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정년 퇴직을 앞둔 윤정민 전국금속노동조합 에스엔티(SNT)중공업지회 지회장이 지난달 29일 경남 창원시 에스엔티 중공업 본사를 배경으로 사진찍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2023년, 예순살 윤정민은 공장을 떠난다. 스물한살 최예린은 공장을 떠났다. 떠나며 질문을 남겼다. 왜 한국은 소수의 인재만이 아닌, 다수 노동자가 주인공인 성공을 꿈꾸지 못하는가. <한겨레>는 세 차례에 걸쳐 평범한 노동자의 숙련과 가치를 놓친 혁신과 경제 성장이 개인과 한국 사회에 남긴 불안과 경고를 전한다.
국내총생산 1480억달러(1987년, 명목)에서 1조8100억달러(2021년)에 이르기까지. 고난을 헤치고 혁신을 거듭하며 성장해온 것 같은 한국 산업은 적잖은 진통도 남겼다. 그 가운데
윤정민과 에스엔티(SNT)중공업 동료들이 겪어온 ‘평범한 노동자의 불안’이 있다.
소수 인재가 아닌 노동자는 한국의 효율적인 성장을 특징짓는 숙련을 배제하는 자동화, 외주화, 세계화 속에 더 낮은 임금의 노동자나 기계로 대체되는 경험을 해왔다. 혹은 대체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 놓였다. 윤홍식 인하대 교수는 혁신에 있어 평범한 노동자의 중요성을 놓쳐 온 한국 산업의 궤적이 “성공과 불안이 한 몸처럼 붙어 있는 한국 사회를 만든 배경”이라고 말했다.
노동자가 불안한 공장을 만들어온 한국 산업사의 주요 사건들을 정리했다. 외부 충격이나 경기 흐름 앞에 정부·기업·노동의 이해와 갈등이 복잡하게 얽힌 선택의 결과물이다.
3저 호황 시기인 1986~1988년 두자릿수 경제성장이 이어졌다. 1987년 민주화와 노동자 대투쟁으로 그 수혜는 노동자에게도 돌아갔다. 개발독재로 생산성에 견줘 임금 상승률이 낮았던 노동자들은 1988~1990년 매년 전년 대비 10~18%의 실질 임금 상승(제조업 상용직 기준)을 이뤘다. 노동조합 조직률은 1989년 19.8%로 정점에 이르렀다. 민주국가에서 경제성장이 노동자 조직 확대로 이어지는 건 자연스럽다. 특히 제조업 노동자는 동질·보편적이라 조직이 쉽다. 서구 사회가 1960년대 경험했던 것처럼 노동조합과 자본, 정부가 서로를 견제하고 타협하며 ‘자본주의 황금기’를 만들 가능성이 한국 역사에서 싹텄다.
그러나 이 경로는 생략됐다. 한국의 제조업 노동자 비중은 28%(1989년)를 정점으로 가파르게 감소해 현재 16% 수준이다. 제조업 고용 비중이 20% 밑으로 떨어지는 데 단 11년이 걸렸다. 독일(40년)이나 일본(28년)처럼 공장 노동자가 ‘장인’ 같은 숙련을 키울 시간도, 정치 세력이 될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대신 서비스업 중심으로 고용구조가 변했다. 서비스업 노동자 상당수는 저임금인데다 불안정해 사회보험의 사각지대에 놓였다. 안정적이며 보편적인 제조업 노동자를 기반으로 노동, 정치, 복지 구조를 만들지 못한 채 이뤄진 한국 고용의 서비스화를 ‘조숙한 탈산업화’라고도 부른다.
경제 호황은 1990년 들어 저물었다. 경기 하강을 극복하기 위한 ‘신경영 운동’이 공장마다 불붙었다. 1994년 기준 300대 기업의 85.1%가 신경영 운동을 추진했다는 집계도 있다. 한국에서 신경영 운동은 결과적으로 노동자의 숙련을 배제하는 자동화·외주화와 차등적 승진 제도 등을 통한 개인별 노무관리의 성격을 띠게 됐다.
애초 의도는 꼭 그렇지 않았다. 당시 최고의 생산 방식으로 여겼던 일본식을 도입하고자 했다. 컨베이어벨트에서 무의미한 노동을 반복하는 대신, 자동화와 함께 노동자의 자율성을 높이는 방식이다. 윤정민의 공장에는 ‘혁신은 위로부터 실천은 나로부터’ 따위의 구호가 내걸리기도 했다.
문제는 당시 기업과 정부, 노동자가 격하게 갈등하고 있었다는 데 있다. 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노조를 억압하는 당시 기업과 정부의 분위기 속에 노사 갈등이 격렬했고, 노동자들에게 ‘생산성을 기업과 함께 높인다’는 생각은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1990년 민주노조를 지키려고 분신한 윤정민의 동료 이영일 열사의 영결식이 열렸다. ‘통일-S&T 중공업 노조운동 30년사 끝나지 않은 저항’ 저자 김정호 제공.
결국 자동화와 개인별 노무관리만 남아 한국식 공장이 만들어졌다. 1990년 한국의 노동자 10만명당 로봇 밀도는 6.1로 일본(182.7), 독일(30.9)에 견줘 확연히 적었다. 2021년 한국은 노동자 10만명당 1천대의 산업용 로봇을 가진 세계 최고의 로봇 활용 국가다. 자동화가 사람을 대체하는 방식으로만 집중되며 제조업 고용 계수(생산량 10억원을 늘릴 때 필요한 신규 노동자 수)는 1995년 9.77에서 2019년 1.88까지 낮아졌다. 제조업은 로봇을 다루고 공정을 관리하는 소수의 고급 엔지니어와, 기계를 보조하는 데 그치는 저숙련 생산직 노동자로 양극화됐다. 그 사이 가교 구실을 하며 생산직 노동자가 목표로 삼을 수 있었던 준전문가인 기술공(테크니션) 같은 직종은 직업 분류표에서도 사라졌다.
외환위기로 대기업, 제조업, 남성 노동자의 자리도 불안해졌다. 한국노동연구원이 경인 지역 1400개, 전국 1443개 업체를 조사한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 상황을 보면, 1998년 정리해고·명예퇴직·조기퇴직을 실시한 기업은 54.6%였다. 이후 경기 회복 국면에서는 비정규직·하청화가 가속화됐다.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 대체한 기업이 1999년 7.3%에서 2000년 14.6%로, 외주·하청을 확대한 기업은 1999년 3.1%에서 2000년 9.3%로 급증했다. 그 시절 윤정민의 공장에 나붙었던 ‘소사장 모집 공고’ 또한, 2000년 16.1% 기업이 실시할 정도로 일반적이었다. 소사장제는 관리직 생산 노동자와 거기 속한 노동자를 분사시켜서 하청 기업으로 만드는 형태다.
대우그룹 노동조합 협의회 노동자들이 1997년 7월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전국 금속노동자 결의대회에서 정리해고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생존을 위협받는 정규직은 ‘각자도생’을 강화했다. 2001년 금속노조가 창립되며 산업별 노조로서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 문제를 아우르는 사회적 차원의 문제 제기를 시도했지만 한계에 부딪혔다. 기업 쪽에서 중앙 교섭을 거부하기도 했지만, 조합원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삼은 대기업 노조들이 산업별 연대에 소극적인 탓도 있었다.
국제분업은 중국이 세계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2000년대 만개했다. 이를 통해 ‘조립형 공업화’ ‘모듈형 공업화’ 등으로 부르는 한국형 성장 공식이 완전히 자리잡았다. 노동자의 손기술이 필요한 소재·부품은 일본·독일 등에서 수입한 뒤 이를 자동화된 기계와 단순노동으로 조립해 수출했다. 저임금을 노린 중국으로의 공장 이전도 활발했다. 한국 수출품 가운데 소재·부품 수입 등 해외 투입 요소가 차지하는 비중은 1995년 27.4%에서 2011년 47%로 커졌다. 이는 중계 무역 국가인 싱가포르 수준으로, G7 국가들보다 10%포인트 이상 높다.
국제분업 속에서 한국은 대기업의 설비 투자와 생산 공정을 효율화하는 엔지니어의 능력에서 비교우위를 점했다. 각국의 기계와 부품, 저렴한 인력을 사 모으고 재배치해 발 빠르게 제품을 내놓았다. 예컨대 현대차의 ‘기민한 생산 방식’은 “문제를 즉시 발견해 신속하게 반응한다. 속도가 경쟁우위다”(<포천>, 2010년) 같은 찬사를 듣기도 했다.
다만 이는 리스크였다. 정준호 강원대 교수는 “독보적인 원천 기술이 적은 한국 제조업의 경우 국제분업에 대한 통제 능력이 약하고, 이 때문에 세계화의 진전이 멈추는 순간 어려움을 겪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2023년 한국의 공장 노동은 ‘기피 업종’이거나 ‘신의 직장’이 됐다. 소규모 하청 업체 노동자의 최저임금과 대기업 대공장 정규직의 고연봉이 공존한다. 대공장 정규직 대부분은 곧 정년을 맞는다. 기업은 어느 쪽에서도 생산직의 높은 숙련을 장려하지 않는다.
박명준 선임연구위원은 “현장 노동자의 숙련은 제조업의 중장기적인 경쟁력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대기업과 그 노동자들은 자동화와 함께 현장 노동자의 경험·감·소통능력 등 숙련의 다양한 측면을 계발하는 데 사실상 실패했고, 중소기업은 수직 구조 속에 성장이 정체돼 노동자 숙련을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고 말했다.
이는 단지 제조업 경쟁력을 넘어 한국 사회의 전반적인 불안과 갈등의 배경으로 지목된다. 소수 인재에 집중된 생산과 시장 분배는 양극화와 치열한 경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정준호 교수는 “첨단과 인재도 중요하지만 한 사회의 안정성을 담보하는 보편적인 중간층을 생산 과정에 가능한 한 많이 포용하는 비전이 더욱 필요하다”며 “생산에서는 소수에 의한 극단적 효율을 추구하고 이를 복지로 추후에 만회하는 방식은 복지마저 ‘시혜’로 인식하게 만들어 사회적 갈등을 키운다”고 말했다.
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
※참고문헌: <한국 복지 국가의 기원과 궤적>(윤홍식), <한국 노동시장의 해부>(요코타 노부코), <한국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정준호 외), <한국 제조업의 노동력 활용구조와 발전과제>(한국노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