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사회일반

‘광주 설움’ 달래던 야구…이젠 내 명예 걸고 한다

등록 2009-11-05 21:07수정 2009-11-06 15:05

이종범 선수가 훈련 도중 배트를 매만지고 있다. 그는 “20대에 야구 하는 것과 30대에 하는 것, 40대에 야구 하는 건 다 다르다. 지금은 어떻게 야구를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지 알 것 같다. 내년에도 후배들과 경쟁할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김진수 기자 <A href="mailto:jsk@hani.co.kr">jsk@hani.co.kr</A>
이종범 선수가 훈련 도중 배트를 매만지고 있다. 그는 “20대에 야구 하는 것과 30대에 하는 것, 40대에 야구 하는 건 다 다르다. 지금은 어떻게 야구를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지 알 것 같다. 내년에도 후배들과 경쟁할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한겨레가 만난 사람] KIA 타이거즈 ‘맏형’ 이종범




지난 주말 이종범(39) 선수와 인터뷰를 마치고 광주 무등경기장을 나오다가, 경기장 앞에서 기다리던 여고생 팬 10여명과 마주쳤다. 한-일 클럽챔피언십을 앞두고 연습중인 기아 타이거즈 선수들을 보러 온 거였다. “누구 만나러 왔어요?” “안치홍(기아의 2루수) 선수요.” 그라운드에서 이종범은 여전히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빛나는 별이다. 티브이 카메라는 줄곧 연습하는 이종범 선수만 비췄고, <문화방송> ‘황금어장’ 팀을 비롯해 그를 만나려는 언론이 쉴 새 없이 연습을 방해했다. 하지만 경기장 문밖의 젊은 팬들에게서 ‘이종범’이란 이름을 들을 수는 없었다. 이 미묘한 간극 위에 그는 서 있다. 역대 최고의 야수라는 찬사와 함께, “한물갔다”는 비아냥에 시달리던 ‘인간 이종범’이 서 있다. 그는 한국시리즈에서 다시 한 번 화려하게 타올랐다. 이 불꽃은 그에게 어떤 의미일까?

지금 관중문화 좋지만 옛 ‘깽판 응원’도 그리워
선수들 출신지역 다양해져 전보다 통솔 힘들어

-한국시리즈 우승을 축하합니다. 7차전에서 극적으로 승리하는 순간 가장 먼저 뭐가 떠올랐습니까?

“아내죠. 지난 2년간 구설에도 오르고, 은퇴 압박도 받고 그랬는데 아내가 저를 많이 부축해줬습니다. 당신이 지금까지 잘 버텨 왔는데 멋있는 모습 보여주고 떠나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래서 지난겨울에 등산화를 사서 무등산을 많이 탔습니다. 체력이 돼야 시합을 뛸 수 있으니까요. 예전만큼 실력은 안 되지만 그라운드에서 좋은 모습 보여줘야 나도 살고 팀도 살 수 있으니까 정말 열심히 땀 흘렸습니다. 올해는 하루하루, 한 경기 한 경기 긴장하면서 뛰었습니다. ‘내가 우겨서 야구를 계속했는데 잘 안되면 어떡하지’ 하며 가슴 졸였습니다. 우승하는 순간, 이런 힘겨웠던 기억이 한꺼번에 밀려와 많이 울었습니다. 저와 함께 마음 졸였던 아내도 많이 울었고요.”

-한국시리즈 시작하기 전에 후배들한테 “큰 경기에서는 거칠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무슨 뜻인가요?

“아무래도 우리 팀 후배들이, 성격이 무난하고 너무 얌전하게 플레이를 합니다. 제 경험으로 볼 때 한국시리즈처럼 큰 경기에서는 자기표현을 적극적으로 해야 상대방에게 위압감을 줄 수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적 경험이 그랬습니다. 신인 시절에 무서움이 없었기 때문에 한국시리즈에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습니다.”(이종범 선수는 신인이던 1993년 한국시리즈에서 최우수선수상을 받았다.)

-해태 타이거즈 시절엔 여러 번 우승했지만 기아 타이거즈에선 이번이 첫 우승입니다. 같은 타이거즈지만 해태와 기아는 뭐가 다르고 뭐가 같은가요?

“같은 점은 거의 없죠…, 거의 없고 다른 점은 엄청 많아요. 우선 회사 규모부터 다르죠.(웃음) 과거에는 (호남)지역 선수들로만 구성되다 보니 2군에서 뛰다가 1군에 올라온 선수들도 적응이 빨랐습니다. 후배들은 선배들이 원하는 걸 잘 알아차렸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호남보다 다른 지역 선수들이 더 많다 보니 융화가 힘들고, 무슨 말을 하면 빨리 이해하질 못합니다. 색깔을 보면, 과거 해태는 개개인이 모두 강하지만 그 강함 속에 팀워크가 있었죠. 선후배 위계질서도 있었고요. 지금 기아는 색깔도 없고 개인의 특성도 많이 사라져서, 선수들을 어떻게 통솔하느냐 그런 게 힘들었어요. 선배는 무조건 후배를 다그친다는 걸 떠나서, (해태엔) 선후배 간에 위계질서와 정이 있었죠. 옛날 야구였죠. 아무래도 그래서 해태가 우승을 많이 한 거 같아요.”

-팀의 최고참으로 후배들을 통솔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겠습니다.

“솔직히 힘들었죠. 구단이나 윗분들은 옛날처럼 하라고(후배들 군기를 잡으라고) 하는데…. 저도 예전에 선배들한테 한 대씩 맞고 자랐지만 일본 야구를 접해본 뒤엔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어요. 프로 선수에게 중요한 건, 뭐가 팀에 필요하고 내가 어떤 위치에서 뭘 해야 할지를 스스로 생각하는 거예요. 옛날처럼 다그치고 욕하고 때리고 그러면 발전이 없거든요. 그런데 (시즌 중에) 성적이 안 나오면 선배인 저한테 지탄이 오기도 하고, 그래서 힘들었죠.”

스포츠와 정치는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프로야구는 더욱 그랬다. 출범부터 지극히 정치적이었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짓밟고 집권한 5공 정권은 사람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82년 프로야구를 창설했다. 억눌린 정치적 욕구가 야구장에서 분출됐다. 다른 지역도 그랬지만, 특히 호남 팬들의 해태 타이거즈 응원은 가히 열광적이었다.

-7차전에서 이긴 뒤 기아 팬 몇몇이 ‘목포의 눈물’을 부르다가 따라 부르는 사람이 없어 끊겼다고 합니다. 해태 팬과 기아 팬은 많이 다르죠?

“지금은 남녀 불문하고 야구장에 와서 자기가 좋아하는 선수들 유니폼을 입으면서 응원하는 문화입니다. 예전에 해태 팬들은 ‘한’이 있었습니다. 경기에 이기면 좋았지만, 지면 거의 ‘깽판’을 부리다시피 했습니다.(웃음) 선수로서 팬들을 볼 때, 지금은 관중 문화도 아름답게 바뀌었다는 걸 느낍니다. 일본 관중들은 정말 조용조용해요. 외야에 가면 자기들이 원하는 거 하면서 그냥 즐깁니다. 그에 비하면 한국 관중들은 적극적입니다.”

-가끔은 옛날 해태 팬들의 끈적끈적함이 그립지 않나요?

“그립죠. 막무가내식 응원이죠.(웃음) 난데없이 단상 위에 올라가 망을 찢고 춤추고 뛰고 하는 관중들을 가끔은 웃으면서 보고 그랬는데, 지금은 그런 사람이 거의 없고 응원단장에 맞춰 체계적으로 응원을 하죠. 저는 지금의 응원문화가 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나이 드신 분들은 체계적인 응원을 싫어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예전처럼 가끔 술 취한 사람이 단상에 올라서기도 하는 걸 보고 싶어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KIA 타이거즈 ‘맏형’ 이종범
KIA 타이거즈 ‘맏형’ 이종범
-해태 타이거즈에서 뛸 때, 광주 시민들의 정치적 비원이 열렬한 응원으로 표출되고 있다는 걸 느낀 적이 있습니까?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 프로야구가 출범했고, 초등학교 4학년 때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때는 어려서 솔직히 잘 몰랐습니다. 성장하면서 해태가 우승하는 걸 눈으로 직접 보고, 내가 꿈꾸던 팀에 들어오니까 비로소 관중들의 응원에 설움이 많이 배어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그래서 선수들이 더욱더 열심히 한다는 걸 느꼈죠. 물론 선수들은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 열심히 뛰는 거긴 하지만요. 많은 팬들이 ‘목포의 눈물’을 부르는 걸 보면서 ‘저렇게 한이 많을까, 저분들에게 해드릴 수 있는 건 우승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해태 선배들도 그랬고, 저희 아버님도 그런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제가 일본에 진출하기 전인 1990년대 후반까지 그랬습니다. 그 뒤 일본에 갔다 오고 나니 정권도 바뀌고…, 이젠 그런 게 없어졌더군요.”

이종범은 98년 일본에 진출했다. 국내에선 더 이상 겨룰 자가 없던 그에게, 일본 프로야구는 하나의 도전이었다. 그러나 실패했다. 98년 6월23일 상대 투수가 던진 공에 오른쪽 팔꿈치가 으스러졌다. 부상은 회복됐지만, 몸쪽 공에 대한 공포는 쉽게 사라지질 않았다. 2001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초라한 귀환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부활과 추락을 반복했다. 은퇴 압력도 여러 번 받았다.

-선수 생활 하면서 언제 가장 힘들었습니까? 일본에서 활동하던 때인가요?

“그렇습니다. (일본에서) 팔꿈치 부상 이후 좌절했고, 좌절 속에 일어설 수 있는 기회도 있었는데…, 모두 제 탓으로 돌리고 싶습니다. 팔꿈치를 다치는 바람에 타격 페이스가 흐트러졌고, 일본 투수들의 변화구를 공략하지 못했죠. 그래서 이젠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일본에선 제가 용병이었죠. 용병은 성적에 많이 좌우되니까, 팀 성적을 용병 탓으로 돌리니까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게다가 제 성격이 워낙 급해서 참고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돌아가겠다고 말을 했습니다. 슬럼프도 있었고 좌절도 있었지만 일본 생활은 개인적으로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물론 일본 야구에 적응하지 못해 언론의 질타를 많이 받았지만, 돌이켜 보면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앞으로 지도자가 됐을 때 선수들에게 해줄 말이 있을 거 같습니다.”

일본야구 적응 실패했지만 돈 주고도 못살 경험
FA신청 안해…타이거즈 유니폼 입고 은퇴 희망

-가족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올 때 비행기 안에서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

“아내의 말을 생각했습니다. 일본에서 마지막으로 아내에게 울면서 물었습니다. ‘이제 가자. 더 이상 못하겠다.’ 그랬더니 아내가 ‘당신 맘대로 하라’고 하더군요. 아내는 ‘한국에 가서 당신이 좋아하는 팬들 앞에서 운동하는 것도 괜찮을 거 같다’고 말해주더군요. 그때만 해도 아내가 야구를 잘 모르는 상태였는데, 그런 아내의 말이 참 고마웠습니다.”

-일본에서 돌아온 뒤 슬럼프에 빠질 때마다 ‘야구 그만하자, 은퇴하자’는 유혹을 느끼진 않았습니까?

“은퇴보다는, 과연 내년엔 내가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을 많이 했죠. 내가 10살 때부터 운동을 시작해서 30년째인데, 운동에서 가장 큰 라이벌은 상대가 아니라 나 자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예전의 이종범이 아니라 자꾸 나약해지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고, 내 실력이 예전엔 이렇지 않았는데 요즘 왜 이렇지, 왜 열심히 안 하지 하는 자괴감에 빠지곤 했습니다.”

-몇 차례 구단이나 팬들로부터 은퇴 압력을 받았는데, 그때마다 은퇴하지 않은 건 자존심 때문이었나요?

“광주에서 ‘이종범이 은퇴하지 않는 이유는 돈 때문’이라는 더러운 소문이 난 적이 있습니다. 돈이 없어서 집을 이사했다는 소문도 났습니다. 팬들이 ‘이종범 갔구나’ 말할 때 정말 자존심도 상했죠. 막말하는 팬들 앞에서 야구를 하고 싶지 않았고, 그럴 땐 정말 그만두고 싶었습니다. 공인으로 산다는 게 이렇게 힘들구나 하는 걸 느꼈습니다. 그때 아내가 마음을 잡아줬습니다. 아내는 ‘야구를 계속하는 이유는 돈이 아니라 명예 때문이다. 당신을 사랑하는 팬들이, 당신이 그라운드에 서 있는 것만으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열정을 한번만 더 보여줄 수 없겠느냐. 당신이 은퇴를 하건 안 하건 팬들 가슴에 이종범을 묻을 수 있도록 한번 보여주라’고 했습니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걸 아내가 팬 입장에서 조언해준 거죠. 그래서 단돈 1원을 받더라도 야구를 할 수 있는 데라면 어디서라도 뛰겠다고 다짐했죠. 여기(기아)에서 못 하게 하면 날 풀어달라고 (구단과) 싸우기도 했고요. 내가 우겨서 은퇴를 거부했기에, 올해는 한 게임 한 게임 정말 긴장하고 했습니다. 우승했을 때 그런 일들이 눈에 스쳐 지나가서 많이 울었어요.”

-이종범 선수를 흔히 ‘야구 천재’라고 부르는데, 야구를 잘하는 건 재능과 노력 가운데 어느 쪽 요인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까?

“어렸을 때는 ‘재능이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재능을 믿고 훈련을 소홀히 하면 역시 안 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지난 2년 동안 힘들었던 게 바로 그런 부분입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 아이(아들 정후는 서석초등학교 야구선수다)에게 ‘노력은 천재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야구 인생이 끝나는 날까지 부족한 점을 찾아서 메워가야지, 천재도 아닌 선수가 ‘이젠 됐다, 이젠 충분하다’고 생각하면 그 순간 추락하기 시작합니다. 지금도 조금만 안 되는 점이 있으면 집에 가서 생각하고 운동장에 나와 복습을 합니다. 운동이 끝나는 날까지 그런 연구를 해야 합니다.”

-‘운동신경이 워낙 뛰어나서 어떤 스포츠를 해도 성공했을 것 같다’라는 인터뷰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야구를 안 했다면 어떤 스포츠를 했을까요?

“초등학교 때 축구를 하다가 축구부가 해체되는 바람에 야구를 하게 됐습니다. 저는 축구를 정말 하고 싶었습니다. 축구는 왼발로 했습니다. 야구 빼고는 다 왼손을 씁니다. 당구도 왼손으로 치고, 밥도 왼손으로 먹습니다.”

-그런데 왜 야구는 오른손으로 하게 됐죠?

“초등학교 때 오른손으로 치고 오른손으로 공을 받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까 감독님이 그냥 하라고 해서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때는 텔레비전이 거의 없을 때니까 메이저리그나 일본 프로야구를 접할 수도 없었고, 그냥 감독님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어렸을 때 우투좌타로 바꿨다면 결과가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도 합니다. 내야안타도 더 많이 쳤을 테고요.”

-아들도 혹시 왼손잡이입니까?

“그렇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인데, 우투좌타입니다. 제가 우투좌타가 못 된 것을 후회하는데, 아들은 발이 빨라 우투좌타가 괜찮을 것 같아서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아들이 야구를 곧잘 합니다. 저보다 더 좋은 환경과 좋은 시설에서 야구를 하고 있고, 좋은 경험도 쌓았으니 꿈도 크고 야망도 클 겁니다.”

-386세대에게 이종범 선수는 추억과 같습니다. 잘하든 못하든 이 선수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반가울 때가 많습니다. 팬들의 그런 마음을 느끼나요?

“저를 보러 야구장에 오시는 팬들은 중·고등학생 아빠들이 많습니다. 40~50대가 많죠. 그분들은 향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라운드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꿋꿋이 쓰러지지 않는 40대의 힘을 보여주라는 그분들의 말씀이 힘이 되죠.”

-언제쯤 은퇴할지 생각해 봤습니까?

“20대에 야구 하는 것과 30대에 하는 것, 이제 40대에 접어드는데 40대에 야구 하는 게 다 다릅니다. 지금은 어떻게 야구를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지 알 거 같아요. 내년에도 후배들과 경쟁할 생각입니다. 정말 실력 좋은 사람이 뛸 수 있는 경쟁 구도를 만들고, 저도 후배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모든 걸 갖출 생각입니다. 저는 이번에 자유계약선수(FA) 신청도 안 할 겁니다. 언제까지 야구 할지는 모르지만 좋은 쪽으로 그냥 팀에 일임했습니다. 어쨌든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고 은퇴하고 싶습니다.”

인터뷰 박찬수 부국장 pcs@hani.co.kr, 정리 김동훈 기자 cano@hani.co.kr

[관련 영상] 타이거즈의 돌아온 한국시리즈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단독] 윤석열 가짜 출근·상습 지각에…고통 시달린 경찰, 불편한 시민 1.

[단독] 윤석열 가짜 출근·상습 지각에…고통 시달린 경찰, 불편한 시민

“저는 소위 말하는 술집 여자입니다만”…탄핵 촛불 환히 밝힌 그의 말 2.

“저는 소위 말하는 술집 여자입니다만”…탄핵 촛불 환히 밝힌 그의 말

대법원 “‘이재명 무죄’ 판사 체포 시도, 사법권에 대한 중대 침해” 3.

대법원 “‘이재명 무죄’ 판사 체포 시도, 사법권에 대한 중대 침해”

‘혐의 부인’ 윤석열 담화…법조계 “재범 위험, 신속 구속해야” 4.

‘혐의 부인’ 윤석열 담화…법조계 “재범 위험, 신속 구속해야”

[단독] 도이치 주범 “주가조작은 권오수·김건희 등 합작품인 듯” 5.

[단독] 도이치 주범 “주가조작은 권오수·김건희 등 합작품인 듯”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