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논픽션 : 본헌터㊲] 443명과의 만남 일제강점기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아산 학살의 숨은 씨앗
아산 염치읍의 한 마을에 서 있는 향나무에는 비극적인 사연이 숨어있다. 한반도통일역사문화연구소 제공
*편집자 주: ‘본헌터’는 70여년 전 국가와 개인 사이에 벌어진 집단살해사건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이야기다. 아무데나 버려져 묻힌 이들과, 이들의 행방을 추적하며 사라진 기억을 찾아나선 이들이 주인공이다. 매주 2회, 월요일과 수요일 인터넷 한겨레에 올린다. 극단 신세계가 글을 읽어준다.
내 이름은 태육이다.
역사를 공부한다. 역사의 현장을 조사한다. 신학대학을 나와 강화도 교동에서 목회자 생활도 했다. 교회에서 한국전쟁기 학살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교인들을 만났다. 기독교와 학살의 관계를 돌아볼 기회였다. 2007년부터는 목회를 접고 국가폭력의 진실을 규명하는 1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조사관으로 활동했다. 그때 아산을 만났다. 서산을 만났다. 태안을 만났다. 한국전쟁기에 충남지역에서 벌어진 사건의 실상을 접하면서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쓴 책 제목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다.
1기 진실화해위는 2010년에 활동을 마쳤지만, 나는 다시 아산과 조우했다. 2020년 아산시가 주관하는 아산 민간인학살 전수조사 용역을 맡게 된 것이다. 2기 진실화해위가 출범하기 직전이었다. 전수조사는 7명으로 이뤄진 팀이 그해 6월부터 10월까지 5개월간 진행했다. 2명은 사건에 관한 증언을 듣고 또 다른 2명은 학살이 마을에 끼친 영향을 조사했다. 3명은 자료와 문서를 모으고 정리했다.
우리 팀은 아산시의 12개 읍면 총 137개의 법정리와 동에서 진술인 443명을 만나 면담했다. 나는 보고서를 만들면서 면담을 통해 확인한 희생자 숫자를 총 1304명이라고 적었다(2009년 진실화해위 보고서는 최소 800여명 추산).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자 110명, 부역 혐의 희생자 1190명, 기타 4명. 하지만 한계가 있다. 세월이 오래 지나 증언자가 사라진 마을이 많았다. 전쟁 당시 온양읍에 속해있던 마을들은 일부 또는 전체가 도시화되어 조사에 제한을 받았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실제 희생자 수는 더 많을 것이다. 이제 그 과정에서 보고 느낀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신기하게도 아산에는 국민보도연맹 희생자가 없었다. 진술인 면담을 할 때마다 보도연맹 희생자 존재 여부를 물어보았으나, 답은 늘 같았다. 천안과 아산에서 경찰이 너무 빨리 철수했기 때문일까? 인민군이 평택을 통해 아산 음봉면 삼거리로 들어오기 직전 자전거를 탄 사람이 음봉면 지서에 “인민군이 내려온다”는 정보를 제공했으나 오히려 경찰로부터 구타를 당했다고 한다. 국군은 인민군에 밀려 남하하면서 아산에는 방어선을 치지도 않았다. 아산은 군 작전상 전술적으로 포기한 지역이었을까.
아산 염치읍의 한 마을에 서 있는 향나무에서 타살된 30여명의 주민들이 이곳에 묻혔다고 한다. 한반도통일역사문화연구소 제공
인민군이 아산을 점령하자마자 다수의 우익 쪽 사람들이 체포되어 대전형무소로 이송되거나 9월초 인민위원회 궐기대회에 회부되어 희생됐다. 인민군 후퇴기인 9월27일엔 신창읍 한티고개에서 유엔군이 인민군에게 의외의 패퇴를 당하면서, 도망가다 되돌아온 좌익 세력에게 죽은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인민군이 물러가고 부역혐의자와 그 가족을 대상으로 한 보복이 시작되었다. 9월29일 밤부터 10월 초까지가 1차 시기라면, 10월 중순부터 12월 초까지가 2차 시기였다. 그리고 이듬해 1·4후퇴 때가 마지막 3차였다. 1·4후퇴 때는 특히 가족 단위의 처형이 많았다. 이때엔 아산 둔포면을 지나던 피난민 300여명이 미군 폭격으로 비명횡사하는 일도 있었다.
아산에서 학살이 가장 방대하게 일어난 지역은 배방읍이다. 희생자들은 대부분 올해 3월 A4-5를 비롯한 유해 62구가 발굴된 성재산 교통호에 묻혔다. 지금은 북쪽에 신도리코 공장이, 남쪽에는 크라운제과 건물이 세워진 곳이다. 크라운제과 쪽 변전소 근처에서 매운탕집을 했던 할아버지는 2007년 나에게 “밤새 트럭이 들어왔다가 나갔고 총소리가 났다. 하루에 11대가 온 적도 있다”는 말을 했다. 트럭에 사람들을 싣고 왔다는 것은 경찰 공권력이 개입했다는 방증이다.
여러 사람의 증언을 들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죽였을까’에 관해 수없이 질문을 던져보았다. 분노의 본질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내린 결론은 “이념투쟁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의 사회적 관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어렴풋이나마 답이 보였다. 그 중심에 바로 지주와 머슴·소작인 간의 갈등구조가 있고, 씨족간 또는 마을간의 대립도 있다. 염치읍의 희생자 중에는 빈농과 소작농이 많았다. 아산 주민들을 면담할 때마다 “전쟁 당시 땅을 얼마나 소유했었는지”를 묻곤 했는데, 번듯한 규모로 땅을 가졌던 사람은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일제강점기에 소작농들은 일제에 의한 식량 공출로 두 배의 어려움을 겪었다. 여기다 소작료까지 내고 나면 밥을 제대로 먹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염치읍 한 마을의 큰 기와집 마당에는 오래된 향나무가 있었다. 전쟁 전부터 소작농들은 이 향나무 앞에서 매를 맞았다. 춘궁기에 곡식을 빌려 가 갚지 못한 주민들을 지주 쪽 사람들이 향나무에 매달고 매타작을 했다는 것이다. 매를 맞은 다음엔 대나무 살로 만든 멍석에 굴려져 온몸에 피멍이 들었다고 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인 1949년 6월21일 농림부 장관 봉암의 주도로 농지개혁법이 제정, 공포된다. 1950년 초부터는 소작농에게 지주 농지가 분배된다. 소작농들에게는 단비 같은 정책이었다. 곧이어 전쟁이 터진다. 인민군 점령과 함께 지주들은 좌익의 궐기대회에 회부되어 곤욕을 치른다. 머슴과 소작인들에게 구타를 당하기도 한다. 인민군 점령기에 머슴과 소작농들이 인민위원회와 민청(사회주의애국청년동맹)의 간부로 활동한 마을이 많았다. 향나무가 있는 마을에서 지주들은 처형까지는 당하지 않았으나 결코 잊지 못할 모욕을 당했다. 지주들에겐 위기이자 더 큰 기회였다.
인민군이 물러난 뒤 이 향나무 앞에서 머슴과 소작인 가족 30명이 매를 맞아 죽었다. 내가 만난 90대 할아버지는 이 사건과 관련해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매를 맞은 사람들 중에 아기와 함께 온 젊은 엄마가 있었다는 거다. 지주 쪽 사람들은 이들이 모두 숨이 끊어졌다고 여기고 거적때기에 실어 묻으러 가려고 했다. 그런데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기 엄마가 깨어나 간청을 했다. “아저씨, 아저씨. 마지막으로 우리 아기 젖 한 번만 물리게 해주세요.” 아저씨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잘못했다가는 본인이 죽을 수도 있었으니까. 1950년 10월의 어느 날 벌어진 일이다.
그 마을에서 가족 단위로 처형당한 머슴과 소작인들의 땅은 지주들이 차지했다. 농지개혁 때 소작농들에게 분배해준 땅이었다. 지주들은 “원래 내 땅 내가 다시 가져간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배방읍 탕정면에서 만난 주민들은 일종의 소작쟁의였던 2·4파동에 관해 증언했다. 소작쟁의란 소작농들이 지주나 국가에 소작 조건을 개선하거나 땅을 달라고 요구한 투쟁을 일컫는다. 주민들은 2월4일이었으나 몇 년에 일어난 일인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1947년 또는 1948년으로 추정된다. 농지개혁 이전부터 소작농들은 끊임없이 투쟁했고, 남로당은 이를 지지하며 대변했다. 탕정면에서 인민군 점령 직후 궐기대회를 주도한 이들은 바로 2·4 파동을 주도한 세력이었다. 이들의 가족은 수복 직후 거의 살아남지 못했다.
이 지점에서 빼놓아서는 안 되는 인물이 하나 있다. 내가 만난 상당수의 진술인이 그의 이름을 이야기했다. 존경받는 영웅, 역사의 슈퍼스타를 조상으로 둔 그 사람….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라는 책을 썼다. 2000년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관한 미군 비밀문서를 최초 보도했고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 한국어판과 일본어판, 베트남어판을 냈다. 베트남전에 이어 이번엔 한국전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