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9월15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청주여성의전화 등 여성단체 주최로 열린 청주중학생 성폭력 사망사건 대법원 선고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친족 성폭력 피해자 보호 방안을 강화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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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가 저항하기 곤란한 정도의 폭행과 협박이 아니더라도, 가해자가 물리적 힘을 가하거나 공포심을 일으킬 수 있는 말을 한 뒤 추행을 했다면 ‘강제추행죄’가 성립한다는 새로운 대법원 판례가 나왔다. 40년 만의 판례 변경으로 강제추행죄 처벌 범위가 넓어졌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노정희 대법관)는 21일 ㄱ씨가 사촌 여동생을 상대로 저지른 강제추행 사건에서 ‘친족관계에 의한 강제추행’ 혐의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유죄 취지로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에 돌려보냈다.
ㄱ씨는 지난 2014년 자신의 방에서 미성년자인 사촌 동생의 손을 자신의 성기 쪽으로 가져가고, 사촌 동생의 신체를 만지는 등 강제추행했다. ㄱ씨는 동생에게 “만져줄 수 있냐” “한번 안아줄 수 있냐” 등의 말을 건네며 자리를 피하는 사촌 동생을 따라가 강체 추행하기도 했다.
1심 법원은 강제추행 혐의 유죄를 인정해 징역 3년을 선고했지만, 2심은 강제추행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ㄱ씨 물리적 힘의 행사 정도가 “(피해자의) 저항을 곤란하게 할 정도였다고 볼 수 없다”는 취지였다. 다만 예비적 공소사실인 아동·청소년 성보호법 위반(위계 등 추행)에 대해 유죄를 인정해 벌금 1000만원을 선고했다.
대법원에선 어느 수준의 폭행·협박이 있어야 강제추행이 성립하는 지가 쟁점으로 다뤄졌다. 기존 대법원 판례는 ‘피해자가 저항하는 것이 곤란할 정도’의 폭행과 협박이 있어야 강제추행이 성립한다는 것이었다.
이날 대법원은 기존 판례가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뒤 “강제추행죄는 상대방의 신체에 대한 불법한 유형력(물리적 힘)을 행사하거나 상대방에게 공포심을 일으킬 수 있는 정도의 협박으로 추행한 경우에 성립한다”는 새로운 판례를 내놨다. 피해자가 원하지 않는 성적 행위를 폭행·협박으로 강요한다면, 그 정도가 강하지 않더라도 강제추행죄의 보호법익인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원하지 않는 성적 행위를 거부할 권리)이 이미 침해됐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근래 재판 실무의 변화에 따라 해석 기준을 명확히 할 필요성이 있어 강제추행죄의 ‘폭행 또는 협박’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한 것”이라고 판례변경의 의미를 설명했다. 대법원은 “기존 판례 법리에 따른 현실의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자칫 성폭력범죄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하거나 2차 피해를 야기할 수 있다는 문제 인식을 토대로 형평과 정의에 합당한 형사재판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이 판결이 ‘비동의 추행죄’를 인정하는 취지는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폭행·협박 선행형(폭행 또는 협박이 추행보다 시간적으로 앞서 그 수단으로 행해진 경우)’의 강제추행죄에서 폭행·협박의 의미를 제한적으로 해석한 기존 판례를 유지할지가 이 판결의 쟁점이었지, 기습추행형(폭행행위 자체가 곧바로 추행에 해당하는 경우) 강제추행죄는 논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설명이다.
이번 판결은 대법관 12명이 의견일치를 봤다. 이동원 대법관은 다수의견처럼 ‘유죄취지 파기이송’에는 동의했지만, 기존 판례는 유지해야 한다고 봤다. 그는 별개의견에서 “강제추행죄의 ‘폭행·협박’ 정도를 ‘상대방의 항거 곤란 정도’로 제한 해석해야 단순추행죄, 위력에 의한 추행죄와 구별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오연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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