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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당신들이 있어, 어둠 이후를 기다립니다 [2023 희망을 준 사람]

등록 2023-12-28 05:00수정 2023-12-28 09:26

바위처럼 깨지기 힘든 단단한 현실은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모순을 드러내는 용기와 새로운 세상을 선취하는 상상력, 자신과 세상의 한계를 깨려는 투지, 높은 이상과 인격으로 우리를 설레게 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고마운 이름들을 불러본다.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이 해병대 예비역 등과 함께 군사법원으로 향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이 해병대 예비역 등과 함께 군사법원으로 향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채상병 사건’ 비상식적 압박에 상식으로 맞선 참군인-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관

상식적인 판단이었다. 거창한 것도 아니었다. 7월19일 경북 예천 내성천에서 실종자 수색을 하던 채아무개 상병이 급류에 휩쓸려 숨졌다. 호우로 물이 불어난 곳에 변변한 안전대책 없이 장병들을 보내 실종자 수색을 하도록 지시한 임성근 당시 해병대1사단장에게 채 상병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있는지 수사권을 가진 경찰이 살펴봐 달라는 것이 전부였다.

박정훈 당시 해병대수사단장(대령)은 이런 당연한 결론을 담은 사건인계서와 사건 기록을 8월2일 경북경찰청에 넘기도록 했다. 그러자 국방부는 곧장 사건 기록을 회수하고 박 대령을 군형법의 집단항명 수괴 혐의로 입건했다. 적 앞에서라면 사형을, 평시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을 선고할 수 있는 혐의다.

외압은 비상식적이고 거창했다. 7월30일, 이종섭 당시 국방부 장관은 채 상병 사고 조사 결과 보고를 받고 직접 결재까지 했다. 하지만 이튿날부터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박 대령은 7월31일 낮 12시2분께 채 상병 사건 수사 결과 언론 브리핑이 취소됐다는 이야기를 김계환 해병대사령관에게 들었다고 한다. 브리핑까지 2시간도 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 뒤부터 국방부 쪽에서 임 전 사단장을 혐의자에서 제외하라는 취지의 압박이 시작됐다. 박 대령은 김 사령관으로부터 이런 일의 배경에 ‘대통령의 격노’가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이런 일로 사단장까지 처벌하면 어떻게 하냐’는 것이었다.

박 대령은 경북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한 뒤 해군사관후보생으로 군에 발을 들여 1996년 해병대 장교로 임관했다. 그 뒤로 군사경찰 역할을 하는 헌병대에서 주로 근무했으며,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해병대 최고 수사 책임자인 수사단장을 맡았다.

27년 군 생활을 ‘법’과 함께했던 그는 항명 혐의 등으로 군검찰에 기소돼 이제 군사법원에 피고인으로 서게 됐다. 하지만 진짜 그 자리에 서야 할 사람은 박 대령이 아니라는 사실을 많은 이들이 이미 알고 있다.

정환봉 기자 bonge@hani.co.kr

김규진씨(오른쪽)와 배우자 김세연씨는 동성 부부로서 처음으로 임신과 출산 사실을 공개했다. 밀럽프로젝트 @milleloveproject
김규진씨(오른쪽)와 배우자 김세연씨는 동성 부부로서 처음으로 임신과 출산 사실을 공개했다. 밀럽프로젝트 @milleloveproject

세상을 여는 상상력…임신 공개 동성커플 김규진·김세연

“라니는 얼마 전부터 뒤집기를 시도하고 있다. 매일 성장하는 아이를 보는 게 즐겁다. 최근엔 백일잔치를 두차례 치렀다.”

김규진(31)씨는 요즘 생후 4개월 된 딸 ‘라니’(태명)를 돌보느라 바쁘다. 김씨는 지난 6월 말 배우자 김세연(34)씨와 함께 국내 동성 부부로는 처음으로 임신 사실을 공개했다. 두 사람은 2019년 미국에서 혼인신고를 하고, 지난해 벨기에의 한 난임병원에서 정자를 제공받아 임신해 지난 8월 말 라니를 출산했다.

김씨는 “올해는 내 인생 중 가장 생산적인 해였다”고 말했다. “아이를 낳는 동성 커플이 존재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는 그의 바람대로, 김씨 부부의 임신과 출산은 한국 사회에 ‘동성 커플의 출산권’이라는 묵직한 화두를 던졌다.

온라인 등에서 두 사람에 대한 응원이 이어지기도 했지만, 한국 사회는 지금도 남녀의 결합만을 부부로 인정하고 있다. ‘성소수자에 대한 축복식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동환 목사가 기독교대한감리회로부터 출교 처분까지 받는 등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도 여전하다.

김씨는 “언젠간 동성혼이 법제화될 거라는 확신은 있다”면서도 “시일이 오래 걸린다면 성소수자들이 아픔을 겪는 기간은 그만큼 길어질 것”이라고 했다. 그는 “변화를 앞당길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지 사회 일원으로서 고민해보겠다”고 말했다.

장수경 기자 flying710@hani.co.kr

안세영이 10얼월7일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배드민턴 여자 단식에서 우승한 뒤 금메달에 입을 맞추고 있다. AP 연합뉴스
안세영이 10얼월7일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배드민턴 여자 단식에서 우승한 뒤 금메달에 입을 맞추고 있다. AP 연합뉴스

부상이 발목 잡아도, 꿈 향해 내달렸다…배드민턴 챔피언 안세영

안세영(21·삼성생명)은 한국 배드민턴 단식의 새 역사를 쓰고 있다. 올해 3월 최고의 역사를 자랑하는 전영 오픈에서 ‘전설’ 방수현 이후 27년 만에 여자 단식 우승컵을 들어 올렸고, 세계선수권대회에서도 한국 선수 최초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항저우 아시안게임은 새로운 챔피언의 탄생을 세계에 알린 무대가 됐다. 안세영은 여자 단체전 결승과 단식 결승에서 도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자 ‘천적’인 천위페이를 꺾었다. 특히 단식 결승에서는 1세트 막판에 얻은 부상(오른쪽 무릎 힘줄 파열)에도 불구하고 몸을 던지는 투혼으로 보는 이들의 눈가를 촉촉하게 만들었다. 90분간 혈전 끝에 금메달이 확정되자 코트에서 흘린 기쁨의 눈물도 대회 명장면으로 남았다.

안세영의 다음 목표는 파리 올림픽이다. 2020 도쿄 올림픽 단식 8강에서 천위페이를 만나 떨어졌던 평범한 선수는 이제 가장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이미 지난 영광을 잊고 올림픽에 맞춰 차분히 담금질에 들어갔다. 안세영은 아시안게임 이후 방송·광고 출연 제의가 쏟아지자 “선수로 보여드려야 할 것이 많기에 배드민턴에만 집중할 생각”이라며 “아직 이루고 싶은 꿈을 이루지 못했다”고 했다.

장필수 기자 feel@hani.co.kr

민주노총과 노조법 2.3개정운동본부 관계자들이 11월28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회를 통과한 노조법 2·3조 개정안과 방송 3법을 즉각 공포할 것을 윤석열 대통령에게 촉구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민주노총과 노조법 2.3개정운동본부 관계자들이 11월28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회를 통과한 노조법 2·3조 개정안과 방송 3법을 즉각 공포할 것을 윤석열 대통령에게 촉구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노란봉투법’ 발효되는 그날까지…노조법 2·3조 개정 운동본부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2·3조 개정안(노란봉투법)이 2023년 11월9일 국회를 통과했다. 간접고용 노동자와 특수형태근로종사자(특고) 등 실제로 자신의 노동조건에 영향을 끼치는 사용자와 교섭하지 못하고 거리를 헤매는 노동자들에게 ‘진짜 사장’을 찾아주고, 노동자 쟁의에 무분별하게 남발되는 손해배상 소송을 막으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간절히 원하던 법안이다. 통과 배경에 1년 넘게 집중 캠페인을 벌인 노조법 2·3조 개정운동본부(운동본부)가 있다.

운동본부는 2022년 9월 전국 93개 노동·법률·시민·종교단체 등이 모여 출범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조영선 회장, 참여연대 한상희 공동대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남재영 목사 등이 공동대표를 맡았다. 대우조선해양과 하이트진로 등 하청·특수고용노동자의 열악한 노동환경과 파업, 뒤이은 회사의 막대한 손해배상 청구가 계기였다.

운동본부는 지난해 말 국회 발의부터 상임위 심의·의결, 본회의 통과, 대통령 거부권 행사 등 노란봉투법의 주요 국면마다 노동자 증언대회를 열고 농성과 단식에도 나섰다. 여전히 열악한 비정규직의 현실과 부조리한 노동 관계법을 구체적인 사회적 의제로 끌어올린 시간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로 법안은 끝내 폐기됐지만, 입법을 향한 노력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이었다.

김해정 기자 sea@hani.co.kr

다큐 ‘어른 김장하’. 시네마달 제공
다큐 ‘어른 김장하’. 시네마달 제공

각자도생 사회의 바른 길잡이…높은 어른 김장하

지난달 15일 다큐영화 ‘어른 김장하’가 개봉한 뒤 관객과의 대화에서 많은 이들이 눈물을 훔쳤다. 김현지 감독은 눈물의 의미를 이렇게 해석했다. “각자도생의 시대잖아요. 독하게 살자 마음은 다잡지만 다들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 게 아닐까요. 남을 돕는 삶을 보면서 위로받은 것 같아요.”

삶 자체가 가르침을 주는 어른 김장하(79), 그는 1963년 19살에 경남 사천에서 한약방을 개업하고 59년간 도움이 필요한 곳에 아낌없이 기부해왔다. 장학생만 1천명이 넘고, 1984년 40살에 명신고등학교를 설립해 1991년 무상으로 국가에 기증하기도 했다. 영화 공개 뒤 그가 진주 야간학교 두곳의 전세금을 내줬다는 등 제보도 쏟아졌다. 그는 이 모든 일을 선행이라 여기지 않았다. “아픈 사람을 상대로 번 돈은 함부로 쓸 수 없으니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라고 다큐에서 말했다.

김장하는 지난해 5월 한약방을 닫았다. 김 감독은 “등산도 하면서 편안하게 지내신다”고 했다. 여러 기업에서 주겠다는 상도 거절하던 그가 최근 진주 여성민우회가 주최한 여성평등상 시상자로 나섰다. 진주 여성평등상을 만들 때도 부족한 자금을 도왔다고 한다.

사회는 김장하를 두고 ‘어른’의 등장이라며 열광했다. 나이 불문, 남을 돕는 삶 그 자체가 어른이라는 걸 김장하는 보여줬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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