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여 밟기라도 하면 악취로 골머리를 앓는 은행나무 열매(원래는 ‘종자’)의 계절이 또 돌아왔다. 은행나무가 밀집한 시군구에서는 양이 엄청나 민원 골칫거리인 은행나무 열매를 치우는 데 힘을 쏟는다. 한편 사람들은 이 냄새가 심한 열매를 안줏거리로 삼아 먹기도 한다.
그렇다면 누가 처음 은행나무 열매를 먹기 시작했을까. 또 악취 나는 나무를 심어두고 매년 이 고생을 하게 된 이유는 뭘까. 이와 같은 은행에 관한 궁금증을 진화생물학자
피터 크레인 박사의 2013년 저서 ‘은행나무(Ginkgo)’를 통해 답을 찾아봤다.
은색의 은, 살구나무 행. 은행(銀杏)나무는 열매가 은색의 살구를 닮았다 해 ‘은살구 나무’로 불린다. 먼 과거엔 다른 이름도 많았다. 고대 중국 기록에선 은행잎의 모양을 따 오리발이란 이름도 있었다. 중국 원나라 때는 은행나무를 열매 모양을 따 ‘백과(白果·흰 과일나무)’, ‘백안(白眼·흰 눈)’이라 부르기도 했다. 손자를 볼 때가 돼서야 열매를 얻을 수 있다고 해 ‘공손수(公孫樹·할아버지-손자)’라 불렸다.
손자를 볼 때 열매를 맺는다는 뜻의 명칭은 지금 은행나무 열매로 시군구가 곤란을 겪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은행나무 열매는 암나무에서만 자란다. 2011년 유전자 검사법이 등장하기 전까지, 묘목을 심을 단계에선 암수를 구분하지 못했다. 은행나무가 열매를 맺을 때까지 15~20년을 꼬박 기다려야 했다. 국내에선 1990년대 가장 많은 가로수였던 양버즘나무(플라타너스)를 제치고 병충해나 공해에 강한 은행나무를 많이 심기 시작할 때 나무의 암수를 완벽하게 솎아내지 못했다.
실제로 유럽이나 북미 등에선 열매 악취가 문제로 꼽혀 암나무를 가로수로 잘 쓰지 않았다. 워싱턴디시(DC)에선 암나무에 제초제를 뿌려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거나, 뉴욕시에선 아예 암나무를 20년간 심는 것을 금지하기도 했다.
서울에서 가로수가 가장 많은 강남구청은 내년 상반기까지 200그루의 암나무를 수나무로 교체하는 작업을 진행할 계획이다. 은행나무가 가장 많은 송파구청은 2020년에 수나무 교체 작업을 3년간 진행하기로 한 바 있다.
열매의 악취는 뷰티르산 때문이다. 뷰티르산 버터에서 분리됐는데, 서양에선 은행나무 열매를 두고 ‘버터 썩은 냄새’라고 부르기도 한다. 구토에도 뷰티르산이 많아 은행나무 열매에도 유사한 냄새가 난다. 열매가 터지고 썩으면 냄새가 더 고약해진다.
이 악취 나는 은행나무 열매는 누가 먹기 시작했을까. 이 책에선 명쾌한 해답은 찾을 수 없다. 다만 먹을 용도로 은행나무 열매를 채집하기 시작한 것은 ‘인간의 비인간 조상’에서 시작됐다고 본다. 은행나무 열매는 단백질과 비타민 등이 풍부한 견과류다. 견과류는 딱딱한 껍질 덕분에 보관이 쉽고 옮기는 데도 유리했다. 초기 인류가 사용했던 도구는 견과류에서 알맹이를 쉽게 꺼낼 수 있었고, 이동 생활을 할 때 식량으로도 요긴했다. 은행나무 열매는 과거부터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이었던 셈이다. 냄새를 극복하고 먹을 수밖에 없던 이유 중 하나다.
열매에 대한 최초 기록은 11세기 쯤 등장했다. 중국 송나라 시기에 한 시인이 지인에게 은행나무 열매를 선물했다는 내용의 기록이 있다. 또 다른 중국 기록에선 한 마을에 은행나무에서 열매가 굉장히 많이 열렸는데, 그게 마을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고 한다. 그 나무에서만 한 해에 800파운드(약 360㎏)의 열매가 열렸다.
‘긴코(Ginkgo)’란 학명은 은행의 일본 기록을 독일인 캠퍼가 기록한 것을 스웨덴 식물학자 카를 폰 린네가 받아들였다. 일본 발음으로 은행은 긴코가 아니었지만, 캠퍼가 은행의 일어 발음을 오독한 사전을 참고해 이렇게 됐다. 그 참고 기록도 원래는 긴쿄(Ginkyo)가 맞는 것이었지만, 당시 독일 북부지방에서 y발음을 g로 썼다고 해, 지금의 긴코가 됐다.
은행나무는 건강과 장수의 상징이기도 해서, 씨앗을 약으로 쓰기도 했다. 전통 중국 의학 자료에선 은행나무 씨를 폐나 호흡기 질환에 사용했다.
아울러 은행나무 열매의 화학적 성분은 오랜 기간 연구되면서 동시에 열매의 독성도 함께 다뤄졌다. 1927년 한 일본 과학자는 은행 열매에서 추출한 ‘은행나무 산’ 등 물질이 덩굴옻나무에서 유발하는 알레르기와 화학적으로 유사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에 맨손으로 열매를 만지는 것은 좋지 않다.
은행나무 열매의 섭취엔 별도의 기준은 없지만, 중독 사례도 종종 연구로 다뤄졌다. 위험은 적지만, 적게는 15개에서 많게는 574개를 먹어서 사망한 사례도 있다. 6살 미만의 아이에게는 섭취를 제한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대신 열매를 가열해 요리로 해 먹으면 독성은 줄어든다.
냄새에도 불구하고 은행나무 열매는 다양한 곳에 쓰였다. 고대 중국에선 딱딱한 열매 씨를 잿물과 섞어 비누로 만들었고, 이를 낚싯대에 걸어 잉어를 잡는 데에도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은행나무 열매에서 나온 추출물은 병을 유발하는 진균이나 약물내성 박테리아 등에도 반응한다는 연구도 있다. 피터 크레인은 “은행나무 열매의 진정한 가치는 아직 밝혀질 것이 많다”고 한다.
곽진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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