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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필리핀 이주민 농구리그가 꽂아넣은 ‘정체성 슬램덩크’

등록 2023-06-08 07:00수정 2023-06-26 22:48

[한겨레 창간기획] 이주시대, 스포츠로 경계를 넘다 ④
필리핀 이주민 리주데 알루난.
필리핀 이주민 리주데 알루난.

“월~금요일은 일하고, 토요일은 가족과 함께. 일요일은 스포츠죠.”

지난 5월 초 뉴질랜드 오클랜드 남쪽 지역에 있는 마누레와 레저센터 체육관에서 만난 필리핀 이주 노동자 리주데 알루난(40)은 일요일마다 참가하는 농구 경기의 즐거움을 이렇게 표현했다.

알루난은 이날 필리핀 이주민을 위한 ‘앰배서더컵 농구대회’에 참가한 19스프링 탈파커스팀의 주전 슈터로 역시 필리핀 노동자로 구성된 오클랜드 볼러스팀을 꺾는(48-27) 주역이 됐다. 2019년 영주권을 얻으면서 가족까지 뉴질랜드로 데려온 알루난은 “어려서부터 농구를 좋아했다. 농구를 하면 행복하다. 술과 농구를 두고 선택하라면 난 농구를 택할 것”이라며 웃었다.

뉴질랜드 내 필리핀 이민자의 규모는 7만2천여명(2018년 기준)으로 중국, 인도에 이어 아시아 3위권에 든다. 알루난은 일본에서도 일한 경험이 있는 건설 이주 노동자로 필리핀 이주민이 밀집한 마누레와 지역에 살고 있다.

알루난과 호흡을 맞추며 팀 승리를 이끈 센터 니엘 리나잔(36)도 경기 뒤 “스트레스 해소에는 운동이 최고”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농구광인 그는 “필리핀 사람들을 위한 농구리그가 이곳에 여럿 있다. 다른 리그에서도 뛰어 일주일에 두번 경기하기도 한다. 리그를 찾아가면서 뛰면 1년 내내 농구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필리핀 이주민 니엘 리나잔.
필리핀 이주민 니엘 리나잔.

이날 열린 앰배서더컵 리그는 필리핀 대사관과 ‘굿 하트 PH-NZ 재단’이 협력해 만들었다. 후원 기업으로 지역의 모텔이나 중소 기업들이 참여했다. 등록비는 팀당 1천뉴질랜드달러(약 80만원)인데, 10~13명의 선수가 나눠 내면 부담스러운 것은 아니다.

대회는 주니어(21살 이상)와 시니어(35살 이상)부로 나뉘어 2개월 동안 열리고, 작전타임도 4쿼터 40분 경기 안에 포함한다. 탈파커스팀은 8개 팀이 참가하는 시니어부 리그의 중위권 수준이다. 리나잔은 “등록비만으로는 체육관 대관 등의 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 주변에서 도와줘 대회가 이뤄진다”고 설명했다. 이주민이 자원봉사로 서로 일을 거드는 이유다. 이날 경기에서도 필리핀 자격증을 보유한 심판이 휘슬을 불었고, 경기 운영 책임자인 닉 칼라마탄의 딸이 간이 탁자에서 득점 상황을 기록했다.

칼라마탄은 “리그는 단순히 스포츠만의 장이 아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정보를 나누고, 교류하면서 우리가 필리핀 사람임을 확인한다. 이렇게 모이는 것을 다들 좋아한다”고 전했다. 그는 또 “한국 프로농구 케이비엘(KBL)의 인삼공사팀을 응원한다. 필리핀 선수 렌즈 아반도가 인삼공사에서 뛰는 모습을 보면 신이 난다. 오늘(5월7일) 챔피언결정전 7차전이 열리는데 집에 가서 유튜브로 볼 것”이라고 했다.

필리핀 이주민을 위한 ‘앰배서더컵 농구리그’에 참여한 19스프링 탈파커스팀 선수들.
필리핀 이주민을 위한 ‘앰배서더컵 농구리그’에 참여한 19스프링 탈파커스팀 선수들.

이들 필리핀 이주민들의 농구 리그는 체육 전문가들한테도 “매우 모범적인 사례”라는 얘기를 듣는다. 농구가 이민자 사회에서 중요한 연결망이 되기 때문이다. 뉴질랜드 이주민 스포츠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장익영 한국체육대 교수는 “이주민은 늘 떠나온 모국과 현지 사이의 ‘트랜스내셔널’한 공간에 놓여 있다. 뉴질랜드에 거주하면서도 자기들끼리 모여 자국의 정서를 나누고, 새 나라인 거주국에서 필요한 다양한 정보를 얻으며 정체성을 만들어 간다. 그 사이 소통의 공간에 스포츠가 매개 구실을 한다”고 짚었다.

오클랜드/김창금 선임기자 kimck@hani.co.kr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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