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관악구 주사랑공동체교회에서 보육사가 베이비박스를 정리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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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봄 ㄱ씨는 남자친구와 헤어진 상태에서 임신 사실을 알게 됐다. 그해 겨울, 준비 없이 아이를 낳은 ㄱ씨는 입양 절차를 알아봤지만 “출생신고와 7일간의 입양 숙려 기간을 거쳐야 한다”는 답을 들었다. 결국 ㄱ씨는 경기도 한 교회에 설치된 베이비박스에 아이를 두고 왔다가 재판에 넘겨졌다. ㄱ씨는 영아유기죄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5일 <한겨레>가 대법원 판결서 열람 제도를 통해 2009년 베이비박스 설치 이후 베이비박스를 통해 영아를 유기한 사건 17건의 판결문을 전수 확인한 결과, 아이가 숨지지 않았다면 대체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1~2년 형을 선고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2009년 12월 주사랑공동체교회의 이종락 목사가 베이비박스를 최초로 운영한 이후 ‘영아 유기 조장’ ‘아기를 살리기 위한 불가피한 방안’ 등 베이비박스를 보는 시선이 엇갈리는 가운데, 법원은 베이비박스를 “도움의 손길이 닿는 곳”이라고 판단했다. 감사원의 보건복지부 감사로 촉발된 경찰의 출생 미신고 아동 수사에서도 출생신고가 안 된 아동의 69% 남짓이 ‘베이비박스 유기’로 확인됐다. 현행 입양특례법상 출생신고 된 아이만 입양이 가능해, ㄱ씨처럼 출생신고를 꺼리는 경우 상당수가 베이비박스를 택하고 있는 상황이다.
17건의 판결문을 보면, 법원은 생모가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다는 점도 꼼꼼히 살폈다. 청주지법 영동지원은 가족이나 아이 아빠와 단절된 채 친구 집 화장실에서 아이를 낳고 베이비박스에 두고 간 친모 ㄴ씨에 대해 “가족과 단절돼 정서적 지지를 받지 못한 점” “경제적 형편이 어려워 교회에서 아이를 키우는 것이 더 나은 환경이라 생각한 점” 등을 고려해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항암치료 중으로 양육이 쉽지 않았던 점” 등을 참작해 선고가 유예된 사건도 있었다.
아이가 숨졌음에도 범행에 이른 상황을 살펴 집행유예가 선고된 경우도 있었다. 아버지와의 불화로 18살에 가출해 홀로 살다가 성매매로 임신한 ㄷ(당시 22)씨는 중절 수술비가 없어 아이를 낳았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ㄷ씨는 기온이 3.2도까지 떨어진 11월 밤 9시께 수건으로 감싼 갓난아기를 베이비박스 ‘앞’에 두고 떠났고, 아기는 밤사이 숨졌다. 서울중앙지법은 “갓난아기를 장시간 실외에 방치할 경우 생명에 위험을 예상할 수 있었다”면서도 “아기가 보다 나은 환경에서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에 베이비박스 앞까지 갔음에도, 출산 직후의 고통과 충격으로 경황이 없어 범행에 이르렀다”며 ㄷ씨에 징역 2년6개월,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서울 관악구 주사랑공동체교회에 베이비박스가 설치돼 있다. 연합뉴스
무죄 선고는 1건이었다. ㄹ(30)씨는 경제적 이유로 2018년과 2021년 두 차례 아이를 베이비박스에 두고 떠나 재판에 넘겨졌지만 서울중앙지법은 ㄹ씨가 “아기를 베이비박스에 두고 장소를 이탈한 것이 아니라
담당자와 상담을 거쳐 맡긴 사실이 인정된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베이비박스는 첨예한 찬반 논란 속에 미인가·무허가 상태로 운영되고 있다. ‘비밀출산’을 전제로 부모와 아이를 손쉽게 분리하는 베이비박스를 허용하면 영아유기를 부추기고 사회로부터 고립된 임신과 출산을 방치하는 효과를 낳는다는 비판이 크다. 하지만 베이비박스가 아이 생명을 보호한다는 찬성론도 만만치 않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13년 “베이비박스는 아동 인권침해가 아니다”고 판단한 바 있지만, 2019년 유엔 아동권리위원회는 한국 정부에 베이비박스를 금지하라고 권고하기도 했다.
베이비박스에 들어오는 아기 수가 매년 100∼200여명에 이르는 가운데 재판에 넘겨져 선고를 받은 사례가 전체 17건에 불과한 점을 비추어 보면, 검경도 다른 영아유기와 베이비박스 유기를 달리 취급하고 있다. 경찰청 관계자는 “베이비박스 유기의 경우 담당자와의 상담 등 아기 안전에 대한 조처를 한 정황이 보이면 입건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이지혜 기자
godot@hani.co.kr 권지담 기자
gonji@hani.co.kr 장나래 기자
wi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