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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n번방 가해자 ‘집행유예’ 왜 많나? 판사들에게 직접 물었다

등록 2022-06-05 13:32수정 2022-06-06 02:44

[n번방 1심 판결문 전수 분석, 보도 그 후]
일반인 가담자 70%에 징역형 집행유예 선고
“집행유예 기간 동안 재범 강력 경고 의미”
‘피해자 진술권 보장’, ‘디지털 압수 신설’ 숙제
“사법부 인식 개선, 흐름 거스를 수 없을 것”
텔레그램 성착취 혐의로 기소된 주범 조주빈 등의 선고 공판이 열린 2020년 11월26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eNd(n번방 성착취 강력처벌 촉구시위)’ 회원들이 엄벌을 촉구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텔레그램 성착취 혐의로 기소된 주범 조주빈 등의 선고 공판이 열린 2020년 11월26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eNd(n번방 성착취 강력처벌 촉구시위)’ 회원들이 엄벌을 촉구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엔(n)번방 사건 이후로 디지털 성착취 범죄의 형량이 오르고 사법부의 인식도 바뀐 것은 분명합니다.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인 20대 여성들과,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한 시민사회의 노력 덕입니다. 하지만 곧 엔번방 사건이 기억에서 잊히면, 어렵게 이뤄낸 변화마저도 물거품이 될까봐 우려도 됩니다.”

지난달 <한겨레>는 n번방의 일반인 가담자들’ 1심 판결문을 전수분석한 결과를 보도했다. 조주빈·문형욱 등 얼굴을 드러낸 공급자 뿐만 아니라, 이들이 성착취물을 제작·유포하도록 만든 일반인 성착취물 수요자에 대한 법원의 시각을 알아보고자 한 기획이었다. <한겨레>가 전수 분석한 판결문 속 일반인 가담자 378명 가운데 69.1%인 261명은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벌금형의 약식명령 수준이었던 수요자 처벌이 강화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전체 일반인 가담자의 1심 선고형은 평균 벌금 653만원, 13.2개월의 징역형(집행유예 포함)에 달했다. <한겨레>는 이런 전수 분석 결과에 대해 사법부 내부에서는 어떻게 인식하는지 들어보기로 했다. 성폭력 사건 재판 경험이 많은 현직 부장판사 3명이 익명을 전제로 좌담에 나섰다.

 “집행유예는 재범에 대한 강력한 경고 의미”

현직 부장판사들은 상당수 사건에 징역형의 집행유예가 선고됐다는 조사 결과에 대해 “유의미한 형량 강화”라고 평가했다. 성착취물 단순 소지·촬영 범죄에 벌금 200만~300만원 정도 약식명령이 보편적이었던 과거와 비교하면 범죄를 엄중하게 인식한 결과라는 것이다.

ㄱ판사는 2018년 ‘웰컴투비디오’ 운영자 손정우가 유포한 성착취물을 소지해서 약식기소된 사건을 다뤘을 당시를 떠올렸다. 그는 “약식명령으로 끝낼 사건은 아니라고 생각해 정식재판으로 넘겼는데, 다른 판사에게서 ‘왜 굳이 사건을 키우냐’는 취지로 항의를 받은 적도 있었다”며 “n번방 사건 이전과 비교하면 큰 변화가 있었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ㄴ판사는 “실형보다 집행유예 기간이 더 길게 선고되기 때문에 오랫동안 범죄를 억지하는 기능을 한다”며 “집행유예는 재범에 대한 강력한 경고”라고 설명했다. 집행유예 기간에 다른 디지털 성범죄를 저지르면 형기가 훨씬 길어지기 때문에 더 오랫동안 범죄를 억제할 수 있다는 뜻이다. 또 성착취물 소지범은 규모를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만연하기 때문에, 수사기관에 적발된 이들에게만 실형을 선고하는 것보다 재범을 억제하는 편이 형벌의 목적에 부합한다는 판단도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런 변화가 사법부의 적극적 노력을 통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긴 어렵다. 엔번방 사건 이후 아동·청소년 성보호에 관한 법률 등이 개정돼 처벌 수위가 높아졌고,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도 크게 강화됐다. 결과적으로 법원도 사회의 변화를 뒤따른 셈이다. ㄱ판사는 “엔번방 이전에도 소라넷과 웰컴투비디오 등 디지털 성폭력 사건은 계속됐다. 당시에서 법원 판결에 대한 ‘송방망이 처벌’ 비판이 꾸준히 나왔으나 판사들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이제 더는 예전처럼 가벼운 처벌을 하기 어려워졌다. 사회의 변화를 뒤따라가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래서일까. ㄷ판사는 이번 <한겨레> 조사에서 확인된 성착취물 수요자 엄벌 기조가 도로 과거로 돌아가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는 “신종 범죄에 사회적 분노가 일면 한동안 형량이 올라가다 익숙해진 뒤 다시 떨어지는 경향을 보인다. 과거 보이스 피싱 범죄가 그랬다”며 “사회와 언론의 관심이 식으면 얼마든지 예전의 ‘솜방망이 처벌’ 시절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고 경계했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피해자 진술권 보장으로 사건 실체 접근해야”

<한겨레>와 만난 판사들은 재판 과정에 피해자 진술권을 보다 충실히 보장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성착취물 사건을 다루는 재판부가 가해자 관점에서 벗어나야만, 솜방망이 처벌의 함정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현실의 법정에서 이 피해자의 권리는 제대로 보장되지 못했다. 피해자가 법정에서 피해 사실을 진술하는 고통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았고, 피고인과 변호인의 2차 가해에 노출될 가능성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문제는 그동안 피해자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한다는 사법부의 인식 자체가 부족했다는 점이다. 형사 재판은 기본적으로 형벌권을 독점하고 있는 국가와 피고인의 대결 구도로 진행되기 때문에, 피해자야말로 사건의 당사자일 수 있다는 인식 자체가 형성되지 못했다. 그 결과, 가장 고통받고 있는 피해자의 감정은 배제된 재판 결과들이 나오곤 했다. 피고인의 반성하는 태도만을 고려해 감형하는 사례 등이 대표적이다. ㄱ판사는 “국가가 형벌권을 독점해 피해자의 사적보복을 막은 대신, 피해자가 자신의 의견을 충분히 밝힐 수 있는 권리를 헌법으로 보장했다. 그러나 판사들은 이런 피해자 진술권을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피해자의 진술을 듣는 재판이 좋은 재판이라는 공감대가 없었다”고 반성했다. ㄷ판사도 “당사자의 이야기를 경청할수록 더 진실에 다가갈 수 있다”고 말했다. 피해자의 자유의사에 따른다는 전제 아래 진술권을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는 뜻이다.

 “디지털 증거 압수제도 하루 빨리 개선해야”

판사들은 성착취물 유포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려면 ‘디지털 증거’ 압수수색과 관련한 제도도 하루빨리 개선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피해자 진술권이 법적 권리가 실무에서 구현되지 않는 문제라면, 디지털 증거 압수는 사법 제도가 기술 발전을 따라잡지 못하는 공백지다. ㄴ판사는 ‘피해 영상물 보전명령’과 ‘사후 영장’의 도입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성착취물이 클라우드 서버에 저장된 경우 스마트폰이나 노트북 등 기기가 압수된 이후에도 제3자가 여전히 성착취물에 접근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을 막으려면 성착취물이 저장된 플랫폼 운영자에게 영상물을 보전하도록 명령하는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또 수사 과정에 추가로 발견되는 성착취물은 수사기관이 긴급 압수한 뒤 사후영장을 발부받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마지막으로 이들은 ‘디지털 성착취 범죄의 엄벌과 피해자 보호’라는 변화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판사들은 비슷한 사건에 대해 동료 판사들은 어떤 판결을 내렸는지를 참고하곤 합니다. 앞선 판결의 잘못을 바로잡기보다 반복하는 일이 더 많았습니다. 지금부터라도 판사들이 법원 내부의 눈치를 보는 게 아니라 사건 당사자와 국민을 염두에 두고 재판을 할 수 있도록 더 많이 변해야 합니다.”(ㄱ 판사)

“과거 성폭력 범죄 재판이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에 물들어 있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성인지 감수성을 강조하는 대법원 판결이 선고되는 등 과거와 비교하면 인식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변화의 흐름을 거스르지는 못할 것입니다.”(ㄴ 판사)

▶관련기사: n번방 그놈들, 감방 갔을까…성착취물 소지 74%가 집행유예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044081.html

▶관련기사: 850원 컵라면 받고 되판 아동 성착취물…피해자 고통엔 무감했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044075.html

▶관련기사: 성착취물 2천개나 받았는데…법원은 너의 죄를 감하노라?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044076.html

최민영 기자 my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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