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에서 선출한 민주당 몫 진실화해위원인 허상수 4.3유족회 공동대표에 대해 43년 전 판결에 대한 재심 결과를 문제 삼아 대통령실이 임명을 거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은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의 2022년 12월27일 전원위원회 모습.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국회에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위원으로 선출됐으나 50일 만에 대통령실 인사검증 과정에서 탈락한 허상수(68) 재경제주4.3희생자및피해자유족회 공동대표가 “국회투표를 통과한 사안을 대통령이 거부하는 것은 이중의 처벌이고 인격살인”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허 대표는 43년 전 자신의 노동운동에 대한 처벌 근거였던 국가보위법이 위헌이라며 1년8개월 전 재심을 청구했다가 발목이 잡혔다.
탈락사유는 43년전의 노동쟁의 단체행동 등에 따른 집행유예형과 관련한 1년8개월 전의 재심 선고유예 판결인 것으로 알려졌다. 허 대표는 1983년 처벌의 근거가 됐던 국가보위에관한특별조치법(국가보위법)이 위헌이라며 재심을 청구했다. 2021년 8월19일 재심 법원인 서울고등법원 형사10부(재판장 이재희)는 특별조치법을 위헌·무효로 판단해 원심판결을 파기했으나 선고유예 처분을 내렸다. 원심의 공소 사실 중 변조사문서행사, 건조물 침입 등은 재심 사유에 포함되지 않아 이 부분에 대한 유무죄 여부가 심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국가공무원법 33조는 “금고 이상의 형의 선고유예를 받은 경우에 그 선고유예 기간 중에 있는 자”를 결격사유자로 규정하고 있다. 재심 판결이 없었다면 이미 40년 전에 확정된 판결은 진실화해위 위원 임명에 결격사유가 되지 않았을 상황이었다. 과거 피해 회복을 위해 재심을 청구했는데 오히려 불이익을 받은 셈이다.
허 대표는 지난 16일 <한겨레>에 “탈락 사실도 <한겨레> 보도를 통해 알았는데 너무 큰 충격이다. 내가 40년 전 처벌받은 법은 언론자유와 노동3권을 완벽히 금지한 국가보안법 수준의 악법이었다. 그걸 바로잡겠다고 신청한 재심 판결 때문에 진실화해위원에서 탈락시킨 것은 나를 두 번 죽이는 일”이라고 말했다. 허 대표는 “곧 기자회견을 통해 부당함을 알리겠다”고 했다.
이에 관해 장완익 변호사(법무법인 해마루)는 “법 적용에 대단히 특이한 케이스가 발생했다”며 “공무원 임용의 결격사유를 적시한 국가공무원법 33조 3~5호를 재심 결과에도 적용하는 게 맞는지 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재심을 청구해 피고인에게 가장 불리한 것이 재심청구가 기각되는 것인데, 더 유리한 처분을 받았음에도 현실적으로 불이익을 당한다는 것이 모순”이라는 것이다. 그 모순이 형사 재심 자체의 문제인지, 국가공무원법의 결격조항이 예상하지 못해 생긴 문제인지도 판단이 필요하다고 했다.
더불어민주당 제주도당은 이날 논평을 내고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가 선출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을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탈락시킨 것은 민의를 저버린 후안무치한 행태”라며 “제주4·3에 그릇된 인식을 갖고 있는 김광동 위원장이 있는 상황에서 제주출신 위원이 제주4‧3 문제 처리 등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해 배제시키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지적했다.
오영환 민주당 원내대변인도 이날 서면브리핑에서 “허 위원은 40년 전 국가보안법 등의 판결에 대해 재심을 신청해 원심의 집행유예보다 가벼운 선고유예 형을 받았다. 그런데 대통령실은 새로운 형벌이라도 받은 양 국가공무원법상 결격사유가 존재한다며 임명을 거부했다”며 “이번 결정에 대해 심각한 유감의 뜻을 밝히며, 대통령실의 재고를 강력히 촉구한다”고 밝혔다.
앞서 14일 김광동 진실화해위원장은 <한겨레>에 “국회에서 선출된 진실화해위원 6명 중 1명이 대통령실 인사검증 과정에서 국가공무원법 규정상 결격사유가 확인됐다”고 밝힌 바 있다. 허 대표는 이상훈 변호사(상임), 이상희 법무법인 지향 변호사, 오동석 아주대 교수와 함께 더불어민주당 몫 진실화해위원으로 추천됐고, 지난 2월24일 국회에서 선출됐다. 허 대표 선출안의 경우 269명의 의원 중 224명이 찬성을 했고 반대 30명, 기권 15명이었다.
허 대표는 중앙국제법률특허사무소 직원으로 일하던 1980년 4월17일부터 일주일간 서울 중구 태평로에 있는 옛 대한일보 빌딩 13층 사무실에서 전국연합노동조합 서울지역지부 중앙국제법률특허분회 분회장으로서 40여명의 노조원들과 집단농성을 해 국가보위법을 위반한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져 1981년 6월 1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1년 뒤 1982년 6월 항소심에서 징역 8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고 1983년 4월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당시 농성을 벌인 다른 노조원들은 모두 복직했으나 허상수 대표만 1980년 10월 해고가 확정돼 직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유신선포 전인 1971년 12월27일 제정된 국가보위법은 대통령에게 국회의 동의 없이도 국가비상사태 선포권을 부여하고, 노동기본권 등 민주주의 기본요건을 철저하게 침해한 법률로 1981년 12월17일 폐지됐다.
허상수 대표가 노조를 결성한 중앙국제법률특허사무소의 사무실 폐쇄와 해고통보 소식을 전하는 <동아일보> 1975년 4월17일자 기사.
1983년 원심의 공소사실을 살펴보면 허 대표가 재심에서 선고유예를 받게 된 빌미가 된 변조사문서행사와 건조물 침입죄는 각각 노조 해체 서면결의서의 문장을 일부 바꾼 것과 해고 뒤 사무실에 침입하였다는 것 때문에 인정된 혐의였다. 허 대표는 <한겨레>에 “변조사문서행사는 노조해체서면결의서 표지에 내 이름을 넣어 바꾼 것을 문제삼은 것이고, 건조물 침입은 개인 사물을 가지러 사무실에 갔을 때 처음에는 통과시키더니 나중에 광화문 파출소 순경을 불러 나를 데리고 가 엮은 것”이라고 말했다.
1980년 4월 중앙국제법률특허사무소의 노동쟁의는 당시 언론에서도 논란거리였다. 농성 당일인 1980년 4월17일 <동아일보>를 보면, 이병호(1926~2016) 당시 중앙국제법률특허사무소 소장은 노조 분회가 생기자마자 노조를 인정할 수 없다며 건강상의 이유를 내세워 일방적으로 법률사무소 폐소를 발표한 뒤 노조원들에게 해고를 통보했다. 중앙국제법률특허사무소는 1990년대에 변호사와 변리사 외에 화학·전기·약품 등을 전공한 전문직 직원 350명을 거느려 아시아 최대 법률사무소로 불린 곳이다. 이병호 소장은 6개월 뒤인 1980년 10월28일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 81명 중 하나로 대통령 전두환씨에 의해 임명됐다. 국가보위입법회의는 당시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가 국회 기능을 마비시키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한 뒤 국회 입법기능을 대행할 목적으로 확대·개편한 입법기관이다. 이병호씨는 이후 1992년 대한정의당을 창당해 제14대 대선 후보로 출마하기도 했다.
고경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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