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 / 제정구 / 이태영 / 이우정 / 송건호 / 문익환 / 김승훈 / 계훈제
6월항쟁20돌 끝나지 않은 6월 : 1부
1987, 그후 20년 ② 20년이 남긴 것
1987, 그후 20년 ② 20년이 남긴 것
YS·DJ는 고문, 노대통령 부산 상임집행위원 맡아
열린우리 이해찬·한나라당 이재오 집행위원 출신 1987년 6월 항쟁 당시 사회운동세력과 종교계, 야당의 연대기구였던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 이 조직은 전국적인 규모의 시위를 조직·통제한 항쟁의 구심이었으며, 민주인사들의 총집결지였다. 국본 발기인 2191명을 보면, 종교계 인사가 683명(31%)으로 가장 많았고 △지역대표 352명(16%) △재야단체 343명(16%) △정치인 213명(9.7%) △노동 39명(1.7%) △농민 171명(7.8%) △도시빈민 18명(0.8%) △기타 317명이었다. 87년 당시 민주화운동 세력 중 학생운동과 정치적 노동운동 조직을 빼곤 대부분 국본에 모인 셈이었다. 임원진은 고문(8명), 공동대표(65명), 상임공동대표(10명), 집행위원(506명), 상임집행위원(29명)으로 짜였다. 20년이 흐른 지금, 이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임원진 618명 가운데 당시 야당에 몸담고 있던 사람이 156명이었고, 이후 20년 동안 31명이 새롭게 정치권에 진출한 것으로 나타났다. ■ 상당수가 정치권에 6월 항쟁 이후 이들의 행로는 ‘6월’의 성과와 한계가 적나라하게 투영돼 있다. 이들은 ‘6월’ 이후 해를 거듭하면서 기존 정당인, 진보정당인, 풀뿌리 운동가, 시민운동가 등으로 분화했다. 본디 정치인들의 참여가 적잖은 만큼, 상당수가 정계에 발을 담갔다. 종교계 및 재야 원로 6명과 함께 고문단을 구성했던 김영삼·김대중씨는 차례로 대통령을 지냈다. 노무현 대통령은 당시 국본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이었다.
여권 대선 후보군에는 국본 출신이 여럿이다.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은 당시 민주화청년운동연합(민청련) 사건으로 감옥에 있으면서 국본 공동대표를 맡았다. 이해찬 전 총리는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총무국장으로서 전국 시위를 기획하고 시위 상황을 챙기는 집행위원이었다. 열린우리당의 임채정(국회의장)·장영달(원내 대표)·김부겸·이미경·김희선 의원 등도 국본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80년대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이상수 노동부 장관은 국본 민권위원장이었다. 보수정치인으로 변모한 이도 적잖다. 한나라당의 이재오·박계동·이규택 의원 등이 국본 집행위원이었다. 이재오 의원은 민통련 조국통일위원장, 민중당 사무총장 등을 거쳐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에 들어갔다. 박계동 의원은 90년 3당 합당에 반대해 ‘꼬마민주당’ 활동을 하다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국본 대변인을 맡았던 인명진 목사는 한국방송(KBS) 이사를 거쳐,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을 맡고 있다. ■ 시민운동, 그리고 6월 계승사업에 시민운동에 투신하면서 항쟁의 열정을 이어간 이들도 있고, 정부에 참여해 6월의 역사를 계승한 이들도 있다. 상임공동대표 가운데 박형규 목사는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서 제2의 건국 범국민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올 대선을 앞두고 ‘민주평화개혁세력의 대통합’을 위해 지난 4일 결성된 시민사회계의 원로모임인 ‘민주평화 국민회의’에 참여하고 있다. 오충일 국본 상임집행위원장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회장, <노동일보> 사장 등을 거쳐 현재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오 목사 역시 국민회의에 참가했다. 김병오 당시 국본 홍보위원장은 국회의원을 거쳐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유시춘 현 6월항쟁 20년추진위 공동집행위원장은 국본 상임집행위원이었다. 국가인권위 상임위원을 거쳐 최근 한국문화정책연구소 이사장에 취임했다. 국본 정책 연구차장으로 일한 황인성씨는 현 정부에서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을 지냈다. 공동대표였던 고은 시인은 민족예술인총연합 의장과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을 지냈다. 그는 6·15 남북 정상회담 때 특별수행원 자격으로 방북했고, 남북 문인 교류 행사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불교계 인사로 공동대표로 참여해 87년 6월10일 저녁 6시 서울 성공회 대성당에서 마이크를 잡고 시민들에게 6월 항쟁 시작을 알렸던 지선 스님. 그는 항쟁 이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공동의장,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공동의장, 실천불교전국승가회 명예의장 등을 지냈다. 한편, 각계 원로가 맡았던 고문 가운데 함석헌 선생, 문익환 목사, 홍남순 변호사, 강석주 스님은 타계했다. 상임공동대표 가운데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을 이끈 김승훈 신부, 재야원로 계훈제 선생, 여성운동가 이우정 선생, 한겨레신문사 초대 사장 송건호 선생, 제정구 전 의원도 타계했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열린우리 이해찬·한나라당 이재오 집행위원 출신 1987년 6월 항쟁 당시 사회운동세력과 종교계, 야당의 연대기구였던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 이 조직은 전국적인 규모의 시위를 조직·통제한 항쟁의 구심이었으며, 민주인사들의 총집결지였다. 국본 발기인 2191명을 보면, 종교계 인사가 683명(31%)으로 가장 많았고 △지역대표 352명(16%) △재야단체 343명(16%) △정치인 213명(9.7%) △노동 39명(1.7%) △농민 171명(7.8%) △도시빈민 18명(0.8%) △기타 317명이었다. 87년 당시 민주화운동 세력 중 학생운동과 정치적 노동운동 조직을 빼곤 대부분 국본에 모인 셈이었다. 임원진은 고문(8명), 공동대표(65명), 상임공동대표(10명), 집행위원(506명), 상임집행위원(29명)으로 짜였다. 20년이 흐른 지금, 이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임원진 618명 가운데 당시 야당에 몸담고 있던 사람이 156명이었고, 이후 20년 동안 31명이 새롭게 정치권에 진출한 것으로 나타났다. ■ 상당수가 정치권에 6월 항쟁 이후 이들의 행로는 ‘6월’의 성과와 한계가 적나라하게 투영돼 있다. 이들은 ‘6월’ 이후 해를 거듭하면서 기존 정당인, 진보정당인, 풀뿌리 운동가, 시민운동가 등으로 분화했다. 본디 정치인들의 참여가 적잖은 만큼, 상당수가 정계에 발을 담갔다. 종교계 및 재야 원로 6명과 함께 고문단을 구성했던 김영삼·김대중씨는 차례로 대통령을 지냈다. 노무현 대통령은 당시 국본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이었다.
여권 대선 후보군에는 국본 출신이 여럿이다.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은 당시 민주화청년운동연합(민청련) 사건으로 감옥에 있으면서 국본 공동대표를 맡았다. 이해찬 전 총리는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총무국장으로서 전국 시위를 기획하고 시위 상황을 챙기는 집행위원이었다. 열린우리당의 임채정(국회의장)·장영달(원내 대표)·김부겸·이미경·김희선 의원 등도 국본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80년대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이상수 노동부 장관은 국본 민권위원장이었다. 보수정치인으로 변모한 이도 적잖다. 한나라당의 이재오·박계동·이규택 의원 등이 국본 집행위원이었다. 이재오 의원은 민통련 조국통일위원장, 민중당 사무총장 등을 거쳐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에 들어갔다. 박계동 의원은 90년 3당 합당에 반대해 ‘꼬마민주당’ 활동을 하다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국본 대변인을 맡았던 인명진 목사는 한국방송(KBS) 이사를 거쳐,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을 맡고 있다. ■ 시민운동, 그리고 6월 계승사업에 시민운동에 투신하면서 항쟁의 열정을 이어간 이들도 있고, 정부에 참여해 6월의 역사를 계승한 이들도 있다. 상임공동대표 가운데 박형규 목사는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서 제2의 건국 범국민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올 대선을 앞두고 ‘민주평화개혁세력의 대통합’을 위해 지난 4일 결성된 시민사회계의 원로모임인 ‘민주평화 국민회의’에 참여하고 있다. 오충일 국본 상임집행위원장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회장, <노동일보> 사장 등을 거쳐 현재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오 목사 역시 국민회의에 참가했다. 김병오 당시 국본 홍보위원장은 국회의원을 거쳐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유시춘 현 6월항쟁 20년추진위 공동집행위원장은 국본 상임집행위원이었다. 국가인권위 상임위원을 거쳐 최근 한국문화정책연구소 이사장에 취임했다. 국본 정책 연구차장으로 일한 황인성씨는 현 정부에서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을 지냈다. 공동대표였던 고은 시인은 민족예술인총연합 의장과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을 지냈다. 그는 6·15 남북 정상회담 때 특별수행원 자격으로 방북했고, 남북 문인 교류 행사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불교계 인사로 공동대표로 참여해 87년 6월10일 저녁 6시 서울 성공회 대성당에서 마이크를 잡고 시민들에게 6월 항쟁 시작을 알렸던 지선 스님. 그는 항쟁 이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공동의장,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공동의장, 실천불교전국승가회 명예의장 등을 지냈다. 한편, 각계 원로가 맡았던 고문 가운데 함석헌 선생, 문익환 목사, 홍남순 변호사, 강석주 스님은 타계했다. 상임공동대표 가운데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을 이끈 김승훈 신부, 재야원로 계훈제 선생, 여성운동가 이우정 선생, 한겨레신문사 초대 사장 송건호 선생, 제정구 전 의원도 타계했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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