에 무엇보다 사람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겼고, 맨손으로 변호사와 전문가 300명을 거느린 국내 최대 로펌을 키워낸 힘도 그것이었다.”

그는 스스로 정한 만 65살 정년에 은퇴한 뒤 아내와 사별하고 칠순 가까이에 재혼을 하게 된 것도 ‘인연’으로 풀이했다. 이화여대 약대 출신으로 결혼 뒤 시부모와 4남매, 시동생들까지 보살피며 평생 고생한 첫 부인은 암으로 먼저 떠났다. 이건희, 정세영 회장 등이 치료받은 미국 엠디(MD)앤더슨 암센터에서 꼬박 1년간 손수 아내를 간병한 그는 말년에 시인으로 등단한 아내를 기리는 <이순우 유고시집>을 펴내 화제가 된 적도 있다. 그는 4년 전 재미동포 여성을 새 아내로 맞았다. ‘국제전화 데이트’ 석달 만에 21살의 나이 차를 넘어서게 한 인연의 끈은 ‘전 부인을 따라서 갖게 된 기독교 신앙’이었다.

그가 한사코 밝히기를 꺼린 ‘인연’이 하나 있었다. 바로 이명박 대통령과의 특별한 만남이다. 1964년 서울지법 판사 시절, 그는 ‘6·3 한-일 국교 반대 투쟁’을 주도해 계엄사령부에 끌려와 있던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한 고대생의 신원보증을 서줬다. 고려대 법대 선배이자 당시 고려대 학생처장인 이윤형 교수가 판사실 앞에서 몇 시간씩 시위를 하며 “제발 관제 빨갱이만 되지 않게 막아달라”고 애원을 했기 때문이었다. 10여년 뒤 30대 초반의 청년이 ‘현대건설 상무’ 명함을 들고 찾아왔을 때에야 그 이름을 알게 됐다. 그렇게 두 사람은 테니스 친구가 됐고, 유신 말기 판사복을 벗고 나와 변호사로 독립한 그가 86년 태평양합동법률사무소를 열었을 때 첫 고객이 바로 현대건설이었다. 그 인연은 현대그룹 법률자문으로 이어졌다. “현대가 형제들 틈새에서 외로워해 밥도 자주 먹고 지낸 사이”였다.

하지만 그는 “정치인 이명박과는 사실상 인연을 끊었다”고 몇번씩이나 선을 그었다. 90년대 초 정계 진출 고민을 의논할 때 “솔직히 모난 성격에 연설도 잘 못하니 힘들 거라며 말렸다”는 그는 96년 국회의원 당선을 축하하는 골프회동 이후로는 직접 만난 적이 없다고 했다. “그쪽에선 섭섭하겠지만, 내가 하는 법치주의 운동이나 포럼이 관변으로 오해받는 게 싫다”고 덧붙였다.

인터뷰/김경애 사람팀장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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