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논픽션 : 본헌터㊶] 신창의 가해자 해진 신처럼 행세한 지서 주임, 사형구형 뒤 결국 징역 3년형
신창 학살 사건에 대한 현지 르포기사를 실은 1955년 1월18일자 <한국일보>. 국가기록원
*편집자 주: ‘본헌터’는 70여년 전 국가와 개인 사이에 벌어진 집단살해사건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이야기다. 아무데나 버려져 묻힌 이들과, 이들의 행방을 추적하며 사라진 기억을 찾아나선 이들이 주인공이다. 매주 2회, 월요일과 수요일 인터넷 한겨레에 올린다. 극단 신세계가 글을 읽어준다.
내 이름은 해진이다.
아산의 역사에 ‘빌런’(악당)으로 남은 해진이다. 내가 연루된 사건을 조사한 한 국가기관의 조사관은 2009년 작성한 보고서에서 감히 내 실명을 적지 못하고 유OO이라고만 했다. 개인정보보호를 의식한 조치였으리라. 정보공개 요청을 받아 반출되는 국가기록 문서에도 나는 유OO으로 처리됐다.
2020년 아산시에서 만든 또 다른 보고서엔 내 이름이 버젓이 기재됐다. 어차피 가릴 수 없었다. 이미 한참 전 신문에도 여러 번 활자화되어 유명세를 얻은 이름이다. 70여년 전 나를 저주하며 내 이름을 증언한 사람들이 있었다. 희생자 유족은 나를 고소했고, 검사는 나를 기소했다. 결국 법정에 섰다. 한국전쟁기에 아산에서 민간인을 대량학살했다는 혐의였다.
지금 핸드폰으로 ‘수도권 전철 노선도’를 검색해보라. 오른쪽 가장 밑에 무슨 역이 나오는가. 서울역에서 1호선을 타고 남쪽으로 향할 경우 무려 2시간28분이 걸리는, 남동쪽 가장 끝에 자리한 신창역이다. 신창에서 나는 신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신이었다. 그 신의 시간을 누린 대가로, 수인의 시간이 돌아왔다.
나는 충청남도 경찰국 온양경찰서 산하 신창지서의 주임이었다. 지서 주임이란 지서장을 말한다. 지금으로 치면 파출소장 또는 지구대장이다. 1950년대 지서 주임은 끗발 있었다. 특히나 6·25가 터지고 전국 곳곳을 점령했던 북한군이 썰물처럼 빠진 뒤 사람들의 눈에 살기가 가득하던 그 시기에 더할 나위 없이 끗발 있었다.
신창면은 각별했다. 수복 직전까지 전투가 있었기 때문이다. 9월26일부터 29일까지 신창면 읍내리와 도고면 와산리 사이에 위치한 한티고개에서 퇴각하는 북한군과 연합군 사이에 마지막 혈전이 벌어졌다. 한 방에 물러갈 줄 알았던 북한군이 유엔군을 역습해 몰아쳤다. 이럴 수가. 그 바람에 세상 바뀐 줄만 알고 마을에 들어갔던 일부 치안대원들이 희생을 당했다. 9월29일 신창을 완전히 장악할 때, 그래서 우리는 더 독이 올라 있었는지도 모른다.
600명이었다. 이 얼마나 웅대한 숫자인가. 인민군 점령기 때 우익애국인사들을 체포해 떠들썩하게 연 궐기대회. 그 궐기대회에 참여했거나 구경한 것으로 추정되어 잡혀온 이들이 600명이었다. 궐기대회에 회부되어 처형된 희생자 유족과 우익단체 대원들이 하나하나 지목한 결과였다. 이들은 신창면 오목리에 있는 면사무소 창고 등 여러 곳에 나뉘어져 감금되었다. 오목리, 궁화리, 가내리, 수장리, 수라리(신달리1구), 황산리, 창암리, 가덕리, 신곡리 등에서 사람들이 쉴새없이 왔다. 피가 필요했다. 북한군 점령기 때 흘렸던 피의 두 배, 세 배, 아니 열 배, 백 배.
600명의 목숨 앞에서 나의 입은 위대했다. 나의 손가락은 위대했다. 생사를 결정할 수 있었다. 여성을 농락할 수 있었다. 살기 위해 나의 환심을 사려는 자들의 재산을 빼앗을 수 있었다.
머리뼈와 함께 사지뼈, 그리고 고무신까지 땅에 박힌 채 드러난 아산 지역 민간인 학살 유해. 2023년 11월7일 충남 아산시 염치읍 서원리 산97번지 동막골에서 발견된 것이다. 고경태 기자
훗날 신창면의 여러 마을을 돌며 조사를 한 이들은 이렇게 기록했다. “가내리의 경우 확인된 희생자가 90명에 달했다. 가내리2구와 가내리3구에 가장 많은 주민들이 희생되었는데 14개 정도 가족들이 멸족을 당했다. 멸족을 당했기 때문에 젖먹이 아기와 어린이들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신원이 확인되지 못한 30명까지 합하면 가내리 주민들의 희생규모는 최소 120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보복 학살은 오목리, 수장리, 황산리, 신달리 등 신창면 전 지역에서 발생했고, 희생규모는 지역에 따라 편차가 있었다. 신창면에서 확인된 희생자만 180명이었다.”
멸족. 씨를 말린다는 뜻이다. 일가족을 남김없이 죽인다는 뜻이다. 나는 학살 현장에서 기관단총을 소지하고 있던 순경이 너무 지나친 짓이라며 총쏘기를 주저하면 그를 총살하겠다고 협박했다. 나는 신이었고, 신에게 자비는 없었다. 그러나 그 시간은 짧았다.
1955년 1월, 나는 양민 150명을 살해하고 정부 보유미 450가마를 횡령한 혐의로 서울지검에 입건되었다. 1950년 10월20일 오후 7시경 오목리에 거주하던 옥화 및 그의 2녀 명희 외 50명을 끌어내 결박한 뒤 오목리 앞산으로 데려가 총살하였고, 같은해 10월22일 오전 5시경 시우 및 그 손녀 경자 외 50명을 끌어내 결박한 뒤 염통산(궁화리) 방공호로 데려가 총살하였으며, 1951년 1월15일 구금돼 있던 부역혐의자 중 중빈 등 6명을 의용경찰 오씨와 정씨를 시켜 총살시켰다는 혐의였다.
1월13일부터 언론들이 경쟁적으로 이 사실을 보도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한국일보, 경향신문이 나의 이름을 지면에 올렸다. 그 중 신창면 현지에까지 가서 나에 관해 취재한 신문은 한국일보가 유일했다. 한국일보 기자를 만난 주민들은 대놓고 나를 욕했다. “유(柳)는 빨갱이보다도 더 나쁜 놈이었다. (중략) 하늘이 무심치 않아 이제 그 죄인을 법으로 다스리려 한다니 사필귀정으로 되는 모양이지요…. 1·4후퇴 당시에 지서주임이 부하들에게까지 마을 부녀자들을 농간케 한 가지가지의 사실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다. 본래부터 해진은 악질이었다.”
나의 죄명은 살인과 사형(私刑)금지법 위반, 수뢰, 업무상 횡령이었다. 2월24일 오전 10시40분 서울지방법원 제4호 법정에서 세 번째 공판이 열렸다. 나는 회색 바지저고리를 입고 법정에 섰다. 나는 “공포 한 발 쏘아본 일 없고 사람 하나 죽인 일 없다”고 공소 사실 전부를 부인했다.
5월4일 결심공판이 열렸다. 나를 기소했던 김익보 검사는 말했다. “대한민국은 엄연한 법치국가로서 모든 국민의 기본권리가 헌법에 보장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고는 부역자라고 하여 개중에는 무고한 자가 많았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덮어놓고 함부로 총살이라는… 피고의 행위는 악랄의 극치이며 동 사건의 피해자로 보면 처참의 극치이고, 이 사건이 사회적으로 미친 것은 암흑의 극치이다. (…) 여사한 피고의 행위는 관민을 이간시킬 뿐 아니라 외국에 대해서도 국제상의 신의를 손실케 하였다.” 김 검사는 무려 한 시간 동안이나 논고를 했다. 그리고 나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5월25일 서울지법 4호법정에서 열린 1심 재판에서 재판장 김진권 판사는 나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사변중의 혼란기였던 관계로 정상을 참작한다”고 했다. 그렇다. 신창에 다녀온 한국일보 기자도 쓰지 않았던가. 신창은 ‘충남의 모스크바, 빨치산의 소굴’이었다고. 그만큼 6·25 동란과 함께 좌익 계열의 폭정이 갖은 횡포를 다하여 나같은 자가 사건을 일으킬 동기를 양성했다고. 나는 곧장 항소를 했지만 기각당했다. 나는 다시 상고했다.
1956년 2월14일 대법원은 ‘살인, 사형금지법 위반’에 대해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수뢰, 업무상 횡령, 횡령’에 대해서만 징역 3년을 선고하였다. 재판에서 증인으로 채택된 자들은 사건 당시 온양경찰서장, 국민회 신창지부장, 의용경찰을 지낸 이들이었다. 하하하. 나는 공식적으로 학살자가 아니라 경제사범이 되었다.
아산에는 신이 많았다. 나는 신창에서만 신이었다. 온양경찰서장(현 아산경찰서장) 조OO, 오OO도 신이었다. 충남경찰국장 김OO도 신이었다. 온양경찰서장의 지휘 아래 부역자 문제를 처리한 사찰계 형사들은 모두 신이었다. 경찰의 지시를 받아 부역자를 체포·이송·처형한 아산지역 각 읍면치안대, 즉 대한청년단과 태극동맹, 의용경찰들은 내가 부려먹은 작은 신이었다. 대통령 승만은 신 중의 신이었다.
나는 한국전쟁기를 호령한 아산, 충남, 그리고 대한민국의 수많은 신 중에서 재수가 없었다. 왜 감옥에 가야 했던가. 나는 정해진 3년의 징역기간을 채우지 않고 중간에 출소했지만, 그래도 재수 옴 붙었다며 가래침을 뱉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그리 잘못했단 말인가.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라는 책을 썼다. 2000년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관한 미군 비밀문서를 최초 보도했고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 한국어판과 일본어판, 베트남어판을 냈다. 베트남전에 이어 이번엔 한국전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