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2일 인천 자택에서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이혜율씨가 입소 당시 신상기록카드를 들어 보였다. 김진수 기자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이 2022년 8월24일 국가 기관으로부터 피해자로 공식 인정을 받았습니다. 1987년 신민당이 진상조사단을 꾸려 처음으로 형제복지원 인권침해 사건에 대해 조사를 시작한 지 35년 만입니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8월24일 “형제복지원 사건은 불특정 민간인을 부랑인이라 낙인찍고 강제수용한, 중대한 인권침해에 해당한다”며 피해자 191명에 대해 1차 진실규명을 결정했습니다. “국가가 강제수용 피해자와 유가족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해야 한다”고도 권고했습니다.
진실화해위는 형제복지원 사건이 국가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형제복지원에서 강제노역과 폭행, 성폭력 등이 발생하는 동안 국가는 관리 감독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판단했습니다. 형제복지원 운영기간 중 숨진 수용자도 기존에 알려진 것보다 105명이 많은 657명으로 추가 확인됐습니다.
<한겨레21>은 2019년 표지이야기를 통해 형제복지원 피해자 이예율씨의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이씨는 7살 때 엄마를 찾으러 나섰다가 경찰에 이끌려 형제복지원에 들어갔습니다. 3년 전 인터뷰 당시에 그는 “바라는 건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 피해배상”이라고 말했습니다. 4년6개월 동안 형제복지원에서 번호로 불린 이씨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류석우 기자
raint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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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10… 저는 번호로 불렸어요
대규모 인권유린 사건인 부산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최승우씨가 2020년 5월6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 10m 높이 캐노피에서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다. 박종식 한겨레 기자
제 이름은 이혜율, 1976년 4월18일생입니다. 어릴 때 꿈이 가수였어요. 할머니 댁에 살았는데 서울 신길동 골목에서 저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죠. <희나리>를 잘 불렀어요. 이상하게 그 노래가 좋았어요. 아버지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일했는데 남동생하고 저를 예쁘게 입히고 싶어 하셨어요. ‘부르뎅’ 같은 아동복에 챙모자를 쓰고 다녔어요. 어머니는 제가 5살 때 아버지랑 헤어지고 대전에 살았어요.
매타작이에요. 주먹, 몽둥이 막 날아와요.
1983년 10월, 제가 7살, 남동생이 5살 때, 남동생 손을 잡고 둘이 기차를 탔어요. 아버지가 준 용돈 600원이 있었어요. 대전 엄마한테 가려고 했어요. 같이 살던 삼촌과 할머니가 무서웠거든요.
기차 안에서 잠이 들었어요. 깨보니 부산이에요. 애 둘이 있으니까 파출소로 데려가더라고요. 밤 10시쯤이었어요. 경찰한테 할머니 집주소, 전화번호를 줬어요. 거기 나무의자에서 기다리라고 하더라고요. 또 잠이 들었어요.
깨우기에 나가보니 냉동차가 서 있어요. 문이 열렸는데 안이 깜깜하더라고요. 몇 사람이 타고 있었어요. 집에 데려다주나보다 하고 얌전히 있었죠. 우리가 타자마자 횡단보도를 건너가던 한 고등학생을 훅 낚아채 태우더라고요. 그 오빠는 학생복 같은 걸 입고 있었어요. 동생이 무서워서 울었어요.
밤 11시쯤, 어마어마한 큰 철문 앞에 섰어요. 철문을 몇 개 더 따고 들어가더니 저희 등을 툭 치며 “들어가 자” 그러더라고요. “왜 여기 데려왔냐”니까 그냥 “잔말 말고 들어가” 그래요. 처음엔 깜깜해서 아무것도 안 보였어요. 시간이 지나니 쭉 늘어선 이층침대들이 보이더라고요. 그날 밤 동생을 껴안고 한 침대에서 잤어요.
8310…. 저는 번호로 불렸어요. 이름을 들은 기억이 없어요. 둘쨋날, ‘형제복지원’이라 쓰인 파란 트레이닝복과 검정 고무신을 받았어요. 양말은 없어요. 다들 동상을 달고 살았어요. 동생 머리는 박박 깎고 저는 단발로 잘랐어요. 긴 머리를 자를 때 서러웠어요. “집에 보내달라”고 할 때마다 그냥 때려요. 저는 눈치가 빨랐어요. “언젠가 아버지가 찾아오겠지” 했죠. 그런데 세월이 지나도 안 찾아오니 원망이 커졌어요.
저는 여자아동소대 23소대로, 남동생은 24소대에 배치됐어요. 기합은 틈만 나면 받았어요. 남자 여자 안 따지고 기본적인 건 다 해요. 기본이 뭐냐고요? 날마다 매타작이에요. 주먹, 몽둥이 막 날아와요. 조장, 중대장, 소대장이 몽둥이를 항상 들고 다녀요. 기분 나쁘면 풀릴 때까지 때려요. 가만히 있어도, 울어도 맞아요.
‘원산폭격’(뒷짐 진 채 허리를 굽혀 머리를 땅에 박는 행위)은 기본이에요. 그것보다 더 힘든 건 머리 박고 다리를 이층침대까지 올리는 거죠. 피가 쏠려서 나중엔 마비될 거 같아요. 23소대가 제일 높은 지대에 있어 웬만한 건 다 보였어요.
죽는 사람 많이 봤어요. 이불로 둘둘 말아 대여섯 명이 몽둥이로 계속 때려요. 발로 툭툭 차서 “얘 죽었구나” 하고 어디론가 가져가요. 어떻게 말로 할 수 있을까요. 그건 공포, 공포, 공포였어요. 아무리 맞아도 맞는 거엔 무감각해질 수가 없어요. 언제나 아파요. 어떻게든 안 맞는 게 최우선이었어요. 동생은 별명이 ‘꼴통’이었는데 저보다 더 많이 맞았어요. 볼 때마다 울어 퉁퉁 부은 눈이 새파랬어요.
일렬로 서면 번호를 불러요. 시선 각도도 정해졌죠. 눈만 돌아가도 맞아요. 옷을 갤 땐 각이 딱 서야 해요. 그다음엔 기도하고 구보해요. 복지원 안 교회에서 예배를 봐요. 그 안에서도 몽둥이를 들고 다녀요. 밥은 꽁보리밥, 저는 지금도 보리밥은 안 먹어요. 국민교육헌장, 주기도문, 사도신경을 외워야 해요. 못 외우면, 또 맞죠.
저는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었어요. 합창단에 뽑혔거든요. 흰색 세일러복을 줬어요. 제 보물1호였어요. 외국인이나 높은 사람들이 방문하면 노래를 불렀어요. 형제복지원 안에 있는 계금분교도 다녔어요. 학교가 23소대보다 작았으니 애들을 학교에 다 보내진 않은 거죠.
선생님도 형제학원 사람들이었어요. 그 안에 별의별 사람이 다 잡혀 들어와 있었으니까요. 교과서는 있는데 공책은 없었어요. 뭘 배운 거 같지는 않고요. 파란 트레이닝복이 해지면 그 고무줄로 놀았어요. 쥐, 지네가 장난감이었죠. 이를 많이 잡았던 기억이 나요. 저는 후원자가 많았어요. 어떻게 아냐면, 좀 덜 맞았어요. 그래서 부러워하는 아이들이 있었죠.
초코파이도 기억나요. 제 생일에 그 귀한 걸, 제가 잡혀온 날 횡단보도에서 낚인 그 오빠랑 친구 삼총사가 줬어요. 어떻게 구했냐니까 방법이 있다고 그 자리에서 빨리 먹으라고 해요. 삼총사는 형제복지원 안에 있는 자개공장에서 일했는데 제가 그중 한 명을 좋아했어요. 형제복지원피해생존자모임이 생기고 여기저기 수소문해보니 그중 두 오빠는 자살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날은, 절대 못 잊어요. 제가 8살 때 어느 날, 저는 영국, 남동생은 프랑스로 입양 가게 됐다는 거예요. 입양 부모 만나고 그런 거 없어요. 그냥 가는 거예요. 합창단 선생님한테 매달렸어요. 동생하고 떨어질 바엔 차라리 죽여달라고. 제가 한번 울면 정말 감당할 수 없을 정도거든요. 합창단 선생님이 천사 같은 분이었어요. 그분이 손을 써줬어요. 고마워서 더 열심히 노래했어요.
완전히 갇혀 있었어요. 형제복지원에 잡혀오고 4년6개월 동안 외부로 딱 한 번 나갈 수 있었어요. 열병에 걸려 죽을 뻔했거든요. 병원에 한 번 다녀온 게 다예요. 저를 시작으로 23소대에 열병이 돌아 한 명이 죽었어요. 저 때문인 거 같아 죄책감에 시달렸어요.
애들이 어떻게 탈출할 엄두를 내겠어요. 한 번, 탈출 시도를 본 적이 있어요. 담에 밧줄을 걸고 올라가려다 다 미끄러져 내려왔어요. 고무신이니까. 다행히 걸리진 않았죠. 경비 할아버지가 한 달에 한 번 외출했는데 제가 집 주소랑 약도를 그린 쪽지를 썼어요. 한번 가봐달라고. 그런데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었어요.
1987년 형제복지원 사건이 알려진 어느 날, 건물 앞에 봉고차들이 쫙 섰어요. 대충대충 짐만 싸라고 해요. 호명해서 타면 출발하고 또 출발하고. 저랑 동생은 부산 남포동 남광아동복지원으로 갔어요. 중3 때까지 거기 있었어요. 일반 학교에 다니는 건 좋았는데 친구가 없었어요.
학교에 고아 몇 명이 있는데 밥이며 반찬이며 만날 똑같으니 애들이 알고 말을 안 걸어요. 초등학교 짝꿍이 절 정말 싫어했어요. 걔 얼굴이 아직도 기억나요. 동생은 계속 도망갔어요. 저랑 선생님이랑 만날 잡으러 다녔죠. 그때는 왜 자꾸만 도망가는지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형제복지원 안에 너무 갇혀 있어서 그랬던 거 같아요.
수용자들을 동원해 주례동 국유림에 형제복지원 시설을 짓고 있는 공사 현장 모습. 출처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제공
남광아동복지원에서도 부모님 이름을 말했는데 찾아주지는 않았어요. 형제복지원에서 절 돌봐줬던 그 천사 오빠가 우리 집을 찾아주겠다고 온 적 있어요. 그 오빠가 서울로 데려갔는데 너무 많이 바뀌어서 길을 찾을 수 없었어요. 오빠가 또 오겠다고 하고선 연락이 끊겼어요. 아직도 형제복지원 피해자가 나올 때마다 그 오빠 아는지 물어요. 꼭 찾고 싶어요.
중학교 3학년 올라간 직후 어느 월요일, 학교 갔다 왔더니 층계 제일 꼭대기에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이 있어요. “너 나 모르겠냐?” 그래요. 모르겠다고 하고 인사만 했어요. 알고 보니 삼촌이었어요.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빠가 있어요. 그 얼굴은 절대로 못 잊죠. 동생도 아빠는 기억했어요. 보자마자 대성통곡했어요. 왜 이제야 데리러왔느냐고.
집에 돌아와보니, 풍비박산이 나 있어요. 예전엔 꽤 잘살았는데 정말 가난해진 거예요. 게다가 아빠가 엄했어요. 이럴 거면 왜 우릴 데려왔느냐고 원망도 했어요. 동생은 계속 가출했고요. ‘7살 때 내가 동생을 데리고 나오지 않았다면 얘가 이렇게 고생하지 않았을 텐데’ 마음이 아팠어요.
8년 동안 아빠가 우릴 찾아 안 가본 곳이 없다고 해요. 신문광고도 했대요. 형제복지원에도 두 번 왔는데 그런 사람 없다고 하는데다 형제복지원 기록에도 제 주민번호가 다르게 적혀 있었어요. 우리 찾는다고 일도 다 작파하고 친구들한테 돈 빌리고, 차까지 다 팔았대요. 그 이야기를 하면서 아빠가 울었어요. 처음 봤어요. 아빠가 우는 거.
고등학교 2학년 때 친구랑 식당 갔다 텔레비전에 형제복지원 원장 박인근이 나오는 걸 봤어요. 말소리는 안 들렸는데 소름이 확 끼치면서 무서운 거예요. 당연히 사형당한 줄 알았거든요.
졸업하고 집 나와 친구랑 같이 살았어요. 형제복지원은 그냥 잊으려 했어요. 사느라 바빴으니까요. 아빠랑 새어머니가 일 나가면 몇 달 안 들어오기도 해서 제가 중3 때부터 음식을 만들었어요. 꽤 요리를 잘해요. 식당, 록카페 주방에서 일하다 포장마차, 피시(PC)방도 했어요.
친구 많고 사교적이었는데도 형제복지원 이야기는 하지 않았어요. 어차피 믿어주지 않을 테니까. 거짓말쟁이같이 느껴지는 거예요. 부랑자 딱지 때문에 부끄럽기도 했고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저는 창피할 게 없어요. 부모도 있는데 납치당한 거잖아요. 그 생각이 들면서 형제복지원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알리고 싶어 시나리오를 써보려 했어요. 잊으려 했던 기억이 되살아났어요.
8년 전부터 불면증이 갑자기 생기더니 우울증이 됐어요. 제 행동 하나하나에 형제복지원이 배어 있는 거예요. 예를 들면, 전깃불, 바로바로 끄거든요. 스위치를 내리다 생각해요. ‘아, 이것도 형제복지원이구나.’ 거기선 그렇게 안 하면 맞았으니까요. 기억이 확 몰려와요. 제가 형제복지원 나오고 한동안 슈퍼도 혼자 못 갔어요. 무서워서요. 자살 기도도 몇 차례 했어요. 사는 데 미련이 없더라고요.
제가 바라는 건 진상 규명, 명예회복, 피해배상이에요. 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밝히고 국가가 사죄해야죠. 형제복지원피해생존자모임에 참여하면서, 저보다 더 고생한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저는 건물이 완공된 다음에 잡혀 들어갔는데 그전에 갇혔던 사람들은 그 건물을 맨손으로 지어야 했대요. 또 형제복지원 말고도 이런 일을 당한 사람이 많았어요. 이런 일이 절대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꼭 법안이 국회를 통과해야 하는데….
지난해 12월27일엔 종일 기분이 너무 처져 집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어요. 술은 입에도 못 대고 분노는 혼자 삭이는 편이거든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이 자유한국당의 반대로 또 무산됐다고 하더라고요. 마음 같아선 국회로 쳐들어가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어요. 법안만 통과돼도 마음이 좀 가뿐해질 것 같아요.
김소민 자유기고가 regardmoi@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