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 닷새째인 2일 오전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 들머리에 마련된 추모 공간에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촛불이 켜져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주말 저녁 서울에서 축제를 즐기며 골목을 걷던 사람 156명이 인파에 눌리고 깔려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한동안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충격으로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 이내 정신이 들면 고통 속에 죽어갔을 그들의 영혼이 안식을 얻기를 빌어본다. 그리고 겨우 묻는다. 왜 죽어야 했을까? 왜 그 좁은 곳에 그 많은 사람이 들어가게 됐을까?
이태원 참사 이틀 뒤인 지난 월요일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지금은 추궁의 시간이 아닌 추모의 시간입니다”라고 굳이 운을 맞춰 말했을 때 그도 아마 이런 순서를 떠올렸을 것이다. 거대한 슬픔이 모두를 덮치는 중에 잘잘못을 가리느라 싸우기보다는 먼저 희생자들에게 예를 갖추고 죽음을 애도하자는 뜻이었을 테다. 그러나 추모의 시간과 추궁의 시간을 임의로 규정하고 가르는 것이야말로 참사 직후 권력자들이 상황을 통제하는 방식이다. 비탄에 빠진 공동체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지정하는 것, 그 지침을 벗어나는 자발적 행동을 부적절하고 불경하다고 몰아세우는 것, 재난 권력은 그렇게 작동한다.
정진석 위원장의 우려와 달리 추궁의 시간은 그저 손가락질하고 고함치는 시간이 아니다. 가장 맑은 눈과 서늘한 마음으로 참사에 관해 묻고 답하는 시간이다. 모든 참사에서 우리는 같은 질문을 만난다. 죽음을 막을 수는 없었는가? “그래, 막을 수 없었다”라고 답하기 위해서든 “아니, 막을 수 있었다”라고 답하기 위해서든 우리는 가장 날카롭게 캐묻고 따져야 한다. 그렇게 얻은 설명을 희생자에게, 그 가족과 친구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내놓아야 한다. 이것을 하지 못하면 우리는 제대로 추모할 수 없다. 그 설명을 납득하지 못하면 누구도 제대로 추모할 수 없다.
이태원 참사와 비슷한 사례로 1989년 영국 힐즈버러 경기장에서 축구 관객 97명이 압사한 사건이 거론된다. 1991년 조사위원회가 일부 극렬 팬들 때문에 발생한 사고라고 결론 내렸지만 이를 납득하지 못한 유가족들의 오랜 노력 끝에 2012년에 독립조사위원회가 재조사 결과를 내놓았고, 여기에서 경찰과 정부의 책임을 지목했다는 것이다. 마침내 진실을 밝혀냈다니 다행스럽고 뜻깊은 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힐즈버러 얘기를 듣고서 “진실은 언젠가 드러나기 마련이다”라는 지당한 깨달음을 얻을 때가 아니다. 이태원 참사를 골목 보행사고 정도로 처리하고 싶은 이들은 힐즈버러에서 일단 한두해만 버티면 20년 동안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전략을 배울 것이다. 20년 넘게 걸린 힐즈버러 참사 조사의 교훈은 진실이 지연되는 만큼 고통이 커진다는 사실이다. 이태원 희생자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20년 동안 싸워야 한다고 부추길 수는 없다.
우리는 이미 8년의 기다림이 세월호 유가족에게 어떤 상처를 남기는지 목격했다. 올해 9월 초에 발간된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종합보고서는 “한국 사회가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에 지지부진 시간을 끄는 동안 피해자들은 가족의 죽음을 온전히 슬퍼할 시간조차 갖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피해자들에게서 슬픔의 시간, 추모의 시간을 빼앗아 그들을 거리로 내몰았고 8년 동안 기다리라고만 했다.” 추궁의 시간을 지연하거나 축소할 때 우리는 결국 참사 희생자의 가족과 친구로부터 슬픔과 추모의 시간마저 박탈하고 만다. 이태원 희생자의 가족과 친구들이 깊이 슬퍼하고 추모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그 곁에 서서 대신 물어야 한다. 추궁해야 한다.
참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추궁은 법을 따지되 법 테두리 안에 갇히지 않는다. 세세한 법적 쟁점에만 몰두하는 추궁은 오히려 책임져야 할 이들이 빠져나갈 구멍을 허용할 수 있다. 법을 어기지 않았으니 추궁하지 말라, 지켜야 할 법 자체가 없었으니 추궁하지 말라는 주장이 벌써 나온다. 이는 추모하기 위해 하는 추궁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말이다. 우리는 매뉴얼을 추궁하고 시스템을 추궁할 것이다. 또 우리는 공직자의 상식을 추궁하고 권력자의 도덕을 추궁할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대하는 태도를 추궁할 것이다. 말뜻 그대로 끈질기게 물어서 답을 들을 것이다. 그 답이 충분하지 않다면 우리는 또 추궁해야 할 것이다.
8년 전 세월호가 침몰한 직후 누구나 한번씩 입에 올렸던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다짐이 이번에는 그만큼 들리지 않는다. 한 참사가 채 잊히기 전에 다음 참사가 발생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까. 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음을 경험했기 때문일까. 단지 죽음의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의 이유를 잊지 않아야 우리는 참사를 사회적 기록으로 남길 수 있다. 추궁은 참사의 기억을 써 내려가는 일이다. 희생자의 수와 나이를 기억하는 동시에 우리가 집요하게 추궁해야 하는 것은 그들이 좁은 골목에 갇혀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에 작용했던 모든 원인이다. 세월호에 대해 정확히 무엇을 잊지 않아야 하는지 정리하는 데에 8년 넘게 걸렸다. 이제 그렇게 흘려보낼 시간이 없다.
우리는 좁고 위험한 곳에 몰려드는 철없는 젊은이들 때문에 안전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지난 참사를 제대로 묻고 따지고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안전하지 못하다. 우리는 아무도 모이지 않고 아무도 노래하지 않고 아무도 춤추지 않는 상태의 안전을 원하지 않는다. 누구든 거리를 걷고, 백화점에 가고, 배를 타고 수학여행을 떠나는 일상에서 안전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축제를 막고 공연을 막고 수학여행을 막아서 안전해질 수 없으며, 세월호 참사를 추궁하고 이태원 참사를 추궁함으로써 겨우 조금이라도 더 안전해질 수 있다. 세월호를 해상 교통사고라고 부르기를 거부했듯이 이태원을 골목 보행사고라고 부르기를 거부하는 것, 이 참사에 합당한 이름과 의미를 붙여주는 것, 모두 끈질긴 물음과 기록을 통해서만 할 수 있다. 세월호에 탄 학생들에게 잘못이 없었듯 이태원에 모인 젊은이들에게 잘못이 없었음을 우리는 굳이 말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추모하면서 추궁하지 않을 수 없고, 추궁하면서 추모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각자의 신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몸을 웅크려 추모의 기도를 올리면서도, 우리가 모두 가진 이성을 꼿꼿이 펴서 추궁을 시작해야 한다. 지금은 추모의 시간이자 추궁의 시간이다.
전치형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