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논픽션 : 본헌터⑧] 피와 모란 폐결핵의 시대, 비참하게 살던 사람들이 관공서에 불을 지르던 시대
지난 1971년 서울의 무허가 판자촌에서 지금의 성남시로 강제 이주당한 도시 빈민들이 정부의 부당한 정책에 항의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편집자 주: ‘본 헌터’는 70여년 전 국가와 개인 사이에 벌어진 집단살해사건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이야기다. 아무 데나 버려져 묻힌 이들과, 이들의 행방을 추적하며 사라진 기억을 찾아나선 이들이 주인공이다. 매주 2회, 월요일과 수요일 인터넷 한겨레에 올린다. 극단 신세계가 글을 읽어준다.
피를 한바탕 쏟아냈다.
교회 권사라는 60대 여성이 안수기도를 해주던 중이었다. 두어달 동안 거의 매일 찾아와 선주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해주는 사람이었다. 버스를 타고 가다 뒷좌석 젊은 청년들의 대화에 끼어든 게 출발이었다고 했다. 요양 중인 선주를 걱정해주던 대학 친구들을 우연히 만난 모양이었다.
결국 선주가 어머니와 따로 살고 있던 수유리 집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왔다. 하나님한테 당신을 찾아가라는 계시를 받았노라고 했다. 어느 날 선주는 그 여성에게 신의 환상 같은 걸 보았다고 했다. 그 여성도 똑같은 환상을 보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간증을 해보라고 했다. 뭔가 말하려는 순간 갑자기 구토감이 일었다. 쿨렁쿨렁 피가 끝없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동네 의사는 회복할 가망이 없다고 했다. 폐에 구멍이 뚫려 있다고 했다. 안수기도를 하던 여성은 자기 탓이라도 되는 양 미안해했다. 안수기도보다, 몰래 마신 뱀술이 문제였다. 자신에게 합기도를 배우던 제자가 군대에서 구렁이를 잡아 큰 병에 술을 담가왔다. 사람이 발로 밟으면 좋다고 해서 통행량이 많은 곳에 묻어놓았다고 자랑하던 술이었다. 한 잔 마시면 비린내가 났지만, 조금 지나면 또 마시고 싶었다. 그렇게 뱀 껍질만 남을 때까지 다 마셨다. 약인 줄 알았지만, 실제로는 혈관을 팽창시키는 독이었다. 한 달간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입원을 했다.
몸에 좋다고 하면 마다하지 않았다. 양질의 단백질을 섭취하면 좋다 하여 태반 조각을 몇 차례 먹기도 했다. 수소문을 통해 어느 종합병원의 산부인과 과장에게 받은 거였다. 어머니가 칼 손잡이로 다져서 환으로 만들어 주었다. 등에 100여일간 뜸을 뜬 적도 있다. 밤에 막걸리 한 사발을 밖에 내놓은 뒤 이슬을 맞게 하고, 거기에 미꾸라지를 갈아 넣어 삼베에 넣고 짜 한 달간 마시기도 했다. 희한한 민간요법이 많았다. 오로지 살기 위한 사투였다. 1970년의 일이다.
폐결핵에 걸린 사실을 처음 안 건 1969년 5월. 손 선생과 함께 간 공주의 석장리 구석기 유적 발굴현장에서였다. 아침 운동을 하고 나서 기침을 했는데 피가 나왔다. ‘이게 뭐지?’ 폐결핵 진단을 받았다. 휴학을 했다. 큰형님 집에서 따로 나와 요양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4년 만인 1972년에야 완치 판정을 받았다. 안수기도 중의 각혈은 가장 가까이 다가왔던 죽음의 그림자였다. 수천년간 인류에게 공포를 선사했던 폐결핵. 당시엔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감염되던 무시무시한 질병이었다.
폐결핵은 아버지의 유산이다. 대한통운의 전신인 마르보시의 현장 노동자로 일하던 아버지는 막냇동생의 일로 1946년부터 고초를 겪었다. 막냇동생은 조선정판사라는 인쇄소에 다니고 있었다. 그해 5월 조선공산당이 당비를 조달할 목적으로 조선정판사에서 위조지폐를 만들어 시중에 유통시켰다며 미 군정 치하의 경찰이 이들을 체포하는 사건이 터졌다. 막냇동생은 좌익으로 몰리고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됐다. 집으로 와 동생의 소재를 다그치던 경찰은 권총 자루로 아버지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그 후유증으로 아버지는 나중에 늑막염을 앓는다.
선주는 어릴 때 출근하지 않고 집에 누워 있던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했다. 아버지가 쓰러지자 어머니가 신발공장에 다니며 6남매를 키웠다. 아버지는 늑막염이 악화하면서 폐결핵까지 얻었다. 결핵은 호흡기 분비물로 옮겨지는 전염성 질환이다. 선주는 자식 중에 그 결핵균을 자신이 받았다고 생각했다. 쉽게 피로감을 느꼈고 자주 기침을 했다. 자다가 식은땀을 흘렸다.
‘파스’라는 이름의 폐결핵약은 한주먹이 될 만큼 양이 많았다. 신약이 나왔지만 파스에 비해 너무 비쌌다. 한 달치 약값이 직장인의 한 달 월급이었다. 1935년생인 큰 형님이 아버지와 선주의 약값을 댔다. 큰 형님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다녀온 뒤 동생들을 책임지기 위해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타고난 사업가 기질이 있었다. 택시에 공급한다며 프로판가스 사업을 했고, 남양주 금곡 야산에 400여채 빌라를 지어 분양을 하기도 했다.
서울시는 1969년 5월부터 청계천 일대를 비롯한 판자촌을 대거 철거하면서 주민들을 모란 쪽에 강제이주시켰다. 그렇게 해서 모인 빈민들 수가 14만5천명에 이르렀다. <한겨레> 자료사진
그러다 망했다. 부도가 나자 그때까지 큰 형님 식구와 살던 수유리 집에 집달리(집행관)들이 찾아왔다. 풀장도 있던 대저택이었다. 건달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들어와 퇴거명령을 했다. 그때 큰 형님 식구 여섯과 어머니, 그리고 선주가 세 들어 간 곳이 모란이었다. 성남이라는 이름이 지어지기 전이었다. 모란은 지금으로 치면 성남시 수정구다. 부족함 없이 풍요를 누리던 선주는 갑자기 최악의 빈민가 근처로 이주하는 신세가 되었다. 폐결핵의 몸으로.
서울에서 망한 사람들은 모란으로 왔다. 벽돌이나 천막으로 얼기설기 집을 지어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루 끼니를 위해 봉지 쌀을 사오면 옆집에서 나눠 먹자면서 시비가 붙기 일쑤였다. 선주는 볕이 좋은 날이면 아침 먹고 제방에 나가 누워있다가 점심때 돌아와 밥을 먹고 또 제방에 나갔다. 그래도 학교는 복학해서 다녔다. 집은 망했지만 큰 형님이 애를 써 학교에 다니게 했다. 모란에서 동대문까지 시외버스를 타고 가, 다시 신촌 가는 시내버스로 갈아탔다. 시외버스에서 만난 모란 사람들은 차비도 못 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곳에서 1970년 말부터 8개월을 살았다.
1971년의 어느 날이었다. 버스를 타고 모란에 도착했는데 술 생각이 났다. 폐결핵을 앓으며 입에 한 모금도 대지 않던 술이었다. 그날은 시험 삼아 한 번 먹어보자는 유혹이 고개를 들었다. 술집에 들어가 막걸리를 한 병 시켰다. 그때 허름한 차림의 30대 남자 한 명이 들어오더니 선주 앞에 앉았다. 술 한 잔만 달라고 했다. 순순히 한 잔 따라주며 어떻게 혼자 왔냐고 물었다. 자신을 막노동자라고 소개한 남자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부인이 아이를 가졌다고 했다. 서울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부인이 죽어있었다고 했다. 한겨울에 칼바람이 들어오는 집에서 산모는 안전할 리 없었다. 죽은 부인의 배를 칼로 갈라 태아를 꺼냈다고 했다. 야산에 묻어주고 왔다고 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굶주림에 지쳐 인육을 먹었다는 소문까지 들렸다. 그곳이 모란이었다.
그해 초여름 모란은 폭우에 물바다가 됐다. 동네 사람들이 다 나와 모래주머니로 둑을 만들었다. 7월에 모란 사람들은 파출소와 경찰서에 불을 지르고 관공서 건물과 차량을 파괴했다. 서울시는 1969년 5월부터 청계천 일대를 비롯한 판자촌을 대거 철거하면서 주민들을 모란 쪽에 강제이주시켰다. 그렇게 해서 모인 빈민들 수가 14만5천명에 이르렀다. 굶주림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투기꾼들이 몰려들어 땅값이 뛰는 이 지역 토지를 서울시가 유상불하하고(팔아 넘기고) 가옥 취득세도 부과한다는 방침을 발표하자 분노했다. 선주는 불을 지르며 서울로 행진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모란의 다른 이름은 광주대단지였다.
한 바가지의 피는 선주를 더욱 강하게 했다. 사투였다.
모란은 신세계였다. 선주는 비참하게 가난한 사람들의 사투에 눈을 떴다.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를 맡고 있다.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라는 책을 썼다. 2000년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관한 미군 비밀문서를 최초 보도했고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 한국어판과 일본어판, 베트남어판을 냈다. 베트남전에 이어 이번엔 한국전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