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논픽션 : 본헌터㉞] 다리가 된 금정굴 선구적 발굴 존경스럽지만 아쉬움도…2차 발굴 참여
2005년 7월 2차 발굴에 들어가기 직전의 금정굴 입구 모습. 통나무를 치우고 안전장치를 만든 뒤 발굴에 들어갔다. 1995년 1차 발굴을 했던 금정굴은 1961년 군사쿠테타 이후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희생자 유족들이 나서서 유해 발굴을 한 최초의 경우였다. 청계인류진화연구소 제공
*편집자 주: ‘본헌터’는 70여년 전 국가와 개인 사이에 벌어진 집단살해사건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이야기다. 아무데나 버려져 묻힌 이들과, 이들의 행방을 추적하며 사라진 기억을 찾아나선 이들이 주인공이다. 매주 2회, 월요일과 수요일 인터넷 한겨레에 올린다. 극단 신세계가 글을 읽어준다.
현장은 어두컴컴하고 깊었다.
수직 10m에 이르는 동굴이었다. 폭 3m의 입구 위에 얼기설기 놓여있던 통나무를 치웠다. 내려가는 방법부터 개발해야 했다. 내려간 뒤에는 안전하게 작업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가스 중독 사고가 날 수도 있었다.
2005년 6월의 어느 날, 경기도 고양시의회의 한 의원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해 선주는 4월 춘천 구봉산으로부터 출발해 5월 원주 신림면과 횡성을 지나 6월 인제 군축령·601고지를 다니며 국군 전사자 유해 발굴을 하던 중이었다. 고양 금정굴에 와서 발굴을 해달라고 했다. 금정굴은 유명한 곳이었다. 이미 10년 전에 유해 발굴로 언론을 탔다. 뉴스 화면을 가득 채우던 ‘해골’들을 기억했다.
전화를 건 시의회 의원은 “유족과 시민단체의 노력으로 2차 유해발굴을 하기 위한 예산을 확보했노라”고 했다. 전사자 발굴에 매인 몸으로서 곤란했다. 젊은 목소리의 의원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꼭 해주셔야 한다”며 간절하게 매달렸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마침 여름이었다. 여름에는 전사자 발굴 일정이 없었다.
2005년 7월 고양시 일산동구 성석동 산208-10번지(옛 고양군 송포면 덕이리) 황룡산 자락에 위치한 금정굴에 갔다. 자연 동굴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 때 금 채굴을 위해 파놓은 수직동굴이었다. 1950년 10월9일부터 10월31일 사이 이 곳에서 부역혐의자 및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153명 넘는 주민들이 고양경찰서 경찰관들과 태극단·치안대원 등에 의해 집단총살을 당했다고 했다. 153명은 이곳에서 발굴된 유해의 숫자였다. 5인1조의 경찰관 2개조가 희생자 5명씩을 굴 방향으로 무릎을 꿇게 하고 등 뒤에서 사격하여 살해한 뒤 굴 속에 암매장했다.
드디어 선주가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 현장과 조우하는 순간이었다. 선주는 무엇보다 수직동굴에 끌렸다. 국군 전사자 발굴 때도 해보지 못한 작업이었다. 1970년대 동물 화석을 조사하기 위해 자일을 걸고 들어갔던 제천 점말과 청원 두루봉 동굴도 수직으로만 된 곳이 아니었다. 여름 휴가를 포기하고 끝내 요청에 응하게 한 동인은 결국 지적 호기심과 열망이었다.
2005년 7월 2차 발굴에 들어가기 직전 금정굴 입구에는 간이로 세워진 유족회 사무실도 있었다. 청계인류진화연구소 제공
선주는 같은 대학에 근무하는 토목공학과 교수 기남을 불러 안전장치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그 결과 사방에 비계를 세우고 비계와 흙 사이 패널을 대어 흙이 무너지지 않도록 했다. 산 너머 건너 건물에서 전기를 끌어와 불을 밝혔다. 지하에 가스가 찼는지 살피고 모터로 공기를 뺐다. 비를 막기 위한 지붕공사와 함께 굴 입구에 모래주머니를 쌓았다. 빔을 넣어 가로 지지대를 세운 뒤 작업자가 오르내리며 흙을 운반할 리프트도 설치했다. 1995년 처음 이곳에서 유해를 발굴할 때는 나무와 줄로 연결된 사닥다리를 이용했다고 했다.
금정굴은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자 유해발굴사에서 상징적인 장소다. 1960년 4·19 혁명 직후 제4대 국회 양민학살진상규명특별위원회가 뜨면서 거창·경주·울산 등 일부 지역에서 결성된 유족회가 희생자들의 유해를 수습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61년 5·16 군사쿠데타와 함께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갔다. 유족단체는 이적단체로 규정되었고 유해 수습지역에 있던 위령비는 파괴되었다. 그로부터 34년 만인 1995년, 고양시 금정굴에서 처음으로 시민과 유족들이 유해 발굴을 하겠다고 나선 거였다. 그만큼 앞섰다.
1995년 9월24일 첫 삽을 뜬 금정굴 유해 발굴은 하나의 투쟁이었다. 정보과 형사들의 감시를 받았고, 발굴 둘쨋날엔 시청 녹지과 요원들에게 장비를 탈취당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발굴의 선례가 없는지라 전문성은 당연히 떨어졌다. 증거 수집과 보존 및 이후 대책이 체계적으로 세워져 있지는 않았다. 일단 유해 수습이 목적이었다. 묘지일 하는 인부들을 썼다. 발굴 뒤엔 유해를 들고 국회 및 고양경찰서 앞에서 시위를 벌이며 진상규명과 유해 처리를 요구했다. 해결책은 나오지 않았다. 발굴단은 서울대 의과대학 법의학교실에 감식 의뢰를 했다. 유해는 그곳에서 2011년까지 16년간 임시 안치됐다.
선주도 이 과정들을 잘 알았다. 이번에는 제대로 해야 했다. 푹푹 찌던 7월21일 발굴이 시작됐다. 선주는 예닐곱 명의 대학원생들을 조사보조원으로 썼다. 토사로 채워진 9m 깊이에서부터 시굴작업을 시작했다. 흙을 파 올리면서 8일 만에 지하 15.5m까지 도달했다. 2인 1조로 또는 3인 1조로 30여분간 작업하다가 교대하고 다른 조가 들어가는 식으로 일했다. 11~12m 사이 나무뿌리와 합판 등이 썩어 심한 악취로 호흡이 곤란해져 작업을 중단하기도 했다.
8월2일까지 13일간 작업했으나 유해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1995년 발굴 때는 오른쪽 허벅지뼈 153개(왼쪽은 137개)와 오른쪽 위팔뼈 136개(왼쪽 133개), 머리뼈 74개 등이 출토됐었다. 당시 감식결과로는 10%가 여자의 뼈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탄피 2점과 작은 어금니 한 개를 찾았을 뿐이다. 동쪽 바닥에 바위가 묻혀 있었고, 나머지 바닥을 1m 길이 탐침봉으로 찔러보았지만 마사토만이 두텁게 퇴적돼 있었다.
발굴단에 참여한 시민단체와 유족들은 안타까움을 드러내는 한편 의아해했다. 금정굴학살사건 공동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이자 고양시민회 대표였던 춘열은 “유해가 하나도 없음을 정말 100% 단언할 수 있냐”고 묻고 또 물었다. 누군가는 “굴 바닥에서 수평으로 다른 곳과 연결된 굴에 유해가 있을 것”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선주는 굴에 더 이상 유해가 흘러갈 틈이 없다고 판단했다. 1995년 당시 발굴에 참여했던 유족의 증언을 봐도 12m보다 더 아래에서 유해가 출토될 가능성은 희박했다.
금정굴을 생각할 때 선주는 늘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유해가 추가로 나오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금정굴은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의 참상을 고발하는 데서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시민과 유족의 노력도 눈물겨웠다. 그 뒤가 문제였다. 서울대 의과대학에서 작성한 감식보고서를 보니 2쪽이었다. 제대로 했다면 300여쪽이 넘었을 보고서였다.
1995년 금정굴에서 발굴된 유골들은 16년간 서울대의대 법의학교실 유골보관실에 보관됐다. 2008년에 촬영된 사진이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서울대 의과대학 법의학교실 창고에 임시안치된 유골 상태도 만족스럽지 못해 보였다. 유해들은 이후 2011년 고양시 청아공원으로, 다시 2014년 고양시 하늘문추모공원으로 안치됐다가 2019년 다른 한국전쟁기 유해들이 모여있는 세종 추모의 집으로 왔다. 그 과정에서 탄피와 삐삐선, 쪽진머리, 댕기머리 등 수많은 유품들이 잘 보존된 것 같지는 않았다. 유해들은 인공솜으로 포장돼 있었다. 솜이 뼈조각에 붙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금정굴은 다리가 되었다. 금정굴 발굴 당시 시민단체 대표로 참여했던 춘열이 4개월 뒤인 2005년 12월 다시 선주에게 연락을 했다. 1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출범하던 시점이었다.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자 유해발굴 계획이 세워지면서 선주를 책임자로 추천했다는 거였다. 그렇게 하여 선주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 유해발굴단’을 총지휘하는 조사단장이 되었다. 2006년엔 유해매장 추정지를 조사하고 권역별로 발굴 후보지를 추리는 작업을 했다. 2007년 7월부터 충북 청원 분터골, 대전 산내 골령골, 경북 경산 코발트광산, 전남 구례 봉성산에서 유해발굴을 시작했다.
국군 전사자 발굴은 2000년부터 3년 기한이었으나 7년을 했다. 민간인 희생자 발굴도 처음에는 3년 기한이었으나 인연은 계속되어 5년, 10년을 넘게 하고 있다. 국군 전사자 발굴에서 가장 대표적 인물이, 민간인 학살 희생자 발굴에서도 대표적 인물이 되었다. 누군가는 우스개 소리로 ‘전향’이라고 놀렸다. 대학 학부 때부터 가깝게 지내온 고고학 분야의 한 선배는 언젠가 은근한 어조로 툭 던지듯 말했다. “밖에서 말이 많아.”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를 맡고 있다.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라는 책을 썼다. 2000년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관한 미군 비밀문서를 최초 보도했고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 한국어판과 일본어판, 베트남어판을 냈다. 베트남전에 이어 이번엔 한국전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