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참여연대 등 5개 단체가 연 ‘엘리엇 1300억원 배상에 따른 국고 지출 이재용·박근혜 책임 추궁 촉구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국고 손실을 회수할 방안 마련을 촉구하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과의 ‘투자자-국가 분쟁해결절차’(ISDS) 판정에서 중재판정부가 삼성물산의 ‘적정 주가’를 한국 대법원의 판단보다 2698원 높은 6만9300원으로 산정한 것으로 나타났다. 중재판정부가 이례적으로 ‘이사회 합병 결의 후’ 취득 주식에 대해서도 한국 정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면서 배상원금이 100억원대에서 600억원대로 급증한 사실도 확인됐다. 국제투자분쟁이라는 제도가 국내 투자자를 역차별하고, 외국인 투자자에게 얼마나 일방적으로 유리한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배상해야 하는 원금 688억원(미화 5359만달러)은 엘리엇이 보유한 삼성물산 주식의 ‘제값’(적정 주가. 한국 정부의 불법행위가 없었을 경우를 가정한 삼성물산의 주가)에서 ‘실제로 받은 값’(실제 매도주가)을 뺀 차액이다. 삼성물산 주식의 ‘제값’을 높게 간주할수록 엘리엇이 승소할 때 받아갈 액수가 커지는 구조다. ‘배상 책임이 있는지’와 별개로 ‘삼성물산의 제값은 얼마인가’로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던 이유다.
‘제값’을 알기 위해서는 ‘언제부터 제값이 손상’되었는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대법원은 제일모직 신규상장으로 삼성물산 주가가 ‘손상’되었다고 봤다. 따라서 제일모직 신규상장 전날(2014년 12월17일)의 삼성물산 주가(6만6602원)를 ‘제값’으로 봤다. 제일모직이 상장되면서 “자본시장의 주요 참여자들이 합병을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법원의 이 판단은 2015년 삼성물산이 제일모직과 합병을 결의할 당시, 합병에 반대하는 주주들이 ‘내 주식을 공정한 가격에 매수하라’고 요청하는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하면서 나왔다. 당시 삼성물산은 ‘1주당 5만7234원에 되사겠다’고 제시했다. 주주들은 이를 거부하고 법원에 가격 조정을 신청했다. 이렇게 나온 판단이 ‘6만6602원’이었다.
24일 <한겨레>가 공개된 중재판정문을 살펴보니, 중재판정부는 합병이 공식적으로 결정된 삼성물산 주주총회를 삼성물산 주가가 ‘손상’된 날로 봤다. 주주총회 전날(2015년 7월16일)의 삼성물산 주가(6만9300원)를 ‘제값’으로 본 이유다. 엘리엇의 주장 그대로다. 결과적으로 국적이 한국이어서 국제투자분쟁 제기 자격이 없는 국내 주주들만 1주당 2698원씩 손해를 봤다.
중재판정부가 ‘이사회 합병 결의 후’ 취득 주식도 손해 배상 대상으로 인정하면서 배상 원금은 114억원에서 688억원으로 크게 뛰기도 했다.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 이사회는 제일모직과의 합병을 의결했다. 한국법은 이날 이후 매수한 삼성물산 주식에 대해서는 ‘이 합병에 반대하니 내 주식을 되사라’고 주주들이 삼성물산에 요구할 권리(주식매수청구권)를 인정하지 않는다.
중재판정부도 엘리엇이 이날 이후 취득한 339만3148주에 ‘주식매수청구권’이 없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주식들 역시 한국 정부의 불법행위로 가격 손해를 봤다고 인정했다. 배상 원금이 폭증한 이유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투자자-국가 분쟁해결절차는 한국법이 아니라 양자 간 협정에 근거하고 있어서 국내 투자자에 대한 역차별이 생길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는 통상 협정을 맺을 때 대부분 국제투자분쟁 해결 절차를 무비판적으로 도입하고 있는데, 과연 한 국가의 사법주권과 입법주권보다 해외 투자자 보호가 더 앞설 수 있는지 의문”이라며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을 막으려면 자유무역협정(FTA)과 국가 간 투자협정(BIT)을 점진적으로라도 개정해가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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