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논픽션 : 본헌터㊳] 살구쟁이 찡그린 남자 금강변 석장리 건너편 공주 상왕동에서의 두 차례 발굴
영국 런던에서 발행한 사진잡지 <픽쳐 포스트>(Picture Post) 1950년 7월호에 실린 사진. 청계인류진화연구소 제공
*편집자 주: ‘본헌터’는 70여년 전 국가와 개인 사이에 벌어진 집단살해사건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이야기다. 아무데나 버려져 묻힌 이들과, 이들의 행방을 추적하며 사라진 기억을 찾아나선 이들이 주인공이다. 매주 2회, 월요일과 수요일 인터넷 한겨레에 올린다. 극단 신세계가 글을 읽어준다.
남자가 찡그렸다.
살벌한 사진 한 장을 본다. 트럭 사진이다. 앞에서도 찍고, 뒤에서도 찍었다. 이른바 ‘지무시 트럭’(GMC, 제네럴 모터스 미군 트럭) 짐칸에 사람들이 빽빽하다. 모두 죄수 유니폼을 입었다. 손이 뒤로 묶였다. 고개를 숙였다. 뒤편의 한 남자만이 찡그린 표정으로 얼굴을 들었다. 왼쪽 모서리에 철모를 쓰고 서 있는 군인은 소풍이라도 나온 듯 밝은 얼굴이다.
영국 런던에서 발행한 사진잡지 ‘픽쳐 포스트’(Picture Post) 1950년 7월호에 실린 사진이다. 기사의 제목은 ‘워 인 코리아’(War in Korea)이고, 오스트레일리아 기자가 찍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곳은 충남 공주 상왕동의 한 야산 근처 도로다. 사진기자는 트럭에 실려온 이들이 산으로 끌려오기 직전 트럭에 다가가 다양한 각도에서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그는 죄수들을 실어온 군경이나 트럭 운전사에게 말을 걸어 어떤 상황인지 알아보았을까. 죄수들이 트럭에서 내렸다면, 그 다음에 어디로 가는지 물어보고 그 뒤를 따라가 취재하려는 시도를 해봤을까.
영국 런던에서 발행한 사진잡지 <픽쳐 포스트>(Picture Post) 1950년 7월호에 실린 사진. 이들이 학살된 현장은 금강을 따라 공주에서 대전으로 향하는 구 도로가의 해발 76.3m와 91.4m 야산 사이 능선 계곡에 있었다. 트럭 뒤로 보이는 길이 공주방향이다. 청계인류진화연구소 제공
이 사진은 앞의 사진과 반대 방향에서 촬영됐다. 맨 오른쪽 총을 든 이의 왼쪽 팔 완장에 ‘특경’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특별경비대’의 준말로 공주형무소 특별경비대원이다. 그 위 띠가 둘러진 철모를 쓴 이는 헌병대원으로 보인다. 나머지 총을 든 이들은 경찰로 보인다. 왼쪽 금강 건너 산을 넘으면 구석기시대 유적이 있는 석장리가 나온다. 청계인류진화연구소 제공
선주는 2009년에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 유해발굴단’ 조사단장을 맡아 일했다. 3년째였고, 정해진 기한의 마지막 해였다. 그해 6월10일부터 진주 문산읍 상문리 진성고개를 시작으로 6월12일 공주 상왕동, 6월15일 경산 코발트광산, 6월18일 함평 해보면 광암리에서 유해 발굴을 진행했다. 선주는 2007년, 2008년과 마찬가지로 전체 발굴을 총괄하고 감식을 도맡아했다. 2008년 발굴지역 중 갈명도에 가서 현장 실무를 책임졌던 것처럼, 2009년에는 공주 상왕동에 갔다. 선주는 트럭 속에서 얼굴을 찡그리던 남자를 떠올렸다. 그 남자를 찾으러 가는 길이었다.
현장은 공주대교에서 동쪽으로 4㎞, 금강을 따라 공주에서 대전으로 향하는 구 도로가의 해발 76.3m와 91.4m 야산 사이 능선 계곡에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 기자가 사진을 찍은 도로에서는 직선으로 약 100m 거리였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공주 상왕동 산29-19. 공주 사람들은 이곳을 왕촌 살구쟁이라고 불렀다. 15명 넘는 인원이 참여한 발굴은 6월12일부터 7월20일까지 장마철을 끼고 40일간 이어졌다.
2009년 6월12일부터 7월20일까지 장마철을 끼고 40일간 이어진 공주 상왕동 살구쟁이 유해발굴 현장 2지점. 청계인류진화연구소 제공
1950년 7월 공주형무소에 있던 사람들이 이곳으로 끌려왔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6월29~30일께부터 공주지역에서는 국민보도연맹원들을 잡아들이는 예비검속이 이뤄졌다. 250~300여명이 인근 지서에 일주일 가까이 구금됐다가 공주경찰서 유치장 또는 공주형무소로 이송되었다. 당시 공주형무소는 초만원이었다. 최대 수용인원이 700여명인데, 보도연맹원들이 들어오면서 1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북한군은 빠르게 남하중이었고, 경찰과 형무소 경비대들은 철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공주형무소는 7월12일 완전히 소개(疏開)되는데, 3일 전인 9일 이곳에 공주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좌익수들과 보도연맹원들이 끌려온다. 보도연맹원 중 일부는 공주 의당면 청룡리 도살장 뒷산, 연기군 송원리 욕골로도 끌려간다.
공주는 선주에게 너무나도 친숙한 곳이었다. 석장리가 지척이었다. 1968년 대학에 입학한 뒤 구석기 유물 발굴을 위해 박물관장 손 선생을 따라와 한 달씩 머물곤 하던 바로 그 석장리였다. 뗀석기를 발굴한 손 선생에 의해 우리 나라에도 구석기 시대가 있음을 처음으로 증명한 그 역사적 유적이었다. 석장리는 금강변이었다. 상왕동도 금강변이었다. 둘은 금강을 사이에 두고 직선거리로는 1㎞ 남짓 거리에 있었다. 발굴 일정이 끝난 밤이면 석장리 구절골 골짜기 개울에 횃불을 들고 가 가재를 잡아 매운탕을 끓여먹던 추억이 선주에겐 새삼스러웠다.
2009년 공주 상왕동 살구쟁이 유해발굴 현장 2지점. 1지점을 합해 317구의 유해가 나왔다. 청계인류진화연구소 제공
2009년 공주 상왕동 살구쟁이 유해발굴 현장 1지점. 청계인류진화연구소 제공
그때 석장리 사람들은 금강을 건너와 버스를 타고 상왕동을 지나다녔다. 1960년대 석장리 시절의 선주는 금강 건너 야산 기슭에서 집단처형 같은 끔찍한 일이 벌어졌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상왕동은 묻고 있었다. 신석기-청동기-철기시대와 산업혁명기를 지나 인간이 우주선을 타고 달에 가던 20세기는 돌조각으로 사냥을 하던 2만5000년전보다 과연 문명화됐다고 말할 수 있는가?
석장리는 과거의 추억으로만 그치지 않았다. 선주는 석장리의 세 어르신을 일꾼으로 모셔왔다. 1964년부터 손 선생이 발굴 현장에서 인부로 고용했던 마을 사람들이었다. 고등학생이었던 영배는 환갑이 다 돼가고 있었다. 30대였던 나머지 두 사람은 팔순을 바라보았다. 돌조각이든 유해든, 선주는 석장리 일꾼들이 우리나라에서 발굴을 가장 잘하는 사람들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다.
조그만 돌조각을 훼손하지 않고 다뤄야 하는 구석기 유물 발굴은 섬세한 손놀림을 요구했다. 상왕동에서 이들은 흙 입자만 보고도 유해가 있는지 없는지를 금방 알아냈다. 모두 흙손(트롤)의 귀재였다. 발굴, 노출, 걷어내기 등 전 과정을 알아서 하도록 믿고 맡길 수 있었다. 위기대응에도 능했다. 상왕동 계곡에 갑자기 큰비가 쏟아져내리자 이들은 별 일 아니라는 듯 농사형 비닐을 꺼내 양편의 나뭇가지에 걸고 줄을 당겨 커다랗고 쾌적한 텐트를 만들어냈다. 젊은 발굴단원들이 탄성을 터뜨렸다.
2009년 공주 상왕동 살구쟁이에서 발굴된 상한 머리뼈에 흙이 들어갔고, 그 안에서 새 생명이 나왔다. 청계인류진화연구소 제공
이제 찡그린 남자를 찾을 시간이었다. 트럭에서 내린 뒤엔 무슨 일을 겪었을까. 유해들은 모두 등을 마주한 채 얼굴을 양쪽 벽면을 향하고 결박된 채였다. 일부는 목에 깍지를 끼고 무릎을 꿇은 자세였다. 머리는 땅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사전조사를 통해 이미 이곳에 유해가 분명히 있음은 알았다.
총 3개의 매장구덩이가 나왔다. 첫 번째 구덩이의 경우 길이 15m, 너비2.5m, 깊이 0.55m로 한쪽으로 길었다. 나머지 구덩이들도 비슷한 형태였다. 습한 점토성 토양인데가 산성도가 높아 유해의 보존상태는 최악이었다. 머리뼈는 거의 없었으나, 있어도 아주 얇아 잘못 만지면 부서졌다. 머리뼈에선 M1 소총 구멍이 보였고 탄피 대부분이 구덩이 안에 있었다. 가까운 거리에서 뒤통수에 총을 쏜 듯 했다. M1, 칼빈 소총의 탄피가 모두 634개였다.
전체 유해는 317구였다. 이것은 유례없는 숫자였다. 2007년부터 국가 독립기관인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서 유해발굴을 시작한 이래 한 번의 발굴에서 300구가 넘은 경우는 처음이었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발굴작업을 다 끝내고 둘레에 배수로를 파는데 거기서 또 머리뼈가 나왔다. 유해가 더 있었다. 곧장 추가발굴을 검토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4년 뒤인 2013년 10월에야 또 하나의 구덩이에서 재발굴에 들어갔고, 80구를 더 찾아냈다. 2009년과 2013년 합해 397구가 나온 셈이다. 2013년에도 석장리 일꾼들이 왔다.
2009년 공주 상왕동 살구쟁이에서 발굴된 의족. 청계인류진화연구소 제공
2009년 공주 상왕동 살구쟁이에서 발굴된 의족. 청계인류진화연구소 제공
유해의 신분은 단추를 통해 추정할 수 있었다. 갈색 단추는 공주형무소 단추였고, 흰색 단추는 민간인 단추였다. 갈색 단추는 145개, 흰색 단추는 195개였다. 보도연맹원들은 공주경찰서가 수용하지 못해 공주형무소에 일주일도 안되는 기간동안 구금된 터라 죄수복을 입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다. 찡그린 남자는 이전부터 공주형무소에 있었던 죄수였을 것이다. 이들은 대부분 좌익수로 1948년 봄에 일어났던 ’단독정부 수립 반대투쟁사건’과 여순 사건 등에 연루되어 2~3년의 단기형을 선고받은 이들이라고 했다.
2013년 10월의 상왕동 발굴 현장에는 유족들이 많이 왔다. 현장에서 유품으로 안경이 나왔다는 보도가 나가자 한 60대 남자는 자신의 아버지가 똑같은 안경을 썼다면서 자신의 아버지임을 밝혀달라고 했다. 형이 육군 장교였는데 공주형무소에 갔다가 석방된 뒤 행방불명됐다면서 이곳에 있을 게 분명하다는 이도 있었다. 학원 원장을 지냈다는 노인은 아버지가 이곳에 끌려와 죽은 뒤 자신은 연좌제 때문에 교사가 될 수 없었다며 눈물을 흘렸다. 자기 남편을 꼭 찾아달라는 부탁과 함께 시원한 거 사드시라며 꼬깃꼬깃한 지폐를 선주의 주머니에 한사코 넣어주려던 할머니도 있었다. 찡그린 남자에게도 가족과 함께 어떤 사연이 있을 터였다.
2008년 발굴을 마친 뒤의 어느 날, 선주는 다시 한 번 사진을 쳐다보았다. 찡그린 표정의 남자 좌우와 위 아래로 숫자를 하나씩 세보았다. 하나둘셋넷다섯여섯일곱여덟아홉열…. 트럭에는 몇 명까지 탈 수 있을까. 서른다섯, 서른여섯 그 이상으로는 숫자가 넘어가지 않았다. 무엇인가가 선주의 머리에 걸렸다.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라는 책을 썼다. 2000년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관한 미군 비밀문서를 최초 보도했고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 한국어판과 일본어판, 베트남어판을 냈다. 베트남전에 이어 이번엔 한국전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