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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낯선 땅서 아내·며느리·엄마의 삶…탁구가 내 안의 ‘꿈’을 깨웠다

등록 2023-06-01 05:00수정 2023-06-26 22:49

[한겨레 창간기획] 이주시대, 스포츠로 경계를 넘다③
경상북도 영덕군 탁구교실에 참가하는 이주여성 윤혜린씨(오른쪽부터), 원지현 통번역지원사, 김유진씨, 손진아씨, 윤나비씨, 박이미씨가 19일 영덕군 영덕국민체육센터에서 수업을 마친 뒤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준희 기자
경상북도 영덕군 탁구교실에 참가하는 이주여성 윤혜린씨(오른쪽부터), 원지현 통번역지원사, 김유진씨, 손진아씨, 윤나비씨, 박이미씨가 19일 영덕군 영덕국민체육센터에서 수업을 마친 뒤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준희 기자

“참 겁이 없었죠.”

필리핀 출신 윤혜린(35)씨는 16년 전 한국에 처음 왔을 때를 이렇게 돌아봤다. 한국인과 결혼해 경북 영덕에서 살던 이모가 남편을 소개했고, 윤씨는 그렇게 한국에 왔다. 지금은 한국말은 물론 영어까지 능통해 어린이집과 초등학교에서 이중언어 강사로 활동하지만, 그때만 해도 한국말을 전혀 할 줄 몰랐다.

낯선 땅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많은 책임을 짊어졌다. 사과농사를 짓는 시가를 위해 농사일을 도왔고, 가사노동도 도맡았다.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으며 세 아이 엄마도 됐다. 그런 와중에 한국말도 열심히 배워야 했다. 아내, 며느리, 엄마, 그리고 “다문화”라고 불리는 동안 ‘인간’ 윤혜린은 점점 희미해졌다.

탁구를 처음 접한 것은 4년 전. 필리핀 출신 언니들이 영덕군가족센터에서 운영하는 탁구교실에 함께 가자고 제안했다. “솔직히 스포츠에 관심도 없었고, 재미도 없어 보였”지만, “일주일에 한번 언니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게 좋아서” 탁구채를 잡았다. 솔직히 난생처음 해보는 탁구는 어렵기만 했다. “주고받기가 돼야 하는데 그냥 죽기만 했기 때문”이었다.

탁구에 비로소 마음이 열린 것은 지역에서 열린 한 탁구대회 때였다. 네트를 오가는 탁구공을 매섭게 노려보는 눈, 그리고 그들이 흘리는 땀방울. 자신도 몰랐던 도전 정신이 깨어났다. 윤씨는 “탁구를 시작한 지 3개월쯤 됐을 때 대회에 참가하라고 해서 갔는데, 탁구를 잘하지 못하는데도 다른 사람들이 하는 걸 보니 너무 도전을 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윤씨는 탁구교실에 열성적으로 참석했다. 농번기에는 수업에 빠지기도 했지만, 꾸준히 연습한 끝에 점점 랠리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주고받는 재미를 느끼자, 실력은 더욱 빠르게 늘었다. 어느덧 스매싱까지 장착한 윤씨는 한 지역대회에서 입상(3등)했다.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을 정도로 짜릿한 경험이었다.

영덕군 탁구교실 회원들이 19일 경북 영덕군 영덕국민체육센터에서 수업을 마친 뒤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준희 기자
영덕군 탁구교실 회원들이 19일 경북 영덕군 영덕국민체육센터에서 수업을 마친 뒤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준희 기자

한국에 처음 왔을 때 “힘들다”고만 되뇌던 그는 이제 “도전”이란 단어를 자주 쓴다. 도전은 탁구에만 머물지 않는다. 2020년 한국방송통신대학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해, 결혼하며 그만뒀던 대학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물론 탁구 욕심도 여전하다. 그는 “아무래도 제가 다문화라서 한국 분들이 (대회 때) 조금 봐주지 않았을까 생각한다”며 “정말 실력으로만 인정받을 정도로 잘하고 싶다”고 했다.

영덕군에서는 윤씨와 같은 결혼이주여성 10명이 매주 금요일 영덕탁구장 등에 모여 탁구를 배운다. 각자 생업과 육아, 집안일 등으로 바빠 단원 전부가 모두 모이는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이들 중 절반 이상이 지역대회 입상을 노릴 정도로 탁구 사랑만큼은 진심이다. 특히 올해는 코로나19로 멈췄던 각종 대회가 재개될 전망이라, 더욱 욕심이 크다.

베트남에서 온 김유진(39)씨도 지난해 3월 이곳에서 탁구를 시작했다. 13년 전 한국에 온 그는 오자마자 아이를 가졌다. 시가에서 하는 건어물 장사를 돕고, 육아까지 하느라 정신없이 살았다. “바깥에 놀러 다니고 친구 만나는 걸 좋아하지만” 항상 바쁘게 일해야 했던 그에게 스포츠는 ‘사치’였다. 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만난 탁구가 이제는 빼놓을 수 없는 동반자가 됐다.

김씨는 “한국말을 더 배워서, 나도 통역을 하고 싶다”는 꿈을 꾼다. 실력을 쌓을수록 길어지는 탁구 랠리처럼, 한국말과 문화를 더 열심히 배워 한국 사회와도 더 많은 걸 주고받고 싶다. 특히 김씨는 바쁜 삶 때문에 그간 영덕 외 지역에 가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는 통역을 할 수 있게 되면 한국 이곳저곳 돌아다닐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면 11년 전과 8년 전 단 두번 방문했던 서울에도 다시 갈 생각이다.

영덕군 탁구교실 회원들이 2022년 10월21일 경북 영덕군 영덕탁구장에서 열린 제4회 다문화가족탁구대회에 참가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영덕군가족센터 제공
영덕군 탁구교실 회원들이 2022년 10월21일 경북 영덕군 영덕탁구장에서 열린 제4회 다문화가족탁구대회에 참가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영덕군가족센터 제공

벌써 8년째 운영해온 탁구교실이지만,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한국에서 이주여성은 저출생 문제와 노동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차선책으로 여겨진다. 정부 정책도 철저히 이 지점에 방점을 둔다. 대부분의 가족지원센터는, ‘가족’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주여성이 재생산 역할(취업·출산·육아)을 잘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집중한다. 이들이 가진 꿈과 열정은 부차적인 문제다 .

더욱이 일터에서 일상적으로 다른 이주민을 만나는 이주남성과 달리, 주로 결혼을 통해 한국에 온 이주여성은 각 가정마다 분리돼 있다. 남편이나 시부모가 이들이 스포츠를 위해 외출하는 것을 막는 경우도 많다. 특히 남편이 아내보다 나이가 많을 경우 이런 경향이 짙다. 여기에 여성은 스포츠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선입견까지 가세한다. 이중·삼중 굴레 속에 이주여성은 더 쉽게 스포츠로부터 배제된다.

영덕군가족센터가 센터 이용자를 대상으로 진행한 2023년 센터 요구도 조사. 영덕군 내 전체 결혼이주여성 271명 중 101명이 조사에 응했고, 이 중 22명이 탁구교실 개설을 희망했다. 영덕군가족센터 제공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여러 제약 탓에 이주여성을 위한 스포츠는 더욱 세심하고 적극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영덕 탁구교실은 하나의 모범 사례다. 이근모 부산대 교수 등은 2012년 발표한 ‘결혼이민여성의 건강증진과 문화적응을 위한 생활체육교실 활성화 방안 개발에 관한 연구’에서 △문화적 이해를 통한 홍보 △에스엔에스(SNS)를 이용한 네트워크 구축 △결혼이민여성에게 보조자 역할 부여 △셔틀버스 운행 등을 이주여성 대상 생활체육교실 활성화 방안으로 제시했는데, 이곳에선 이를 대부분 실제로 시행하고 있다.

특히 프로그램을 맡은 베트남 출신 이주여성 원지현(38) 영덕군가족센터 통번역지원사는 든든한 도우미다. 딸, 아들을 키우는 그는 누구보다 이주여성이 원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센터는 교통이 열악한 교외 지역에 사는 수강생들을 위해 통학 차량을 지원한다. 수강생의 육아 부담을 덜어주고자 아이돌봄 서비스까지도 제공한다. 매년 이뤄지는 설문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원씨가 꼼꼼하게 개선책을 연구한 결과다.

물론 한계도 있다. 지역대회에 참가해 선주민과 함께 스포츠를 즐기기도 하지만, 아직은 이주민만의 탁구교실에 머물러 있다. 19일 오전 10시께 영덕국민체육센터에서는 이주여성 탁구교실 참가자 5명과 영덕군체육회 소속 동호회원 10여명이 같은 장소에 모였다. 이들은 서로 반갑게 대화를 나눴지만, 함께 탁구를 하지는 않았다. 양쪽 사이에 실력 차이가 있기도 하지만, 아직은 함께 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는 생각이 부족한 탓이다.

영덕군체육회 탁구 동호회원이 19일 경북 영덕군 영덕국민체육센터에서 베트남 출신 이주 청소년 드엉 덕 중 끼엔에게 탁구를 가르쳐주고 있다. 이준희 기자
영덕군체육회 탁구 동호회원이 19일 경북 영덕군 영덕국민체육센터에서 베트남 출신 이주 청소년 드엉 덕 중 끼엔에게 탁구를 가르쳐주고 있다. 이준희 기자

다만 둘 사이 벽이 그리 높아 보이지는 않았다. 실제 몇몇 동호회원은 이날 이주여성, 이주 청소년에게 탁구 요령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한국 사람들과 함께 탁구 연습을 하고 싶지는 않으냐’는 질문에 윤혜린씨는 “사실 그런 생각은 못 해봤지만 그렇게 하면 좋겠다”며 “우리가 아직 잘 못하니, 많이 가르쳐주시면 좋겠다”고 했다. 말을 마친 그는 생각만으로도 좋은지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정말, 좋을 것 같다.”

글·사진 이준희 기자 givenhappy@hani.co.kr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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