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제 폭력으로 신고당해 경찰 조사를 받은 뒤 애인을 살해한 혐의를 받는 ㄱ씨가 26일 오후 경찰에 긴급체포된 후 서울 금천경찰서에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연인의 폭력을 경찰에 신고한 여성이 지구대에서 나온 지 10분 만에 동거하던 남성에게 살해당한 사건이 충격을 주는 가운데, 경찰 조처의 적절성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신고해 기분이 나빴다”고 진술한 해당 남성을 경찰은 보복살인 혐의로 27일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서울 금천경찰서(서장 최진태)는 27일 오후 금천구 시흥동에서 발생한 살인사건 브리핑을 열고 “피해자 ㄴ씨가 경찰 상담 당시 피의자 ㄱ씨의 처벌과 본인에 대해 귀가보호 조치를 원하지 않아 분리조치를 하지 않았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이별 통보를 받은 뒤 ㄴ(47)씨에게 다시 만나자고 강요하던 과정에서 폭력을 저지른 남성 ㄱ(33)씨는 전날 경찰 조사를 받은 직후 아침 7시17분 시흥동 지하상가 주차장에서 ㄴ씨를 흉기로 찔러 살해한 혐의를 받는다.
경찰은 폭력 신고를 접수한 뒤 ㄴ씨가 “연인관계이지만 결혼할 생각이 없다. 생활비도 같이 쓰지는 않으며, 한번 집을 나가면 오래 나갔다가 가끔씩 들어온다”는 진술에 근거해 사실혼 관계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가정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가정폭력처벌법)을 적용해 분리조치를 하지는 않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ㄱ씨 진술상 두 사람은 피해자 ㄴ씨의 집에서 ㄴ씨의 어머니와 함께 일주일에 1~2일은 함께 지내는 관계였다. ㄱ씨는 일정한 직업과 소득이 없이 생활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브리핑에서는 두 사람이 동거하는 사실혼 관계가 아니냐는 질문이 쏟아졌으나, 경찰 쪽은 “단순한 연인관계로 판단했다”고 선을 그었다.
경찰의 판단에 대해 전문가들의 평가도 다소 엇갈린다. 서혜진 더라이트하우스 법률사무소 변호사는 “이 사건의 경우 연인관계인지 사실혼 관계인지가 중요하지 않다. 경찰이 두 사람의 관계와 그 위험성을 어떻게 판단했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경찰의 피해자 보호조치와 관련한 불찰이 심각해 보인다”고 했다. 피해자 본인이 보호조치를 거절하는 경우는 실제로 많다고 한다. 보호조치는 전적으로 본인 동의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므로 피해자가 보호조치를 거부해도 경찰이 적극적으로 상황을 판단해 체크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선희 법무법인 혜명 변호사는 “경찰의 어려움도 이해한다. 이런 상황에서 보복범죄가 추후 일어날 가능성이 크지만 가해자에게 경고를 하거나 피해자에게 안전에 관해 언급하는 것 이상으로 조치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피해자를 보호할 제도가 미흡한 현실”이라고 말했다.
경찰 설명을 종합하면, 지난 21일 피해 여성 ㄴ씨가 ㄱ씨에게 이별 통보를 했고, ㄱ씨는 피시방에서 숙식한 것으로 조사됐다. 그러다 범행 당일인 26일 ㄱ씨는 ㄴ씨와 평소 자주 가던 시흥동의 한 피시방에서 ㄴ씨가 있는 사실을 확인하고, 데리고 나가 폭행을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후 새벽 5시40분께 ㄴ씨의 신고로 두 사람이 지구대로 간 뒤 먼저 나온 ㄱ씨가 ㄴ씨 집으로 들어간 뒤 흉기를 들고 와 피시방이 있던 상가 지하주차장에서 ㄴ씨를 기다렸다. 7시7분에 지구대에서 ㄴ씨가 조사를 받고 나왔고, 7시17분 ㄴ씨는 흉기에 수차례 찔렸다. 조사받은 지 불과 10분 뒤였다.
이에 앞서 ㄱ씨는 지구대에서 나온 직후 피해자 ㄴ씨와 통화하면서 “파주에 있는 본인의 집으로 간다”고 속인 것으로 알려졌다. ㄴ씨가 통화에서 “(시흥동 ㄴ씨) 집에 가서 당신 짐을 가져갔으면 좋겠다”고 하자 “택배로 보내달라”고 하면서 본인이 마치 택시를 타고 파주로 가는 것처럼 이야기했고, 이에 따라 ㄴ씨는 안심하고 피시방이 있는 지하주차장으로 차를 가지러 간 것으로 보인다.
경찰은 피해자 ㄴ씨가 초기 신고 때 “ㄱ씨가 ㄴ씨 집의 티브이(TV)를 부쉈다는 재물손괴와 자기 집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바꾸었다는 것, 그리고 3~4차례 팔을 잡아끈 폭행에 관해 신고했다”면서 이를 경미하다고 판단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교제 폭력 위험도를 높지 않은 쪽으로 평가했다고 설명했으나, 구체적인 위험도 점수는 확인해 주지 않았다.
ㄱ씨는 26일 오전 범행 직후 의식이 없는 ㄴ씨를 렌터카에 태우고 달아났다가 이날 오후 3시30분 경기 파주시에서 붙잡혔다. 경찰은 차량 뒷좌석에서 ㄴ씨의 주검을 발견했다. 경찰 조사에서 ㄱ씨는 애초에 시흥동의 병원에서 치료를 하려다가 다시 일산의 병원으로 목적지를 바꿨지만, 아침 9시께부터 ㄱ씨가 숨을 쉬지 않자 경기 파주로 방향을 틀었다고 진술했다.
한편, 상가 지하주차장에서 ㄱ씨의 범행 직후 광경을 목격한 행인 2명은 ㄱ씨가 “여자친구가 다쳐서 병원에 가려고 한다” “임신했다” 등의 거짓말을 듣고 신고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신고 시간에 바로 신고가 이뤄졌다면 경찰의 이른 수사와 함께 ㄴ씨의 생명을 살릴 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경찰은 오전 10시41분 주차장에 핏자국이 있다는 상가 관리인의 신고를 받고 주변에 설치된 폐회로텔레비전(CCTV)을 분석해 ㄱ씨를 용의자로 특정해 검거했다.
경찰은 27일 오후 4시30분께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보복살인 혐의로 서울남부지검에 피의자 ㄱ씨의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주검 유기 등의 혐의는 적용하지 않았다.
고경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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