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명동에 위치한 밀리오레 쇼핑몰 1층 청바지 매장의 마네킹. 마네킹의 사이즈는 55다. 44사이즈를 입는다면 최소한 이 마네킹보다 몸이 날씬해야 한다. 김미영 기자
[인터뷰] ‘그녀들의 반란’을 선동하는 19살 정유정씨
외국서도 못느낀 수치심을 고국에서 맛보다니…
외국서도 못느낀 수치심을 고국에서 맛보다니…
“여성뿐 아니라 남성 이미지의 획일화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고자 카페를 만들었습니다.” 여성옷 사이즈가 작아지고, 날씬한 여성만을 위한 의류사이즈에 반기를 든 사람은 예상과 달리 열아홉살 어린 학생이었다. 미국 콜로라도 로키마운틴스쿨 11학년인 정유정(19)씨는 “뚱뚱한 것이 죄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지난 14일 ‘그녀(그)들의 반란(cafe.daum.net/speakupgirls)’ 카페를 만들었다. 당시 신문과 방송에서 여성의 의류 사이즈가 가장 마른 사람들의 사이즈인 44로 굳어지고 있다는 보도가 연일 터져나왔다. 주위를 둘러봐도, 44사이즈를 입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도 마른 여성만 있는 것처럼 몰아가는 분위기 속에 그녀는 마치 ‘죄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엄마랑 백화점 새옷 사러 갔다가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어요”
‘키 170cm, 몸무게 71kg’. 그녀의 몸이 보통사람의 체격에서 크게 벗어난 편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맞는 사이즈는 77(L)인데 이를 구하기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전시된 옷이 맘에 들어 의류매장에서 사이즈를 찾으면, 항상 들려오는 답변은 “그 사이즈는 만들지 않는데요”였다. 고등학교 1학년을 마친 뒤 2004년 미국 유학을 간 그녀가 2년 만에 고국에 들어와서 느낀 점은 ‘수치심’과 ‘낭패’였다. “미국생활 1년 만에 10kg이 불어난 저를 보는 부모님 표정엔 한숨이 가득했어요. 전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지만, 갑자기 지난해 오랜만에 엄마와 팔짱을 끼고 새옷을 사기 위해 백화점에 갔던 기억이 떠올랐어요. 한 매장에서 66사이즈 바지의 단추가 채워지지 않는 거예요. 그게 그 집에서는 가장 큰 사이즈였습니다. 제 자신이 부끄러워졌어요. 집에 가자고 어머니를 잡아 끌기만 했죠. 수치심에 집에 돌아오자마자 눈물을 쏟았죠.” 언론에서 호들갑을 떠는 ‘44사이즈 대세론’ 기사를 보며 정씨는 자신이 눈물을 흘린 것처럼 많은 여성들이 고통받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방인이면서도 미국에서 옷을 살 때도 경험하지 못했던 ‘수치심’을 고국인 한국에서 느낀다면, 분명 뭔가 한참 잘못된 것이죠.” “이방인으로 미국서 살때도 못느낀 수치심을 왜 내 나라에서 느껴야 하나요?” “미국에서는 여성옷 사이즈가 0~18까지로 다양하며, 바지 길이도 28, 30 32 등으로 세분화되어 있어요. 상의도 XS부터 XXL까지 나오기 때문에 통통족들이 느끼는 불편함은 거의 없죠. ‘왜 이럴까?’라고 의구심을 갖게 된 것은 그때였어요. 엄마는 ‘66사이즈 입을 정도로 살을 빼면 사달라는 옷 다 사줄 게’라고 절 달랬지만 전 ‘사람 나고 옷 났지, 옷 나고 사람 났어요?’라고 따졌죠. 왜 사람이 옷에 신체를 맞춰야 하죠? 옷이 사람 사이즈에 맞게 제작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다음카페 ‘그녀(그)들의 반란’ 운영자 정유정씨.
여성과 남성의 획일화를 반대하는 다음카페 ‘그녀(그)들의 반란’ 메인화면.
“44사이즈가 대세라는 말은 틀린 것이라고 확신해요. 작은 사이즈로 여성의 몸을 구속하려 하니까, 많은 여성들이 살을 뺄 수밖에 없는 분위기를 만드는 겁니다. 여성옷 사이즈가 다양해지고, 외모나 몸매로 여성의 능력이나 자질을 평가하려는 사회 의식이 개선된다면 많은 여성들이 느끼는 불편함은 사라질 겁니다.” 그녀는 무엇보다 ‘여성 스스로의 의식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불편하더라도, 대충 살지 뭐. 옷? 안 맞으면 못 입는 것이고, 맞는 옷 찾아서 입지 뭐’가 아니라 ‘많은 여성들이 사이즈 때문에 옷을 구입할 때 치욕감을 느낀다고? 그럼 바꿔야지 뭐’라는 문제의식을 갖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해요.” <한겨레> 온라인뉴스팀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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