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 희생자와 유가족의 이야기를 차례로 싣습니다. <한겨레>와 <한겨레21>은 우리가 지켰어야 할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것이 사라진 이후 가족의 삶은 어떠한지, 유가족이 알고 싶은 진실이 무엇인지 기록할 예정입니다. 못다 한 이야기를 들려줄 유가족의 연락을 기다립니다. 전자우편
bonge@hani.co.kr 또는 <한겨레21> 독자 소통 휴대전화(010-7510-2154).
“누나, 용산에 살자. 엄마랑 아빠랑 형이랑.”
전북 김제에서 20대까지 살았던 형주는 흩어져 사는 가족이 ‘서울’에 모여 사는 꿈을 품었다. 삼 남매의 막내지만 부모와 누나, 형과 한집에서 산 기간은 34년 삶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고등학생 때 어머니는 형과 서울로 가 청량리 청과물시장에서 식당을 열었다. 세 살 터울인 형은 지적장애가 있어 어머니의 보살핌이 필요했다. 누나 서이현(40)씨도 직장을 따라 전북 전주에 정착했다. 운수업 하는 아버지와 단둘이 김제에 살던 형주는 30대 초반, 어머니 일을 도우러 서울로 왔다.
그 뒤 버릇처럼 “용산에 집을 사면 좋겠다”고 했다. 서울의 중심에 놓여 정갈한 거리, 재밌는 골목이 많은 용산을 형주는 좋아했다. 참사 전날(10월28일)에도 핼러윈으로 들뜬 이태원 거리를 그는 구경했다. “그날 거기에 가지 말았다면” 하면서도, 좋아하던 곳에서 세상을 떠난 형주를 생각하면 가족은 마음이 미어진다.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형주는 기계 다루길 좋아했다. 어릴 때부터 가전제품을 분해했다가 조립하는 걸 즐겼다. 따로 사는 가족들의 텔레비전 연결은 물론이고 인터넷, 휴대전화 문제도 모두 그가 해결했다. 김제에서 홀로 지내는 70대 아버지를 위해 스마트폰 원격제어로 애플리케이션(앱)을 설치하고 스마트폰 다루는 법을 세세히 알려주기도 했다.
그러나 취업을 앞두고 고민이 많던 20대의 형주는 움츠러든 날이 많았다. 가족이 흩어진 고등학교 때부터 내향적으로 성격이 변하고 말이 없어졌다. 대학을 졸업하고 공무원시험 준비를 몇 년 더 했지만 결실은 보지 못한 채 20대가 지났다. 그에게
서울 생활은 전환점이 됐다. “일당 줄 테니 오라”는 어머니의 다그침에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휴일이면 도심을 쏘다니며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서울사람’이 됐다. 종로 거리와 반포 한강공원, 명동성당 풍경이 그의 휴대전화에 가득하다.
사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많아졌다. 또래들처럼 부동산, 경매, 주식 용어를 공부하며 재테크에 나섰다. 휴대전화 메모장엔 각종 경제 용어를 빼곡히 적었다. 처음 모아둔 돈 200만원을 1천만원까지 불렸을 땐 위축된 모습이 사라지고 자신감이 생기는 듯했다. “엄마, 여행 가고 싶은 곳 없어? 누나, 필요한 거 있으면 내가 사줄게”라며 웃는 날이 많아졌다.
형주가 태어난 1988년, 아버지는 서른아홉이었다. 늦둥이를 끔찍이 아낀 아버지는 형주와 가장 오래 살았다. 아버지는 축제에 함께 간 형주, 매일 영상통화를 하던 형주, 호두과자를 입에 넣어주던 형주를 되뇐다. “입관하기 전에 머리카락을 조금 잘라달라고 했어요. 아들은 없어도 그건 내가 가질 수 있으니까… 보고 싶을 때마다 우리 아들 머리카락을 만져봐요.”
“다음엔 꼭 같이 놀자 했는데 혼자 외롭게…”
형주는 장애가 있는 형의 외로움을 알아주는 형 같은 동생이었다. 여섯 살 터울인 누나도 의지할 수 있는 친구 같은 동생이었다. 형주가 서울로 올라오면서 자주 뭉친 삼 남매는 종로 부암동 석파정, 스케이트장, 한강공원을 누볐다. 10월 한강 불꽃축제 때는 형주가 형과 누나의 유람선 자리를 예약했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 형주만 배에 올랐다. “11월엔 청와대를 가려 했는데 비가 와서 미루고… 혼자 외롭게 간 것 같아서 마음이 너무 아파요.” 누나는 울음을 참으며 말했다.
서울에서 같은 방을 쓰고 함께 잠을 잤던 형은 형주 없는 집에서 약을 먹지 않으면 잠들지 못한다. 참사가 일어나기 전날 밤, 형주는 형에게
말했다. “형, 부모님 돌아가시면 나랑 같이 살자.” 형주를 보내고 온 날, 형은 누나에게 말했다. “이 세상에 나 혼자인 것 같아. 형주 없이 살 자신이 없어.”
그날, 형주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고 직감한 이도 형이었다. 형이 형주와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어머니와 누나에게 알렸다. 저녁 7시, 형주가 형에게 ‘사람 엄청 많다. 덥다’고 보낸 카카오톡 메시지가 마지막이었다. 새벽에 누나는 서울로 달려갔지만 자고 있을 아버지에겐 연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아버지가 먼저 전화할 때까지 형주를 찾지 못했다.
동행인이 없어 형주의 행방을 찾기 더 어려웠다. “할 수 있는 게 뉴스 보는 것밖에 없었어요. 아무리 봐도 희생자나 생존자 명단이 안 나오는 거예요. 새벽 내내 고통 속에서 여기저기 찾으러 다니고. 개별 연락을 한다고만 하니 무작정 기다린 거예요.”
그날 새벽 가족은 순천향대병원과 용산경찰서, 한남동 주민센터를 미친 듯 오갔다. “순천향대병원에 주검이 많이 갔다는 얘기를 엄마가 기자한테 들었어요. 그러다가 (원효로) 체육관으로 주검을 옮긴다는 뉴스가 나오고. 근데 다른 기자가 거기서 또 사람을 옮겼다고 하고.” 뉴스로, 현장 기자의 말로 드문드문 정보를 얻었을 뿐이다. “유족들이 우왕좌왕하고 다른 희생자 유족을 찾을 수도 없어서 컨트롤타워 같은 건 없느냐고 경찰에 물어봤어요. 그런 건 없다고, 그냥 기다리라는 거예요.” 누나가 말했다.
오전 11시. 형주의 생사를 알지 못한 채 한남동 주민센터에서 기다리던 누나가 직원에게 거세게 항의한 뒤에야 형주가 동국대학교 일산병원에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하지만 병원은 “서형주라는 환자는 없다”고 했다. 주민센터는 “현재 자료는 (피해자) 이름과 병원명뿐이다. 생사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시간이 더 지나서야 형주의 사망 사실을 주민센터가 알려줬다.
10월30일 오후 2시가 돼서야 형주는 가족 품에 안겼다. 형주가
어떻게 일산으로 옮겨졌는지, 구조 당시 어떤 응급조처를 받았는지, 언제 숨졌는지 등도 모른 채 가족은 장례를 치렀다. 장례 마지막 날, 대통령 조화에 걸린 ‘윤석열 대통령’이라는 이름띠를 뜯어내 버렸다.
장례 마지막 날, ‘윤석열 대통령’ 이름띠 뜯어내
슬픔을 나눌 다른 유가족들을 찾아보려 했지만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변호사를 구하며 수소문한 끝에 유족 모임을 알게 됐고, 가족은 멈춰버린 일상에서 한 걸음 나왔다. 형주 가족은 ‘10·29 이태원참사 유가족협의회’에 들어갔다. “서울에는 형주와 함께한 추억이 너무 많다”며 외출을 꺼리던 어머니는 유족 모임에 나가고 국회 국정조사특별위원회 위원들과 면담했다. 참사 이후 서울에 머무는 아버지는 12월10일 유가족협의회 창립 때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그날 밤 그렇게 아들딸들을 살려달라고 했는데 하나같이 약속이라도 한 듯 왜 대응을 안 했는지… 분통이 터집니다. 왜 그날 밤은 그렇게 무능했습니까. 원통합니다. 분합니다.”
장예지 기자
penj@hani.co.kr
※ 2차 피해 우려가 있어 이 기사의 댓글 창을 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