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논픽션 : 본헌터㉕] 조사관의 나날 3만여장의 경찰 신원조사기록을 보고 수십여명의 신청인과 목격자를 만나…
“이 사람들이 무슨 죄인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고 가해 관련 참고인은 말했다. 2023년 3월 충남 아산시 배방읍 공수리 110 성재산 유해발굴 현장에서 나온 머리뼈. 사진 주용성 작가 제공
*편집자 주: ‘본헌터’는 70여년 전 국가와 개인 사이에 벌어진 집단살해사건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이야기다. 아무데나 버려져 묻힌 이들과, 이들의 행방을 추적하며 사라진 기억을 찾아나선 이들이 주인공이다. 매주 2회, 월요일과 수요일 인터넷 한겨레에 올린다. 극단 신세계가 글을 읽어준다.
내 이름은 지윤이다.
역사를 좋아한다. 고교 때 인기짱이었던 남자 역사 선생님 때문일지도 모른다. 정말 좋아했다. 우리반 사고뭉치들과 함께 얽힌 추억도 많다. 그래서 대학 전공을 역사학으로 골랐다. 석사과정도 밟았다. 논문 주제는 ‘해방직후 북한의 친일파 청산’이다. 졸업 뒤 역사의 현장을 누빌 기회까지 얻게 된 것은 행운이다. 조사관으로서 말이다. 나는 독립된 국가기관의 조사관이었다.
2008년 7월이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홈페이지에 뜬 모집공고를 보고 전문위원 나급에 지원했다. 7월28일 첫 출근을 했다. 서른 한 살, 첫 직장이기도 했다. 집단희생사건을 조사하는 제2국에 배정되었다. 첫 근무지는 미군 폭격 조사팀이었는데 오래 못 갔다. 팀이 원활하게 굴러가지 않는 눈치였다. 얼마 뒤 팀은 와해됐고, 나는 민간인 학살을 조사하는 5팀으로 옮겼다. 막내인 나에게 미션이 떨어졌다. 아산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충남 아산 부역혐의 희생 사건.
진실화해위는 한시 기구다. 예정된 종료일이 1년여 남은 상태였다. 부지런히 조사해 보고서를 써야 했다. 2005년 12월 1기 진실화해위가 출범하자마자 사건 조사 신청을 하고 진실규명을 기다려온 이들이 있었다. 2008년 하반기까지 아산 사건은 1차 신청인 조사와 주요 참고인 조사만 돼 있었다. 여러 명의 조사관을 거쳤지만 보고서가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거의 마지막 인수인계자였다. 부역혐의 희생 사건은 조사관들에게 인기가 없는 편이었다. 품이 많이 들었다. 대전 골령골 학살이나 청도 보도연맹은 피학살자 명부가 나왔다. 상대적으로 조사가 수월했다. 언론의 조명도 받았다. 아산은 고생길만 훤해 보였다.
아산 사건의 신청인은 꼴랑 11명. 출장 계획을 세우는 데 자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진실화해위 내에서 전국의 경찰기록물을 조사해 만든 목록이었다. 목록 안에 아산 것도 있었다. 아산경찰서 신원조사기록. 아산경찰서에 전화를 했다. 안된다는 이야기만 돌아왔다. 대출, 반출 다 안된다고만 했다. 기록물관리법상 파쇄해야 하는데 방치해놓은 자료였다. 아산경찰서로 직접 내려갔다. 형사들은 허를 찔린 표정이었다. 문서고를 관리하는 정보보안과 담당 형사들이 “그럼 눈으로만 보라”고 했다. 복사? 사진촬영? 노노.
저 곳으로 올라가 죽였다. 저 곳으로 올라가 죽었다. 충남 아산시 배방읍 공수리 110 성재산의 처형 현장. 남북으로 이어진 2.2km에 이르는 교통호에 사람들을 묻은 것으로 추정된다. 고경태 기자
신원조사기록이란 겁나게 민감한 자료다. 관내에서 반정부 활동을 할 소지가 있다고 본 사람들의 동태를 경찰이 일일이 관찰해 보고해 놓은 것이다. 20명이 하나의 파일로 묶여 분류돼 있었다. 그중에서 총 2만2323명의 기록을 검토했다. 분량은 무려 3만여장. 1977년부터 1982년까지의 기록이다.
내가 눈에 불을 켜고 본 것은 ‘부역혐의 처형’이라는 문구였다. ‘누구누구는 아버지가 6.25때 부역혐의로 처형됐다.’ 그 부분들만 잡아내 일일이 손으로 적었다. 부역혐의 희생자 사건 신청인 명단과 대조했다. 신청인이 아니어도 처형된 기록이 있으면 희생자로 잡아놓았다. 하루이틀로 택도 없었다. 3만장을 보는데 한 달이 걸렸다.
매일 아산경찰서 2층 정보보안과로 출근했다. 사무실에 여자는 나 하나였다. 형사들은 불편해했지만, 곧 친해졌다. 한 달간 들여다본 결과 ‘부역혐의 처형’으로 적힌 희생자들만 120명이었다. 이제 그들을 포함해 증인들을 만나러 가야 했다. 사건 신청인, 목격자, 가해자들을 찾아.
나는 혼자 다녔다. 아산경찰서에 갈 때도, 증언을 듣기 위해 아산의 마을을 뒤질 때도 혼자였다. 덩치 큰 사건 지역의 조사관들은 2인1조로 움직였다. 부러웠지만, 상관없었다. 맨땅에 헤딩이어도 좋았다. 출장을 갈 때면 늘 두려우면서도 설렜다. 2박3일, 또는 3박4일 몰아서 일정을 잡았다. 소나타 관용차엔 내비게이션이 없어 전국 지도를 늘 갖고 다녔다. 노트북, 카메라, 녹음기를 챙기고, 휴대용 프린터도 가져갔다. 진술을 받아 친 뒤 핵심 내용을 요약해 프린트해서 증언자에게 보여주고 지장을 찍게 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아산의 농촌 마을을 헤집고 다니며 초인종을 누르고 사람을 찾아다녔다.
피해자들만 50명 넘게 만났다. 참고인까지 포함하면 70~80명은 될 거다. 입을 잘 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기억이 나지 않거나, 이야기하기 싫거나. 그래서 마사지를 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불만과 넋두리를 오랜 시간 들어주고, 에둘러 주변 이야기들로 바람을 잡느라 진땀을 흘렸다. 어느 순간 “아하 맞아”라는 말과 함께 증언의 봇물이 터지기도 했다. 가해집단 쪽에 가담한 참고인들은 늘 소극적으로 증언에 임했다. 기록을 남긴다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구나 절감했다. 이 일이 어마어마하게 숭고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성재산.
설화산.
새지기.
탕정.
신창.
선장.
사건이 일어났던 아산의 지역 이름이다. 성재산과 설화산 피해자들을 가장 많이 만났다. 가해 관련 참고인도 이 지역이 많았다. 증언 하나가 떠오른다. 그는 처형자들을 지엠시(GMC) 트럭으로 이동시킨 청년단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말했다. “이 사람들이 무슨 죄인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고. “나와 내 가족은 절대 이렇게 손가락질 당하면서 죽으면 안돼. 나는 살아야지. 내 가족은 살아야지”라는 오직 그 생각 뿐이었다고.
또 다른 증언도 잊히지 않는다. 갓난아기를 업고 일행과 함께 끌려가던 젊은 엄마가 어둠을 틈타 옆 콩밭에 잽싸게 숨었다. 갓난아이가 울면 끝장이었다. 그러나 아기조차 울지 않더라고 했다. 정적, 갓난아이조차 입을 닫게 만든 그 정적은 얼마나 두렵고 공포스러웠을까. 21세기를 사는 현대인들은 상상할 수 없는 공포다. 이 콩밭 이야기는 새지기 사건이다. 그러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 중 아무도 나를 만나주지 않았다. 비협조를 넘어 적대적이었다. 날이 서 있었다. 다른 지역의 참고인들이 새지기에 관해 진술해줘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날을 기억한다. 유족 김 선생님과 그 분의 아버지가 처형당한 산을 올랐다. 해질 무렵이었다. 김 선생님도 어릴 때 일이고, 어른들한테만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탕정 용두리의 뒷산이었다. 정확한 지점을 찾기 어려웠다. 산길을 오르는데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중이었다. ‘아마도 여기가 아닐까?’ 어떤 지점에서 김 선생님이 우두커니 서더니 큰 절을 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나도 울었다. 석양이 불타고 있었다. 붉은 산비탈에서 김 선생님이 말했다. 고맙다고.
그렇게 고생해 보고서를 만들었다. 2009년 5월11일, 진실화해위 전체위원회에서는 이 보고서를 토대로 아산 부역혐의 희생 사건의 진실규명이 이뤄졌다. 첫 단추일 뿐이지만, 보람에 겨워했다. 당신도 그 보고서를 볼 수 있다. 진실화해위 홈페이지에 있는 1기 위원회 사건별 조사보고서에서 아산을 검색해보시라.
그러나, 보고서엔 한계가 있다.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를 맡고 있다.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라는 책을 썼다. 2000년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관한 미군 비밀문서를 최초 보도했고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 한국어판과 일본어판, 베트남어판을 냈다. 베트남전에 이어 이번엔 한국전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