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이 14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 들어가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을 수사하는 검찰은 박 전 원장이 서훈 전 국가안보실장의 지시를 받아 2020년 9월 당시 해양수산부 공무원 이대준씨가 북한군에 의해 피살된 사실이 담겨 있는 첩보 보고서를 삭제했다는 의혹에 대해 이날 박 전 원장을 불러 조사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서해 공무원 피살 관련 첩보 삭제 의혹으로 검찰 조사를 받은 박지원(80) 전 국가정보원장이 ‘국정원 서버에서는 삭제가 불가능하다’는 핵심 방어 논리를 거둬들이면서, 과거 검찰 수사를 여러 차례 받았던 ‘정치 9단’과 서울중앙지검 수사팀의 막판 수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박 전 원장은 지난 14일 밤 검찰 조사를 마친 뒤 기자들과 만나 “국정원에는 삭제라는 게 원천적으로 존재하지 못한다고 얘기했었는데, 오늘 (조사에서) 보니까 삭제가 되더라”고 말했다. 국정원 서버에서 첩보가 삭제되는지 여부는 지난 7월 국정원이 박 전 원장을 고발했을 때부터 논란이 됐던 사안이다. 고발 직후부터 박 전 원장은 서버에 저장된 자료는 삭제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며 자신에게 적용된 첩보 삭제 혐의가 성립할 수 없다고 말해왔다. 그런데 첫 검찰 조사 뒤 혐의를 부인하는 핵심 근거를 허문 것이다.
박 전 원장은 15일 아침 <시비에스(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에서도 “(삭제가 된다는 것을) 저도 처음 알았다. (국정원 직원들이) 피시에 쓰면 서버에 다 저장이 되니까 삭제가 안된다고 알았고, 그렇게 언론과 국회에도 답변을 했다. 그런데 어제 (검찰에서) 보니 삭제 또는 개정, 고침이 가능하더라”고 말했다.
같은 혐의를 받는 서욱 전 국방부 장관을 구속수사했던 검찰로서는 박 전 원장에 대해서도 구속영장 청구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는데, 박 전 원장이 이를 염두에 두고 검찰과 법원을 향해 ‘인정할 것은 인정한다’는 자세를 취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다만 박 전 원장은 서버에서 삭제가 가능하다는 것과 첩보 삭제 지시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 서훈 국가안보실장, 청와대로부터 어떠한 삭제 지시를 받은 적도 없고, 제가 국정원 어떤 직원에게도 삭제를 지시한 적도 없다”고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한 부장검사는 “검찰이 자료가 삭제됐다는 물증을 제시한 것으로 보이는 상황에서 과거 입장을 유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자료 삭제 진실 공방에서 발을 빼면서도 삭제를 지시한 적은 없다고 대응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검사장 출신 변호사는 “박 전 원장이 ‘삭제가 불가능하다’는 주장은 접었지만 ‘지시한 바는 없다’고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 박 전 원장의 혐의를 가르는 것은 ‘삭제를 지시했는지’ 여부”라고 말했다.
검찰은 2020년 9월23일 새벽 박 전 원장이 노은채 당시 국정원 비서실장에게 해양수산부 공무원 고 이대준씨 피살 관련 ‘국정원 내 통신첩보 관련 자료 일체 삭제’를 지시했다고 보고 있다. 박 전 원장의 ‘삭제 지시’ 배경에 이 사건 ‘최종 책임자’라는 서훈 전 국가안보실장의 ‘은폐 결정’이 있다는 게 검찰 시각이다. 박 전 원장이 입장을 바꾼 데 대해 이날 서울중앙지검 관계자는 “수사팀이 사안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입장에는 변경된 게 없다”고 했다.
검찰은 박 전 원장을 끝으로 서해 사건 주요 관계자에 대한 조사를 일단락한 상태다. 문재인 전 대통령 조사까지는 이뤄지지 않으리라는 분석이 많다. 문 전 대통령 조사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검찰 관계자는 “‘전직 대통령은 그 재임 기간 국가와 국민을 대표한 분이라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검찰총장 말로 갈음하겠다”고 말했다.
전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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