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의 한 항구에 입항한 러시아 국적의 요트. 안호영 의원실 제공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달 21일 러시아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부분적 동원령’을 내린 뒤, 동해안을 통해 한국 입국을 시도하는 러시아인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2018년 ‘예멘 난민’ 이후 4년여 만의 난민 행렬을 바라보는 정부와 시민사회의 시선에 상당한 온도차가 감지된다.
17일 <한겨레>가 더불어민주당 안호영 의원실을 통해 받은 해양경찰청 자료를 보면, 이달 1일부터 10일 사이 러시아에서 출발한 요트 6척에 탑승한 러시아인 27명이 한국 영해에서 발견됐다. 이 중 6명은 한국 입국이 허가됐지만, 나머지 21명은 입국 목적이 불분명하고 관련 서류(비자, 전자여행허가)가 미비해 입국이 금지됐다. 해경은 입국이 거부된 이들 중 10명에 대해서 “자국 징집회피 목적의 입국이 의심된다”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최근 법무부 회의에서 “요트를 이용해 입국하려는 외국인 중 유효한 비자를 소지하지 않거나, 전자여행허가를 받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입국요건 미비를 이유로 입국을 허가하지 않은 바 있다”며 “이는 통상의 대한민국 출입국 시스템에 따른 조처”라고 말했다.
그러나 난민 사건을 주로 맡아온 변호사들은 출입국 당국의 이번 조처가 유엔 난민협약과 현행 난민법을 위반할 소지가 있다고 지적한다. 명시적 난민신청이 없었다는 이유로 이들을 돌려보내면, 난민협약이 정한 ‘강제송환금지’ 의무를 위반한 것이라는 지적이다. 난민협약은 잠재적인 난민 신청자에게 관련 절차 등을 안내하지 않은 채 입국거부 처분을 하지 못하도록 정하고 있다.
공익법센터 어필의 이일 변호사는 “당사자들이 밝힌 입국 목적이 불분명하다고 판단했다면, 당국이 입국 목적을 무엇으로 봤는지 궁금하다”며 “징집령이 내려진 러시아의 상황을 감안했을 때, 규정에 따라 이들에게 난민신청 절차를 안내했어야 한다. ‘징집 거부’는 난민협약이 정하는 난민 인정 사유”라고 말했다. 한국은 모든 남성이 병역의 의무를 이행해야 하는 특수한 상황이라 ‘징집 거부’에 반감이 크지만, 국제법의 기준에 따르면 양심·종교·정치적 이유의 징집 거부는 난민으로 인정되는 사유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한국 정부가 명시적으로 반대 의사를 밝힌 상황에서 난민 심사의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것은 모순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김지림 변호사는 “타국이 벌이는 전쟁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에 난민 심사를 할 때는 최대한 객관적인 기준으로 ‘박해 가능성’을 따지게 된다. 그러나 어려운 기준으로 여겨지던 전쟁의 정당성과 관련해 정부가 이미 부당하다고 판단한 상황이면 러시아인들을 더 적극적으로 포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인들의 난민 관련 문의가 늘고 있는 가운데 ‘일관된 인도적 기준’을 하루빨리 설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달 들어 난민을 지원하는 시민사회 연대체 ‘난민인권네트워크’에는 10여명의 러시아인들이 난민 인정 절차 등을 문의했다고 한다. 난민인권센터의 김연주 변호사는 “러시아 상황을 봤을 때, 강제징집을 피하고자 하는 사정은 난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충분한 사유에 해당한다”며 “2018년 예멘 난민을 받아들였던 것과 같은 기준으로 러시아 피난민을 대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법무부는 “비자와 여행허가 등 요건을 갖췄는지에 따라 입국 여부가 결정된다”며 “원칙대로 대응한다는 방침 말고 특별한 입장은 없다”고 밝혔다.
한편, 대법원 2부(주심 조재연 대법관)는 콩고 출신 난민 신청자 가족이 법무부 장관 등을 상대로 낸 정보공개 거부처분 취소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심리불속행으로 확정했다. 대법원 확정판결에 따라 법무부는 난민 심사의 기준이 되는 ‘난민 인정 심사·처우·체류 지침’(2020년 4월 개정)에서 일부 외교적 기밀을 제외한 나머지 전반적인 사항을 공개해야 한다.
최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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