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가로부터 2억원의 명예훼손 소송을 당한 박원순 변호사는 “나름의 젊음을 희생하면서 (시민운동을) 해 왔는데, 이런 압박을 받을 이유가 없지 않나 생각했다. 그러나 돌이켜 보니, 수난과 고난 속에서 훨씬 더 억압받고 힘없는 많은 사람들과 갈 수 있었다. 그러니 이 정부에선 등용되기보다 핍박받는 게 더 좋은 일 아닌가”라고 말했다. 이종찬 선임기자 rhee@hani.co.kr
[하니TV ‘더 인터뷰’와 함께하는 한겨레가 만난 사람]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인터뷰 중 그를 ‘시민운동의 대부’라고 표현하자 곧바로 이런 지적이 돌아왔다. “시민운동은 많은 사람이 같이 하는 것입니다. 나는 대부가 아니고, 많은 운동가 중의 한 사람입니다.” 어쨌든 누가 뭐래도 박원순(53·희망제작소 상임이사) 변호사는 한국 시민운동의 상징과 같다. 환경운동연합을 만든 최열 대표와 함께, 1990년대 초반부터 우리 시민운동을 이 정도까지 키워낸 대표적 인사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부드럽다. 온건하다. 이런 품성 탓에 진보뿐 아니라 보수 인사들과도 친분이 두텁다. 그런 그가 요즘 달라졌다. “원하지는 않았지만”(박 변호사의 표현), 정치권력과 첨예한 대결의 최전선에 섰다. 그 결과 국가로부터 2억원의 명예훼손 소송을 당했다. 시민단체의 본격적인 정치 참여를 고민하는 자리에도 그는 서 있다. ‘정치보다 중요한 게 더 많다’고 했던 그가 지금은 ‘정치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무엇이 그를 변하게 했을까, 그리고 얼마나 변한 것일까. -최근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는 문제부터 여쭤보겠습니다. 국회 강연에서 ‘내년 지방선거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다’고 말한 게 정치 참여로 해석됐습니다. 무슨 뜻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까? “제가 한 말은, 전반적으로 우리 사회가 과거로 퇴행하는 징후들이 많은데 이런 상황 속에서 시민·사회단체들이 본래 자기가 하던 일 열심히 하는 것에서 그칠 수 없고, 좋은 정부와 민관협력의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 지방선거 등 정치적 영역에 개입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고민을 많은 시민단체가 하고 있다는 얘기를 했는데, 마치 제가 제도권 정치로 들어가는 것처럼 오해가 됐습니다.” -시민·사회단체 전체의 틀에서 지방선거를 고민하는 거지, 박 변호사 개인의 정치 참여를 고민하는 건 아니라는 뜻인가요? “그렇습니다.” -어쨌든 ‘정치가 중요하다, 좋은 정부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정치에 대한 생각이 바뀐 걸로 봐도 됩니까?
“민주주의와 인권이란 건 물과 공기와 같습니다. 저희들은 현장에서 각자의 시민운동을 열심히 하며 우리 사회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 왔는데, 어느 날 보니까 그런 희생으로 이룩한 여러 제도나 시스템이 과거로 되돌아가는 걸 느꼈습니다. 정부가 한 번 바뀌면 엄청난 변화가 있다는 걸 새삼 느꼈고, 좋은 정부가 우리 활동의 기반으로 중요하다는 걸 느끼게 된 겁니다. 그동안 우리가 너무 둔감했던 걸까요? -내주에 창립되는 ‘희망과 대안’이란 단체가 주목됩니다. 박 변호사를 비롯해 시민사회 지도자들이 거의 망라됐는데, 무엇을 모색하는 단체입니까? “그동안 시민·사회단체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열심히 활동해 왔습니다. 그러나 전부 개별적으로 존재해 왔죠. 저는 중심적인 인물은 아니고, 요청이 와서 참여하는 입장입니다. 상황의 엄중함이랄까, 이런 것을 함께 공유하고 서로 활동도 조정하면 각자 하고 있는 일들에 훨씬 시너지 효과가 나지 않을까 생각하며 탄생한 것 같습니다.” 지금 시민운동은 좋은 정부 만드는 노력 해야
기계적 중립 지키다 사회 몰락 용납할 수 없어 -‘희망과 대안’의 설립 목적 중 ‘지방선거에 유의미한 활동’이란 대목이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이 가능한가요? “시민단체들은 늘 선거에 참여하고 개입해 왔습니다. 공정선거 감시운동에서 시작해서 (2000년 총선의) 낙선운동에 이르기까지 말이죠. 우리나라 선거가 깨끗해지고 투명해지고 그나마 공정해진 건 시민·사회단체의 개입과 노력 때문입니다. 내년 지방선거는 굉장히 중요한 정치적 이벤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사회단체들이 가만히 손놓고 있는 게 오히려 자기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특히 지역 단체들이 관심이 많습니다. 일부에선 직접 후보를 배출하는 것까지 고려하는 단체나 개인도 많은 거 같습니다. 아직 어떻게 하겠다는 결정이 선 건 아닌 거 같고, 다만 좀더 창조적인 방식으로 지방선거에 시민·사회단체도 함께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내년 지방선거에서 시민사회 진영이 이명박 정부에 반대하는 정치세력과 연대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시민·사회단체들이 꼭 어느 정당을 반대한다는 측면보단 좋은 지방정부, 지방자치단체장, 지방의회 의원들이 많이 뽑히게 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우리 사회의 공동선을 위해서 일할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지방선거에 개입하는 방식이나 도구랄까 하는 게 결정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도구, 수단이라는 것이 2000년 총선의 낙천·낙선운동과는 다른 방식입니까? “늘 후배 시민운동가들에게 말하는 게 ‘냉장고 이론’입니다. 지난해에 나온 냉장고를 올해 팔면 잘 팔리겠습니까? 뭔가 새롭고 재밌고 국민에게 훨씬 설득력 있는, 성능도 좋아지고 디자인도 예쁜 신상품이 나와야죠.” -서울시장 후보를 시민사회 진영에서 내보자는 의견도 있는데, 그것도 ‘희망과 대안’에서 고민하는 범위에 포함됩니까? “구체적으로 그런 이야기가 나온 건 아닙니다. 아직 창립 과정이기에, 충분히 사업계획이 무르익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길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고민의 범위엔 포함된다고 봐도 됩니까? “예.” 미소금융 민간이 할 일…정부가 빼앗으면 실패
MB정부 시민사회 억압, 3년뒤 분명히 후회할 것 -지금 우리 시민단체의 모습을 보면, 2004년 대선에서 미국의 시민단체들이 대거 ‘조지 부시 반대운동’에 나섰던 것과 흡사한 거 같습니다. 그때 미국에선 부시 집권 이후 민주주의가 심각하게 후퇴했다는 위기의식이 있었거든요. “많은 시민단체들은 초정파적인 활동을 해왔습니다. 공공선을 지향하지, 특정 정파를 지지하는 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늘 기계적인 중립이라든지 탈정파에 머무르면서 우리 사회 전체가 몰락하거나 후퇴하는 걸 용납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최근 들어 보편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민주적 또는 인권 시스템을 이명박 정부가 허물어뜨리는 일들이 점점 많아지기 때문에, 적잖은 단체들이 ‘기계적 중립을 지키는 게 능사냐, 정부에 반대하거나 새로운 정부를 만드는 것도 중요한 시민운동 아니냐’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시민운동이 시민운동 자체를 위한 운동은 아니라고 봅니다. 좀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희생, 헌신하고 있습니다. 정치적 중립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요구와, 그걸 뛰어넘어 우리 사회의 악화되는 정부를 고쳐내야 한다는 요구 사이에서 고민이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건 시민운동의 의미 있는 변화라고 볼 수 있습니까? “변화라고 볼 수 있겠죠. 이런 세상에서 그런 고민을 안 하는 단체라면, 우리 사회를 고민하지 않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죠.”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이 정부에서는 핍박받는 게 제대로 일한다는 뜻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요즘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오르고 있는 건 어떻게 보십니까? “국민 여론은 한 달 뒤를 내다볼 수가 없지 않습니까. 지지율은 국민들의 기대에서 비롯된 거지 실제로 (이 대통령이) 잘했기 때문에 높아진 게 아닙니다. 중도 서민 정책이라고 하는 것들을 선언만 했지 실제로 이뤄진 건 아니지 않습니까. ‘미소금융 재단’은 정부가 아니라 민간이 할 일입니다. 민간의 열정과 창의성, 상상력을 정부가 이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정부가 인기 올리려고 스스로 다 하고, 선언하고, 뺏어오는 형식이거든요. 그런 정책이 성공할 리 없고, 그런 상황에서 국민 지지가 계속될 수 없습니다. 당장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한 달 후, 1년 후, 3년 후를 봐야 합니다.” -그에 비하면 야당은 무기력하다는 느낌입니다. 2007년 대선 패배 이후에도 달라진 건 별로 없는 거 같습니다. “청문회에서 새로운 사실을 밝히는 등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합니다. 국민을 감동시키고 지지를 얻어내는 일은, 반대를 넘어서 긍정적인 정책을 양산하고 국민에게 훨씬 가까이 다가가는 모습을 보일 때 가능합니다. 국회 가서 여러 차례 말했는데도 별로 변화의 조짐이 없습니다. 선거에 임박해 국민에게 호소하는 것보다, 그 이전에 국민에게 호감 주는 정책을 만들어내고, 공직 후보자들을 훈련시키고, 우리 사회의 좋은 디자인을 만들어 내는 게 필요합니다.” -민주당도 대안이 부족하다는 건 스스로 알 텐데요, 어떻게 어떤 대안을 내놔야 하느냐에서 뚜렷한 방안을 갖고 있지 못한 듯합니다. 이에 대해 조언을 한다면 어떤 게 있겠습니까? “지금의 민주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은 굉장히 축소된 상태입니다. 그럴 때는 연대하는 힘이 필요합니다. 그 연대엔 정치세력 간 연대도 포함될 수 있고,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시민사회나 다양한 단체, 기관끼리의 네트워크나 연합도 필요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민주당이) 소극적이지 않나 싶습니다. 조금 더 큰 틀에서 보면 협력할 수 있는 사람들, 세력들이 많지 않습니까?” -민주당이 더 개방적으로 폭을 넓혀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지금 민주당은 지난 정부 시절의 민주당 또는 열린우리당만큼도 다른 세력을 포용하고 있지 못합니다. 우후죽순 다양한 정치세력이 생겨나는데, 그 모든 세력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광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오래전부터 서울시장 또는 대통령 후보감으로 거론됐다. 그럴 때마다 그는 “정치보다 중요한 게 있다”고 말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단도직입적으로 내년 지방선거에 서울시장 후보로 나설 생각이 있는지를 물었다. 그는 부인했다. 하지만 예전과는 좀 다른 느낌이었다. 이번엔 ‘아직은’, ‘지금으로선’이란 단서가 달렸다. -내년 지방선거에서 박원순 변호사를 서울시장 후보로 내는 게 어떠냐는 의견이 정치권과 시민사회 진영에 적지 않습니다. 후보 추천 얘기가 하나로 모아진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럼 저는 도망가겠습니다.(웃음) 사실 그런 얘기들이 곳곳에 있습니다만, 저는 확실히 출마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좋은 지방정부,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일이라면 기꺼이 작은 노릇이라도 할 겁니다. 다만 제가 후보자로 나가는 생각은 아직 없습니다.” -‘아직은’ 생각이 없다는 겁니까? “지금으로선 단언하고 있습니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안타까운 일, 화가 나는 일을 볼 때, 내가 정치에 뛰어들어 고쳐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그런데 정치 문제라기보다는, 당황스럽고 분노스럽습니다. 저는 나름의 젊음을 희생하면서 해 왔는데 말이죠, 이런 압박을 받을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시 돌이켜 생각하면, 저는 늘 수난과 고난 속에서 훨씬 더 압박받는 많은 사람들과 갈 수 있었습니다. 저는 상을 준다고 할 때 제일 괴로웠습니다. 내가 현실에서 제대로 못하고 있구나 싶어서요. 정말 훌륭한 일을 한 사람은 당대가 아니라 후세에 평가받지 않습니까. 당대에 상 받는 사람이 되면 세상을 위해 충분히 일하지 않았다는 반증이 되지 않을까 싶어 오히려 핍박을 받는 게 더 좋습니다. 마음을 굉장히 가다듬었고, 과거에 그랬듯이 억압받는 사람, 힘없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게 다행스럽고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핍박받고 힘없는 사람들이 정치에 나서달라고 하면 거절하기 힘들 거 같은데요? “지금도 기꺼이 그런 일 하고 있지 않습니까?” -정치 참여도 ‘그런 일’의 하나 아닌가요? “물론 정치가 꼭 나쁘다고 하는 건 아닙니다. 정치는 영광이나 권력의 자리가 아니라, 더 큰 희생의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시민사회라는 영역에서 해 왔던 일을 계속하는 게 제 역할이고, 그런 걸 바라는 국민도 상당히 있지 않을까, 그런 고민이 있는 거죠.” 인터뷰/박찬수 부국장 pcs@hani.co.kr, 정리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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