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의 한 대학병원에서 정신건강임상심리사 수련생(레지던트)으로 근무 중인 ㄱ씨는 일주일에 많게는 100시간 가까이 일한다. 근로 계약서상 근로시간은 하루 8시간, 주 40시간(연장근로시간 포함 52시간)이지만, 이는 서류상 숫자에 불과하다. 외견상 ‘근로자’이지만 병원 안에선 ‘수련생’ 신분인 탓에 무급 초과노동이 암묵적으로 용인된다. ㄱ씨는 “잠을 제대로 못 자니 이렇게 살 바엔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며 “주 69시간만 일하면 소원이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11일 <한겨레>와 만난 정신건강임상심리사 수련생들은 수련을 빙자한 ‘초과노동’ 관행에 고통을 호소했다. 의료기관에서 심리평가 및 치료를 수행하는 정신건강임상심리사 1급 자격을 얻으려면, 심리학 석사학위를 취득한 뒤 병원 등에서 3년간 수련을 받아야 한다. 자격증이 절박한 ‘을’인 수련생들은 불합리한 초과노동에도 따를 수밖에 없다고 한다. ㄱ씨처럼 3년 과정의 수련을 받는 정신건강임상심리사 수련생만 지난 3월 기준 230명이다.
수련생들의 설명을 들어보면, 이들의 업무는 크게 심리 검사 및 면담→보고서 작성→슈퍼비전(상급자 검토) 차례로 이뤄진다. 하지만 실제 근로시간 대부분은 밀려드는 검사를 소화하는 데 쓰이고, 마무리하지 못한 나머지 업무는 자발적 야근과 주말 근무로 대신해야 하는 구조다.
올해 서울의 한 병원에서 수련생활을 끝낸 ㄴ씨는 “퇴근 시간으로 규정된 오후 6시까지 검사를 진행하다보니, 일과 중에 보고서를 작성할 시간이 거의 없다”며 “늦어지면 자정까지 병원에서 일했다. 집이 먼 경우 병원에서 밤을 새우는 동료들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서울의 한 의료기관에서 수련하는 ㄷ씨도 “근로계약서에는 아침 8시30분 출근, 오후 5시30분 퇴근이지만 실제로는 ‘새벽 6시 출근 자정 이후 퇴근’의 삶을 반복하고 있다”며 “병원 안에서도 수련생들의 노동환경에 대해 잘 모른다”고 말했다. 수련생들이 모인 인터넷 커뮤니티에도 “인간적인 삶은 기대할 수 없는 매일이 괴롭고 힘들다” “과로로 왜 사람이 죽나 이해가 된다” 등 고충을 호소하는 글이 줄을 이었다.
근로계약서를 작성한 근로자지만 ‘수련생’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법정 근로시간은 수시로 무시된다. ㄴ씨는 “고용하는 입장에서 ‘배우면서 돈까지 받는데 좋은 거 아니냐’는 식으로 나오니 문제 제기가 어렵다. 근로계약서를 쓰기 시작한 것도 얼마 전의 일”이라고 말했다.
처우도 열악하다. 수련생들의 임금 수준은 수련기관별로 천차만별이지만 대부분 실제 근로시간에 견줘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게 중론이다. 불과 몇해 전까지만 해도 무급 수련생을 채용하는 서울의 대학병원이 있었을 정도다. ㄷ씨는 “수련생 한명 뽑는데 100명 가까이 몰리다 보니, 그런 절박감을 이용해 노동착취를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 등 관계 당국이 ‘수련’과 ‘근로’의 개념을 명확히 구분하고 있는 데 반해 실제 현장에선 경계가 모호하다 보니, 되레 장시간 노동을 부추기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도 문제다. 복지부 산하 국립정신건강센터의 지침에는 “수련기관이 수련시간 이외에 근무를 시킬 경우 별도의 근로계약서를 작성해야 한다”고 돼 있지만 수련생들은 “근무가 곧 수련인데, 계속 일하라는 말밖에 더 되냐”고 입을 모은다.
복지부 정신건강정책과 관계자는 “수련과 근로를 병행할 경우 표준계약서 형태의 수련계약서와 근로계약서를 각각 작성하도록 지침을 세웠다”고 설명했다. 수련계약서에는 세부적인 수련 여건이 담겨있지만 <한겨레> 인터뷰에 응한 수련생 중 수련계약서를 작성했다고 답한 이는 없었다. 이 관계자는 정신건강임상심리사 수련생들의 초장기 노동 관행에 대해 “처음 들어본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근로계약 범위를 벗어난 초과노동은 “명백한 불법”이라고 지적한다. 직장갑질 119 소속 최혜인 노무사는 “수련생이라 하더라도 근로자로 전제하고 계약을 맺은 것이기 때문에, 근로기준법에 따라 연장근로수당, 야근수당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심우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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