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3월24일 대일굴욕외교 반대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온 학생들을 경찰이 최루탄과 진압봉으로 마구 때려 진압하고 있다. <합동연감> 자료
박정희 대통령 집권 이후 처음 선포된 1964년 ‘계엄포고령 제1호’에 따른 불법구금 사건에 대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유신시절과 부마항쟁 시기 계엄령으로 처벌받은 피해자들이 재심 신청을 통해 대법원에서 처벌 무효 판결을 받은 적은 있지만, 국가기관이 1964년 한일회담 반대시위와 관련해 발동한 계엄령 1호 위반 피해자 구제 조치에 나선 건 이번이 처음이다.
12일 진실화해위는 전체위원회를 열고 1964년 6월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참여했다가 군 수사기관으로부터 불법수사를 받은 뒤 내란예비음모 및 내란미수 혐의로 계엄보통군법회의에 기소됐다며 백광수·차진모씨가 신청한 사건에 대해 중대한 인권침해에 해당한다며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진실화해위는 사과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하라고 국가에 권고했다.
1964년 6월3일 정부는 경제발전 재원 마련을 명분으로 한일회담을 추진했고, 이에 대학생과 시민들은 “굴욕외교 반대”를 외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정부는 즉시 계엄사령관 육군대장 민기식 이름으로 계엄포고령을 선포하고 군을 투입해 시위를 진압했다. 포고령 1호 위반으로 처벌받은 피해자는 400여명으로, 당시 고려대 상대 학생회장이었던 이명박 전 대통령도 시위에 참가했다가 징역2년, 집행유예 3년형을 선고받았다.
1964년 6월 서울대 문리대생들이 굴욕외교를 상징하는 관을 메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진실화해위 조사 결과, 중앙대 정치외교학과 재학중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참여했던 신청인 백광수·차진모 두 사람은 경찰에 연행되고 이틀만에 서울교도소에 수감됐다. 이후 군검찰 조사를 거쳐 6월 하순께 내란미수 및 내란예비음모 혐의로 기소돼 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재판받던 중 계엄이 해제돼 재판이 서울형사지방법원으로 이관됐다. 서울지방검찰청이 7월 계엄이 해제되자 백씨와 차씨 등을 포함해 계엄 선포 뒤 군검찰에 의해 구속된 458명에 대해 사후 구속영장을 청구했고, 법원은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진실화해위는 “신청인들을 사후적으로 구속영장이 발부된 7월29일까지 군검찰에 의해 구금된 것은 군법회의법에서 정한 구속기간 제한 규정을 어겨 위법한 것이고, 헌법상 영장주의의 본질을 위반한 것”이라며 “나아가 비상계엄에서도 영장주의를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국가비상사태에 있어서도 가급적 회피해야 한다는 법원 및 헌법재판소의 종전 결정례에 비추어 볼 때 신체의 자유를 침해한 중대한 인권침해로 판단된다”고 진실규명 결정 이유를 밝혔다.
진실화해위는 “서울지방검찰청이 458명에 대해 사후적으로 구속영장을 청구하면서 검찰의 영장 청구 사유를 ‘인권옹호’와 ‘형사소송법상의 절차를 위해’라고 밝힌 사실도 확인되어 당시 군검찰에 의한 구속이 무리한 것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고 했다.
당시 대한변호사협회(회장 이병린)는 1964년 6월22일 상무위원회를 통해 ‘인권에 관한 건의서’를 채택하고, 이를 당시 대통령과 국회의장, 국무총리, 계엄사령관 등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인권에 관한 건의서는 △선포된 비상계엄이 계엄법 제4조의 요건에 해당하지 않으므로 즉시 해제할 것 △구속된 학생‧언론인‧민중 등을 석방하여 융화의 분위기를 조성할 것 △시급히 구속영장 제도를 복구하고 재판관할을 단심제 군법회의가 아닌 일반법원으로 이관시킬 것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구 계엄법 제4조는 “비상계엄은 전쟁 또는 전쟁에 준할 사변에 있어서 적의 포위공격으로 인하여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된 지역에 선포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고경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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