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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영어 열심히 해 유학 갈거예요”

등록 2007-02-20 19:29수정 2007-03-05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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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쇳말로 본 새터민 젊은이] ① 첫발
남한생활 53일째 영식이 한심한 집에 놀라고 사먹는 물에 돈걱정
하지만…자유가 있어 좋아요

북한을 이탈해 남한에 들어온 새터민 수가 마침내 1만명을 넘어섰다. 이 가운데 25살 이하 젊은이는 18.9% 가량이다. 남한 젊은이와 함께 통일시대를 이끌어 갈 새터민 젊은이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며 성장해 가고 있다. 설렘과 두려움, 기쁨과 슬픔, 혼돈과 희망이 뒤섞인 이들의 청춘기를 몇차례에 걸쳐, 있는 그대로 들여다본다.

지난 17일 서울 노원구 한 아파트의 영식(16·가명)이네 집은 설 전날임에도 전 부치는 냄새나 과일 깎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아들 영식이와 11살 된 딸을 데리고 북한을 탈출해 지난해 9월 남한에 들어온 어머니 박아무개(42)씨는 “북에서는 차례를 지내는 집이 많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직 정신이 없어서…”라고 말했다. 새터민 적응교육기관인 하나원을 퇴소한 뒤 이들의 남한 생활은 이날로 52일째다.

얼굴에서 사춘기 청소년 티가 물씬 풍기는 영식이는 지난해 중국 선양의 한국 영사관에 머물 때만 해도 ‘남한 가면 걱정 없이 잘 먹고 잘 살고 무조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한 사회가 자동차도 주고 가정부도 한명씩 붙여준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 말을 믿었다.

그러나 하나원을 나올 무렵에는 앞날에 대한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남한 사람들도 성공하고 잘사는 게 쉽지 않은데, 자기네 가족은 더하면 더했지 덜할 리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식이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나왔다”고 무덤덤하게 말했다.

역시나 배정받은 아파트에 오자마자 실망은 시작됐다. 바닥은 흙투성이에 화장실 변기는 덜컹덜컹 흔들렸다. 꼬박 이틀 동안 청소만 했다. 영식이는 “너무 한심해서 놀랐다”고 한다. 한겨울에 유리창이 아예 없는 베란다보다 영식이를 더 썰렁하게 한 것은, 바로 “우리를 반겨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4500만명이 사는 이 땅에 영식이네의 존재를 알고 진심으로 환영하는 이는 거의 없는 게 현실이다.

며칠 지내는 동안 피부로 와 닿은 남한의 현실은 전혀 딴 세상인 드라마 속 같았다. 북한에서는 자연수를 그냥 마셨지만 남한에서는 물까지도 사 먹어야 하고, 한 걸음을 옮겨도 교통비를 내야 했다.


하지만 실망만 한 것은 아니다.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주어지는 자유에 영식이는 큰 만족감을 느낀다. “내 마음대로 다닐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 없단다. 또 무궁무진한 ‘검색의 바다’ 인터넷도 영식이의 마음을 남한 사회에 가깝게 끌어당긴 요인 가운데 하나다.

그가 가방을 열더니 얼마 전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라며 몇 권을 보여준다. 모두 영어 책이다. 영식이의 꿈은 대학을 졸업한 뒤 국외 유학을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북한에 큰 무역회사를 차리는 게 목표다. 이를 위해 영어 공부는 필수라는 것을 영식이도 잘 알고 있다. 그의 가방에 벌써 토익 책이 들어 있는 게 대책없는 욕심만은 아닌 것이다.

영식이는 다음달 인근 중학교에 2학년으로 입학한다. 영식이는 “새 친구들을 많이 사귀고 친해지고 싶다”며 웃었다. 학교생활에서 또다른 포부도 있다. “(남한 사람들은) 새터민 아이들이 일반 학교에 가면 적응 못하고 결국 떨어져 나간다고들 알고 있지만, 잘 지내는 애들도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요.”

하지만 어머니가 집 근처 식당에서 밤마다 5시간씩 일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30만원이 넘는 자신의 교복값 때문이란 걸 영식이는 알까?

영식이는 남한의 친구들에 비해 그리 가볍지 않은 첫발을 내딛고 있다. 이야기 도중 “잘 해야 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되풀이한다. 스스로에게 다짐이라도 하는 듯한 그 말버릇 속에서 남한에서 맞이하는 미래에 대한 꿈과 두려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전종휘 기자, 김지은 수습기자 symbi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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