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문화일반

그들의 환호? 그녀들의 반란? “44가 대세”

등록 2006-06-14 10:00수정 2006-06-15 20:12

서울 명동에 위치한 밀리오레 쇼핑몰의 한 의류매장에 티셔츠, 면바지 등 여성캐주얼이 근사하게 진열돼 있다. 하지만 통통족(66사이즈 이상) 이 입을 만한 옷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통통족들이 이런 옷을 입기 위해서는 운동을 하거나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 김미영 기자
서울 명동에 위치한 밀리오레 쇼핑몰의 한 의류매장에 티셔츠, 면바지 등 여성캐주얼이 근사하게 진열돼 있다. 하지만 통통족(66사이즈 이상) 이 입을 만한 옷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통통족들이 이런 옷을 입기 위해서는 운동을 하거나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 김미영 기자
[현장] 정말 허리 23인치의 여성들이 대다수인가?
한국의 거리는 44사이즈를 걸친 ‘날씬녀’들로 채워지는가?

백화점 유명 의류브랜드 매장에서는 여성옷 최대 매출품목이 44사이즈(허리 23~24인치)라고 밝히고 있고, 언론은 “이젠 44가 여성옷의 대세”라고 보도하고 있다. 정말 ‘44사이즈’가 대세인가. 여느 해보다 과감한 노출패션이 휩쓰는 올여름 44사이즈가 아닌 여성들은 서글프다. ‘44사이즈’가 여성복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는 잇단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한번쯤 백화점이나 의류매장에서 맘에 드는 옷을 ‘맞지 않아’ 포기해야 했던 이들에게 ‘44사이즈 대세론’은 반갑지 않은, 또하나의 강요이자 무언의 폭력으로 다가온다.

“저희 매장엔…L(77)사이즈가 없는데요?”

#1. 신아무개(31·서울시 관악구 신림동)씨는 둘째 아이를 낳은 뒤 늘어난 체중 때문에 임신 전에 입었던 옷들이 폐기처분될 상황에 이르자, 얼마 전 각고의 노력 끝에 살을 뺐다. 작아진 옷도 그렇지만, 새 옷을 사러 백화점에 갔다 마음에 드는 옷을 두고도 사이즈가 맞지 않아 눈물을 머금고 돌아서야 했던 쓰라린 기억 때문이었다. 애 둘을 낳은 아줌마 임을 감안할 때, 자신의 몸이 그다지 ‘뚱뚱하지 않다’고 생각해왔는데, 백화점을 찾은 신씨는 옷가게들의 달라진 ‘상품’에 절망했다.

신씨가 구입하려 했던 백화점의 한 브랜드매장 점원은 “L(77)사이즈는 나오지 않아요. 가장 큰 것이 66사이즈인데, 예전의 55사이즈 정도로 생각하시면 돼요”라며 위로했지만, 한편으로는 ‘옷 선택의 자유’가 주어지지 않는 현실에 슬프기도 하고 화도 났다.


#2. 지난해 5월 딸을 낳은 김아무개(32·서울시 구로구 구로동)씨는 아예 백화점에 가지 않는다. 출산 후 몸이 불어 L사이즈를 입어야 하지만, 백화점이나 유명의류 매장에서는 김씨에게 맞는 옷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결혼 전에도 M(66)사이즈를 입었던 김씨는 얼마 전부터 빅사이즈 전문 인터넷쇼핑몰을 애용한다. “매장마다 44~66사이즈가 대부분인데, 66사이즈도 예전의 66사이즈가 아닌 것 같아요. ‘몸짱 열풍’에 동참한다기보다 입고 싶은 옷을 입기 위해서라도 살을 빼야 할 것 같아요. 몸매 차별을 견딜 수 없어서요.”

‘44 사이즈’가 인기라고 한다. 매스컴이 앞다퉈 44사이즈가 여성 옷 사이즈 가운데 가장 많이 팔린다고 보도하고 있다. 44사이즈란 허리 23∼24인치로, 일반적인 마네킹(55사이즈)보다 날씬한 체형이 입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55는 허리가 25∼26인치, 66은 27∼28인치에 맞춰 나온다.

그런데도 백화점 의류매장에선 44사이즈 매출이 25% 이상 늘어났는가 하면 인터넷에선 44사이즈 전문쇼핑몰까지 생겨났다. 그만큼 ‘슬림’한 여성들이 크게 늘어났다는 방증이다. 10여년 전만 해도 날씬한 여성들도 ‘55사이즈’가 보통이었다. 이보다 체형이 아담한 사람들은 기성복을 구하기가 힘들거나 수선해 입어야 했다.

44사이즈 열풍은 젊은 여성들이 선호하는 오브제, 미샤, 플라스틱아일랜드 등 몇몇 브랜드 의류를 중심으로 시작됐다. 오브제는 브랜드 상품 출시 초기부터 44사이즈를 만들어 판매했다. 매출은 많지 않았다. 2~3년 전까지만 해도 전체 매출의 10%도 넘지 않았다. 오브제 영업MD 신동익 과장은 “올해 44사이즈 매출 비중이 21%로 크게 늘어 전체 점유비로만 봐도 작년에는 30%였으나 올해는 40%나 된다”며 “젊은 여성을 중심으로 체형이 날씬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롯데 등 유명백화점에서 판매되는 44사이즈 비중도 최근 20%까지 높아졌다. 과거엔 선천적으로 몸집이 작은 여성들이 이 사이즈를 입었다면 요즘 들어서는 55사이즈를 입는 여성들이 다이어트 등으로 몸을 관리해 이 사이즈를 즐겨 입는다는 게 백화점 쪽의 설명이다. 인터넷에도 44사이즈 전문 쇼핑몰이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나고 있다.

서울 명동에 위치한 밀리오레 쇼핑몰 1층 청바지 매장의 마네킹. 마네킹의 사이즈는 55다. 44사이즈를 입는다면 최소한 이 마네킹보다 몸이 날씬해야 한다. 김미영 기자
서울 명동에 위치한 밀리오레 쇼핑몰 1층 청바지 매장의 마네킹. 마네킹의 사이즈는 55다. 44사이즈를 입는다면 최소한 이 마네킹보다 몸이 날씬해야 한다. 김미영 기자
명동의 한 청바지 매장 “44사이즈가 전체 판매량의 65%”

몇몇 브랜드는 기준 사이즈를 아예 줄여 제품을 내놓기도 한다. 여성캐주얼 에고이스트는 다른 브랜드보다 기준 사이즈가 작은 편이지만, 2001년부터 44사이즈를 팔고 있다. S와 M사이즈 제품만 생산하고 있는 이랜드의 캐주얼의류 ‘피오루치’도 다른 브랜드보다 기준 사이즈가 적지만, 청바지의 경우 44(XS)사이즈도 판대한다. 임혜경 명동점 점장은 “S사이즈는 44, M사이즈는 55 정도로 보면 되지만, S사이즈의 판매율이 65%에 이른다”며 “M사이즈도 들여놓았지만 많이 팔리지 않았으며, 연령층이 낮을수록 마른 사람이 많은 반면 통통족들은 맞는 옷이 없어 발길을 돌리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로엠 명동점의 이규옥 점장도 “55사이즈가 일반적으로 44.5 정도로 줄었지만 55 판매가 더 많다”며 “66도 퉁퉁한 사람이 입는 사이즈가 아닌데, 요즘에는 통통족으로 취급받는 경향이 많은 것 같다”고 설명했다.

체형이 큰 사람들 상대적으로 옷선택 폭 적어

상대적으로 신씨와 김씨처럼 통통한 여성들은 옷 사입기가 까다로워진 셈이다. 맞는 옷을 고르려면, 빅사이즈 전문 인터넷 쇼핑몰을 찾거나 미시캐주얼, 중장년층을 겨냥한 여성브랜드 쪽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그렇다고 체형이 작은 사람들이 옷 고르기가 수월해진 것도 아니다. 명동에서 만난 신혜민(18)양은 “44사이즈가 대세라고 하지만 여전히 작은 옷을 구하는 것은 쉽지 않다”며 “원래 44사이즈의 체형과 날씬해서 44사이즈를 입는 것과는 차이가 있지만 이런 점이 매장에서 크게 고려되지 않는 것 같다”고 전했다.

브랜드 의류뿐 아니라 보세의류도 ‘작은 옷’ 비중이 늘고 있는 추세다. 명동 하이해리엇에서 여성캐주얼 ‘퀸’ 매장을 운영하고 있는 정현미(34)씨는 “77은 아예 가져오지 않는다. 55 판매 비중이 75%, 66이 25%로 판대되고 있다”고 말했다. 같은 층에서 청바지 매장인 ‘시에프라인’을 운영하고 있는 이다은(22)씨도 “66사이즈는 거의 나가지 않고 55사이즈 판매가 대부분이어서 77은 가져다 놓지 않는다”며 “통통족이 이 건물에 입점한 매장에서 옷을 사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이런 점 때문에 ‘44사이즈 대세론’ 한켠에서는 여성브랜드 옷의 사이즈 기준을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44사이즈를 생산하거나 기존 55, 66 사이즈 기준을 줄여, 44사이즈가 ‘대세’인 양 호도해 여성의 몸을 옷에 맞추도록 ‘몸짱’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여성의 평균 체형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씨는 “얼마 전 인터넷에서 프리사이즈의 옷을 주문했는데, 옷이 작게 나와 맞지 않았다”며 “마른 여성만 고려해 작게 나오는 옷들 때문에 속상하다. 다양한 사이즈의 옷이 나와야 한다”고 푸념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다음> 아고라에서도 여성들의 불만이 폭주했다. ‘Lily’가 지난 8일부터 “옷 사이즈를 더 다양하게 해달라”는 네티즌 청원에 서명목표 2000명을 훌쩍 넘기는 2735명이 참여했다. ‘수’는 “날씬쟁이들만 사람인가”라고 반문했으며, ‘동그리’는 “마른 애들만 사는 것도 아닌데 옷들이 너무 적다”고 불평했다. ‘웃음소리’는 “옷이 작게 나오니 정상인 체형을 가진 사람들도 다이어트 한다고 건강을 해치고 있다”고 꼬집었으며, 백혜경씨는 “온 국민을 비정상적으로 다이어트하게 만드는 이상한 나라가 한국”이라고 지적했다.

서울 명동에 위치한 ‘피오루치’ 매장. 젊은 여성을 타깃으로 하는 이 브랜드는 여성 체형의 기준 사이즈를 다른 브랜드보다 줄여서 판매하고 있다. 김미영 기자
서울 명동에 위치한 ‘피오루치’ 매장. 젊은 여성을 타깃으로 하는 이 브랜드는 여성 체형의 기준 사이즈를 다른 브랜드보다 줄여서 판매하고 있다. 김미영 기자
“44사이즈 열풍은 언론 탓”

여성의 몸을 옷에 ‘맞추는’ 현상은 우리 사회의 몸짱 열풍과 무관하지 않다. 몸짱아줌마를 비롯해 다이어트에 성공한 연예인들을 따라하려는 모방심리와 ‘날씬녀’를 선호하는 사회 분위기가 그것이다. 잘 빠진 몸매가 여성의 경쟁력이라고 주장하는 사회와 언론이 여성의 ‘슬림화’를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려대 사회학과 임인숙 교수는 “여성의 몸을 상품화하는 산업이 번창하고, 취업이나 결혼 등에서 몸매가 여성의 능력을 나타내는 하나의 수단이 되면서 또하나의 판매전략 차원에서 ‘44’ 광풍을 만들어, 사회적으로 이상적인 몸으로 받아들여 가는 것 같다”며 “하지만, 상품화 전략 차원에서 나온 44사이즈가 여성의 이상적인 몸을 대변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며, ‘여성의 몸을 44사이즈에 맞춰라’, ‘슬림한 몸이 아름답다’고 주장하는 것은 여성에 대한 횡포”라고 진단했다.

그러나 이화여대 여성학과 박사과정 민가영씨는 이런 분위기를 여성의 경쟁력을 떨어뜨리기 위한 전략으로 봤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전쟁터에서 돌아온 남성들의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전쟁시 남성의 빈자리를 메웠던 여성들을 일터에서 가정으로 보내기 위해 사회가 ‘공황장애’(여성들이 공적인 공간에 나오는 것에 두려움과 공포심을 느끼게 만드는 질병)를 확산시킨 것과 같은 맥락이라는 것이다.

민씨는 “44사이즈 열풍은 여성의 외모주의가 자본과 교모하게 결합해 여성들의 경쟁력과 삶의 경쟁력을 상실하게 만드는 교묘한 장치”라며 “44사이즈, 가는 몸, 마른 몸에 대한 사회적 집착은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지는 것에 대한 이 사회의 무의식적 공포와 새로운 자본의 확대재생산 점을 찾으려는 자본주의의 결탁”이라고 진단한다. 민씨는 “여성들 개개인이 마른 몸이 자신에게 궁극적으로 자본(능력)이 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다.

임 교수는 여성 외에 사회나 언론의 의식전환도 강조한다. 임 교수는 “개별 여성에게 이상적인 몸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라고 하는 것은 또다른 횡포”라며 “정부와 여성단체, 언론매체가 여성의 몸에 대한 대안적인 담론과 몸 이미지를 내세워 사회적 계몽운동에 나서야만 ‘몸짱’, ‘44 열풍’에서 여성들을 해방시킬 수 있다”고 대안을 제시했다. 여성 스스로 44사이즈에 몸을 맞추기 위해 운동이나 다이어트 등으로 몸을 혹사시킬 것이 아니라 주체적이고 조직적으로 이런 사회분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다음> 아고라에서 벌어진 청원운동은 긍정적이다. 여성 스스로 ‘44사이즈’ 열풍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개선하기 위한 첫 단추를 꿰었기 때문이다.

그리스신화 프로크루테스의 침대를 떠올리게 하는 “44에 몸을 맞춰라”

그리스신화에는 프로크루테스라는 악당이 등장한다. 노상강도인 프로크루테스는 강도짓만 한 게 아니라 지나는 행인을 억지로 자기 집에 초대하여 하룻밤을 묵게 했다. 프로크루테스는 행인을 잡아서는 철제 침대에 눕히고 침대의 길이보다 사람이 작으면 사람의 다리를 침대 길이에 맞게 늘렸고. 반대의 경우엔 다리나 목을 잘라버렸다고 한다. 여기서 프로크루테스의 침대란 말이 비롯했다.

마셜 맥루언은 인간의 옷을 가리켜, ‘피부의 확장’이라고 말했다. 옷은 사람의 활동범위를 넓혀주고, 인간의 자유를 확대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옷이 프로크루테스의 침대처럼, 사람을 옥죄고 자유를 빼앗는 것이어서는 더이상 ‘옷’이 아니다.

<한겨레> 온라인뉴스팀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김건희가 박찬욱에게, 날 주인공으로 영화 한편 어때요 했다더라” 1.

“김건희가 박찬욱에게, 날 주인공으로 영화 한편 어때요 했다더라”

25년 경호 공무원의 조언 “대통령 ‘개인’ 아닌 ‘공인’ 지키는 것” 2.

25년 경호 공무원의 조언 “대통령 ‘개인’ 아닌 ‘공인’ 지키는 것”

영화인들 “‘내란 공범’ 유인촌의 영진위 위원 선임 철회하라” 3.

영화인들 “‘내란 공범’ 유인촌의 영진위 위원 선임 철회하라

2500년 역사 속 황홀한 과학책들 [.txt] 4.

2500년 역사 속 황홀한 과학책들 [.txt]

그 서점의 칵테일에선 ‘채식주의자’ 맛이 난다 [.txt] 5.

그 서점의 칵테일에선 ‘채식주의자’ 맛이 난다 [.txt]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