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 전체를 이용해 앤디 워홀의 작품 등을 전시한 서울 인사동 ‘쌈짓길’은 지난달 건물 입장료 3천원을 걷었다가 누리꾼들의 반발이 이어지자 이를 취소했다. 쌈짓길 제공
네티즌 청원·사회창안클럽 등 사회문제 개선 주도
평소 서울 인사동을 자주 찾는 대학생 이아무개(21)씨는 지난달 말 복합문화쇼핑몰인 ‘쌈짓길’이 입장료 3천원을 받는다는, 깜짝 놀랄 소식을 들었다.
“인사동은 원래 열린 공간이고 전세계적으로도 쇼핑몰에 입장하면서 돈을 내는 경우는 없다”고 생각한 이씨는 인터넷 포털 다음의 ‘네티즌 청원’란에 쌈짓길 무료화를 내걸고 서명운동에 들어갔다.
큰 기대 없이 시작한 일이었으나 나흘 동안 2700여명의 네티즌이 동참했고, 쌈짓길 쪽은 지난 4일 그 뜻을 존중해 유료화를 철회하겠다고 발표했다.
인터넷이 시민들의 번득이는 아이디어나 문제 의식을 운동으로 승화시켜 결국 현실 세계를 바꿔나가는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이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얻거나 댓글을 다는 수동적 위치에서 벗어나, 세상의 변화를 이끄는 능동적 사용자로 나서고 있는 것이다.
포털 다음의 ‘네티즌 청원’란이 거둔 성과는 더 있다. 철거될 위기에 처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한 한국식 정자를 살리자고 1520명이 서명한 끝에, 이를 본 현지 동포가 정자를 사들여 보존하기로 했다. 영화 <홀리데이> 조기 종영이 철회되기도 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 협상 중지를 요구하는 청원에는 올해 들어 가장 많은 18만8700여명이 뜻을 보탰다.
포털에서 네티즌들이 숫자의 힘으로 뜻을 관철시킨다면, 민간연구소인 희망제작소의 ‘사회창안클럽’은 치밀한 사전조사와 연구작업을 거쳐 이를 운동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네티즌들이 인터넷 사이트에 제안한 각종 아이디어를 두고 자체 모집한 시민평가단이 타당성을 검토하고 현실화 방안을 논의한다.
성공 사례도 하나둘씩 나오고 있다. 서울 시내버스와 지하철의 노약자 좌석 등에서 눈에 띄는 ‘임신부 배려’ 스티커가 이들의 작품이다. 서울시와 지하철공사 등을 적극적으로 설득해 이뤄냈다. 임신 초기 여성들은 몸이 힘들어도 다른 사람들이 그런 사정을 알기 어렵다는 점에 문제의식을 느낀 한 시민의 제안이 첫 단추가 됐다. 배기량이 많고 검은색 일색인 관용차에 변화를 주자는 캠페인에는 행정자치부가 “고려해보겠다”는 답변을 보내왔다.
희망제작소의 이경희 연구원은 “앞으로 일반 시민뿐만 아니라 국회의원, 공무원 클럽 등도 만들어 이들 클럽이 유기적으로 운영되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역 시민단체들도 이런 대열에 동참하고 있다. 익산희망연대는 회원과 시민 40여명을 대상으로 22일부터 이틀 동안 사회창안학교를 운영한다. 광주전남개혁연대 등도 ‘사회창안’이라는 주제를 어떻게 현실화할지 고민 중이다.
시민단체가 의제를 설정하고 회원이 따르던 일방적 방식의 시민운동도 변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 쪽도 예외는 아니다. 시민제안 사이트를 통해 시정과 관련한 아이디어를 모으고 있는 서울시는 21일 청계천에 ‘청혼의 벽’을 설치하자는 아이디어 등을 현실화하겠다고 밝혔다.
모두가 시민의 상상력을 모아 사회 변화로 연결시키려는 ‘역발상’들이다. 인터넷은 그 든든한 기반이 되고 있다.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취재 도움/서강대 국문학 4년 유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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