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논픽션 : 본헌터⑱] 흥수아이와 동물뼈 두루봉 동굴의 그 흔적들은 사람이 남겼을까 동물이 남겼을까
선주가 복원한 흥수아이. 의과대학에 어린이뼈 샘플링이 없어 어려움을 겪었으나 소아치과에 입 부분의 뼈와 살 거리를 잴 프로파일이 있어 이를 토대로 했다. 왼쪽은 폴리에스터 수지에 섬유 등의 강화재로 혼합한 플라스틱인 FRP로 만들었다. 오른쪽은 석고로 만든 흥수아이 머리뼈. 사진 고경태
*편집자 주: ‘본헌터’는 70여년 전 국가와 개인 사이에 벌어진 집단살해사건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이야기다. 아무데나 버려져 묻힌 이들과, 이들의 행방을 추적하며 사라진 기억을 찾아나선 이들이 주인공이다. 매주 2회, 월요일과 수요일 인터넷 한겨레에 올린다. 극단 신세계가 글을 읽어준다.
솔직히 말해, 선주는 알 수 없었다.
흥수아이를 데려가기 위해 한국에 잠시 들어왔다. 1986년의 일이다. 흥수아이는 관 속에 담겨있었다. 관 안에는 흙이 가득했다. 흙째 유골을 수습한 뒤 윗 부분 흙만 살짝 걷어냈기 때문이다. 발굴한 지 만 3년이 된 때였다. 뼈에 습기가 차고 곰팡이가 슬어있었다. 세척을 위해 아세톤을 부어놓았지만, 오래되어 관절 부위 등 약한 뼈는 많이 상한 상태였다. 흥수아이는 후기 구석기 시대의 사람이라고 했다. 연대로 치면 3만년 넘은 화석이었다.
흥수아이는 1983년 충북 청원군 가덕면 노현리의 두루봉 동굴에서 발견됐다. 동굴의 존재는 한 기자의 탐문으로 1975년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한 초등학교 교장실에 걸린 사슴 박제물을 보고 출처를 묻다가 근처 석회암 광산에 옛 동물 뼈가 널려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곧 고고학자들 귀에도 들어갔다. 1975년부터 연세대 박물관팀과 충북대 박물관팀이 합동으로 동굴을 조사했다. 선주도 연세대 박사과정에 들어간 그해 봄과 여름 사이 한 달간 두루봉 동굴에 내려와 뼈 분류 작업을 했다. 잠깐이었다. 발굴은 충북대 박물관팀의 주도로 진행됐다. 그러다 미국 유학중에 흥수아이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석회암 지대인 두루봉 동굴에서 광산회사를 운영하던 사장 이름이 흥수였다. 다이너마이트로 석회암 발파를 할 때마다 발굴단은 작업을 정지하고 숨곤 했다. 발굴단은 결국 문을 닫게 된 광산회사 사람 이름이라도 남겨주자는 뜻으로 여러 동굴 중 하나를 흥수굴이라 했다. 그곳에서 아이의 뼈가 나왔다. 그래서 흥수아이였다.
선주는 충북대 박물관으로부터 흥수아이 감식을 의뢰받아 한국에 온 터였다. 폴리바이닐아세테이트 용액으로 뼈를 단단하게 하는 경화처리부터 했다. 선주는 관에서 흥수아이의 허벅지뼈, 정강이뼈, 윗팔뼈 등을 각 2㎝씩 떼어 미국으로 가져갔다.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원 박사과정 학생들과 이 뼈를 어떻게 봐야 할지 토론을 했다. 감식 결과 나이는 4~6살, 키는 110~120㎝, 머리용량은 1200~1300㏄라는 결과를 냈다.
연대측정이 가장 중요했다. 탄소연대측정법을 사용하는 캘리포니아 샌디에고 대학의 실험실에서 해보기로 했다. 최신 시설이었고, 미국 대학의 박사과정 학생들에게는 절반 이하의 가격만 받는다고 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로스앤젤레스를 거쳐 샌디에고까지 10여 시간 승용차를 끌고 가 뼈를 맡겼다.
그러나 돌아온 결론은 “알 수 없음”이었다. 뼈 속에 유기질이 다 빠져나가 판정할 수 없다고 했다. 흥수아이를 발굴한 책임자들은 결과에 승복하지 않았다. 흥수아이는 후기 구석기 시대의 아이여야 했다. 3년 뒤 한국의 신문에는 “버클리대 인류학과 교수팀이 흥수아이 뼈를 정밀 복원하고 방사선촬영방법을 동원해 연대를 측정한 결과 4만년 전 이상 후기 구석기 시대의 남자아이로 밝혀졌다”는 기사가 실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선주는 정말 알 수 없었다.
2000년대 들어와 흥수아이는 추락 위기를 맞이한다. 2011년 프랑스 고인류학연구소는 한국-프랑스 수교 120주년 기념 프로젝트의 하나로 관 속에 흙과 함께 있던 흥수아이의 등뼈, 갈비뼈 등을 가져가 탄소연대측정법으로 연대를 측정했다. 한데 1630년에서 1893년 사이로 나와버렸다. 이들은 ‘세계의 구석기’라는 이름의 책 한국 편에서 이러한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다.
흥수아이는 한반도 남쪽에서 완전유해 형태로는 처음 나온 구석기 화석이라는 영광스런 지위를 지켜야 했다. 350년 전 죽어 그냥 동굴에 묻힌 아이가 된다면 한국 인류학자들이 망신을 당할 수 있었다. 그게 아님을 증명하려면 두루봉 동굴에서 나온 다른 화석들과 흥수아이의 인과관계를 설명할 수 있어야 했다. 불가능했다. 이미 동굴은 광산의 발파작업으로 흔적도 없었다.
흥수아이 유골. 충북대 박물관 제공
발굴을 주도한 한국의 충북대 박물관 쪽에서는 난리가 났다. 선주 역시 프랑스쪽 연대 측정의 근거와 프로세스를 따져물었다. 한국에서 경화처리를 하느라 뼈에 침투시켰던 폴리바이닐아세테이트 용액이 다 씻겨나가지 않으면 결론이 잘못 나올 수 있었다. 이 용액을 무엇으로 지웠느냐고 했더니 증류수라는 답이 돌아왔다. 뜨거운 용액으로 굳혀놓은 부분을 증류수로 다 제거할 수 없다는 반론을 제기했다. 시료가 오염됐다는 거였다. 프랑스 쪽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350년 전에 묻혔다면, 굳이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와서 아이 주검을 묻었다는 얘기가 된다. 왜 그랬을까. 암매장인가?
이 논쟁은 2018년까지 이어졌다. 한국의 학자들 중에서도 반론을 제기한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검증을 하려면 뼛조각을 잘라 탄소연대측정 실험실에서 태워보아야 했다. 문화재 담당 기관의 허가를 받는 절차를 거쳐야 했다. 누군가 나서야 했지만,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선주는 흥수아이의 충치 흔적에 주목했다. 후기 구석기 때 충치를 앓은 아이의 흔적이 있다는 외국 논문을 찾아냈다. 흥수아이 발굴을 책임졌던 충북대 박물관에는 힘이 되는 이야기였다. 선주는 이후 흥수아이를 복원하는 작업에도 참여했다. 그럼에도, 알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알 수 없었다. 흥수아이가 구석기 아이라는 사실은 아직은 완벽하게 과학적인 데이터로 입증되지 않았다.
두루봉 동굴의 주인공이 흥수아이만은 아니었다. 두루봉동굴에선 사슴뼈, 쥐뼈, 곰뼈, 하이에나뼈, 원숭이뼈, 코끼리 상아 등 수많은 동물뼈가 나왔다. 두루봉 동굴은 절멸된 동물 뼈가 많이 발견되었다는 점과 고퇴적층 토양으로 볼 때 지질시대로는 플라이스토세(홍적세), 고고학적으로는 구석기 시대로 보는 게 타당했다. 다만 제천 점말동굴에서처럼 이 곳에 누가 살았냐가 쟁점이었다. 원래부터 쟁점이 아니었다. 선주가 쟁점을 만들었다고 보는 편이 맞았다.
발굴 책임자들은 동물뼈들을 모두 선사인류(호미니드)의 사냥 결과물로 인식했다. 심지어 사냥에 대한 그림까지 동굴 안에 있다며 예술활동의 결과라고 여겼다. 선주는 그 그림에 관해선 식물이 달라붙어 녹은 흔적이라고 보는 편이었다. 후기 구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연모인 새기개가 두루봉 동굴에서 나왔다는 발표는 예술 활동을 뒷받침해준다고 했다. 새기개는 그림 그리는 도구의 모양을 띤 석기였다. 그 석기가 정말 새기개인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다. 그 말이 맞다면 흥수아이는 사냥을 하던 구석기 시대 선사인류 성인의 자식이었을지도 모른다. 선주는 여기에 반기를 들었다.
선주는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두루봉 동굴에 대한 다른 가설을 던졌다. 한국에 와 손 선생을 만날 때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해드렸다. 1981년에 읽은 리처드 빈포드의 ‘본즈’ 영향이 컸다. 동물뼈는 깨진 정도와 모양에 따라 자연에 쓸려온 것일 수도, 사람에 의한 것일 수도, 동물에 의한 것일 수도 있었다. 잔뼈들의 크기를 재고 각종 상황에 따른 연구결과를 응용해 이게 사람이 사용한 뼈 연모였는지, 사람이 뼈다귀 속 영양분을 뺴먹고 남긴 것인지, 맹수가 씹다가 버린 것인지를 따져야 했다. 디테일한 연구결과들이 있었다. 가령 두루봉 동굴을 발굴한 이들은 동물 뼈에 난 구멍을 보고 사람 행위의 결과물로만 보았다. 그러나 쥐 등 설치류가 긁은 흔적일 수 있었다. 쥐가 앞니로 긁으면 U자 형태, 사람이 상처를 내면 V자로 나타난다고 했다. 쥐 이빨과 연모가 남기는 파임 흔적의 차이 연구에 따르면 그랬다.
선주는 두루봉 동굴 동물뼈 분류에 대한 논문을 여러 차례 발표했다. 동굴곰과 하이에나 뼈가 나왔다는 발굴 초기의 분석에 대해서는, 머리뼈와 이빨의 특징을 볼 때 동굴곰이 아닌 불곰이며, 그냥 하이에나가 아니라 점박이 하이에나인 크로쿠타라는 주장을 폈다. 이건 제천 점말동굴에도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불곰이 아닌 동굴곰의 뼈라 하더라도 사람의 사냥보다는 동면 중 자연사했을 가능성이 컸다. 선주가 보기에 두루봉 동굴은 동물들의 덴스(dens), 즉 은신처였다. 가령 맹수들이 사냥을 하고 남겨놓은 뼈를 점박이 하이에나인 크로쿠타가 입으로 물고 자신의 은신처로 갖고 와 씹어먹다 남겼을 가능성이 컸다.
뼈의 깨진 모양과 형태에 대한 연구는 다른 추리로 이어졌다. 이건 꼭 동물뼈에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사람뼈에도 적용해볼 수 있었다. 그게 바로 장 선생의 뼈였다.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를 맡고 있다.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라는 책을 썼다. 2000년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관한 미군 비밀문서를 최초 보도했고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 한국어판과 일본어판, 베트남어판을 냈다. 베트남전에 이어 이번엔 한국전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