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전문의 “‘망신 수사’ 견디기 힘들었을 것”
노무현 전 대통령이 23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심리적인 배경에 대해 정신과전문의들은 말을 아끼면서도 "명분과 원칙을 중요시하는 노 전 대통령이 '망신주기식'으로 진행된 일련의 수사를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한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정신과전문의들은 노 대통령 자살 배경에 대해 한결같이 극도로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세브란스병원 정신과 남궁기 교수는 "정신질환 병력이 없는 노 전 대통령의 자살 배경과 정신상태를 예단하는 것은 사실관계를 왜곡할 수 있으므로 부적절하다"고 선을 그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의 성격이나 행적으로 볼 때 그동안의 수사가 견딜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을 것이라는 데 대체로 의견을 같이했다.
공개된 짧은 유서의 내용에도 '너무'라는 단어가 수차례 반복되는 점도 노 전 대통령의 심적 고통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반칙이 없는 세상'을 내세우며 명분과 원칙, 도덕성을 중요시한 노 전 대통령이 자신의 도덕성이 부정되고 비난과 조롱을 받는 상황을 견딜 수 없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는 것.
이에 따라 노 전 대통령은 검찰이 구속 여부를 결정할 시점이 다가오자 자살을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는 게 정신과전문의들의 추정이다.
서울대 정신과 권준수 교수는 "지금까지 파악된 내용을 볼 때 충동적인 것은 아닌 것 같다"며 "부정부패를 타파하고 도덕적으로 우월한 정권을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한 자신의 노력이 무너지므로 심적 타격을 크게 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또 "기존 관습을 타파하는 데 삶을 쏟았던 노 대통령이지만 결국 '기존 체제'로 인해 좌절했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생을 마치기로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이름을 밝히길 거부한 정신과전문의 A씨는 "검찰의 수사가 언론을 통해 시시때때로 흘러나오는 등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지키기보다는 '망신주기식'으로 진행됐다"며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한 노 전 대통령이 명예를 실추당했을 뿐 아니라 구속여부를 결정할 시점이 다가오자 더 이상의 고통을 감내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녀를 보호하기 위한 배경도 읽힌다는 분석도 나왔다.
김포한별병원 서동우 정신과전문의는 "유서 내용에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며 "딸에게로 수사가 집중되는 등 가장 가까운 자녀까지 어려움을 겪게 되자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의도도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세브란스병원 남궁기 교수도 "자신의 사회적.도덕적 위상의 와해로 인한 자살인 '무통제적.무규범적 자살'(Anomic suicide)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측된다"며 "(노 전 대통령이)고통에서 벗어나고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마지막 선택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한편 이번 노 전 대통령 서거와 관련해 '추종자살' 움직임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유명인이 자살한 이후 자살방법 등을 따라 하는 행위가 이어지는 것을 모방자살이라고 하지만 자살할 별다른 이유가 없음에도 추종자들이 잇따라 자살하는 것을 '추종자살'로 본다.
서동우 정신과전문의는 "고인에 대해 높은 충성도를 보이는 지지그룹이 적지 않았던 만큼 자칫 추종자살이 이어질까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
김길원 하채림 기자 tree@yna.co.kr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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