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18일 서울 중구 남산스퀘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제60차 전체위원회에서 김광동 위원장이 의사 진행을 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김광동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위원장이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희생자 유족을 만나 ‘전시하에서는 재판 없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발언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전쟁 시기 경찰의 민간인 집단학살 사건을 두고 “명백한 범죄 행위였다”고 밝힌 진실화해위의 기존 판단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인식인데다, 한국전쟁 당시의 계엄법 체계에도 맞지 않는 발언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김만덕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영천유족회 회장은 11일 한겨레에 “김 위원장이 10일 영천 유족들과의 면담에서 ‘재판도 할 수 없고 법으로 다스릴 수도 없는 전시 상황에서는 방화와 살인을 한 적색분자와 빨갱이를 군인과 경찰이 죽일 수도 있다’는 취지로 말했다”고 전했다. 김만덕 회장은 “그래도 아무런 법적 절차나 심판 없이 어떤 혐의가 있다거나 공산주의 사상을 갖고 있다는 것만으로 죽일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으나, 김 위원장은 “6·25 전쟁 같은 전시하에서는 재판 등이 이뤄질 수 없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10일 오전 11시 서울 중구 남산스퀘어빌딩 진실화해위 앞에서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전국유족회 주최로 열린 집회에서 호소문을 낭독하는 김만덕 영천유족회장. 오른쪽이 윤호상 전국유족회 회장. 고경태 기자
영천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국민보도연맹원 등 600여명이 인민군에게 동조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1950년 7~9월 재판도 없이 경찰과 국군에게 처형된 일이다. 진실화해위가 조사를 마쳤고, 결과 보고서까지 완성했지만 여당 추천 위원들이 소위 안건 상정조차 5개월 이상 미루고 있다. 1979년 영천경찰서가 작성한 대공인적위해조사표 처형자명부에 이들의 처형 이유로 ‘살인’, ‘방화’ 등이 기록돼있다는 점을 근거 삼고 있다. 하지만 대공인적위해조사표는 처형을 정당화하기 위해 허위 기재한 정황이 다수 발견되는 등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 위원장의 발언은 영천 국민보도연맹 사건 조사 보고서가 거듭 보류되고 있는 상황을 설명하다 나온 것으로 보인다.
김 위원장의 인식은 과거 진실화해위의 판단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그동안 진실화해위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 내무부 치안국이 각 도 경찰국에 보도연맹원 및 형무소에 수감된 좌익사범을 검거하고 처리하라는 전문을 보내고 현지에서 처형을 집행한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과 관련해 “전시였다고는 하나 명백한 범죄행위였다”고 결론내린 바 있다.
“전쟁 중엔 재판없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발언은 ‘법률에 의한 재판 받을 권리’가 명시된 헌법은 물론 당시 계엄법상으로도 맞지 않다. 이준일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1949년 제정된 계엄법상 비상계엄 하에서도 대부분의 형사범죄는 군법회의의 재판를 받도록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재판없이 범죄혐의자를 처형하는 것은 계엄법을 위반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한겨레는 김광동 위원장에게 이 발언의 사실여부와 맥락을 확인하기 위해 여러차례 통화와 문자메시지로 접촉을 시도했으나 답을 듣지 못했다.
고경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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