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고깔’을 쓴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이종걸 공동대표(왼쪽)와 미류 책임집행위원이 26일 오후 국회 앞에서 5월 새 정부 출범 전 4월 임시국회에서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고 촉구하며 16일째 단식농성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
새정부 출범을 2주 조금 넘게 앞둔 지난 25일, 국회 앞·지하철 역사·길거리에서 농성 중인 사람들에게 “왜?”라는 질문을 던지자 돌아오는 답은 같았다. 이들은 지난 3월 대선이 끝난 뒤 저마다의 이유로 거리로 나섰다. 이들은 지난 5년 동안 온전한 답을 듣지 못한 자신들의 외침이 떠나는 정부에, 또 새롭게 출범하는 정부에 가닿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지난 11일부터 단식 농성 중인 이종걸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공동대표(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미류 책임 집행위원(인권운동사랑방)은 간담회, 기자회견, 농성, 500km 도보 행진, 국회 국민동의청원 10만명 서명 등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해봤다. 그러나 국회는 청원 심사기한을 21대 국회 마지막 날인 2024년 5월29일로 연장했다. 결국 두 사람은 4월 임시국회에서 법 제정을 촉구하며 국회 앞에서 천막을 치고 곡기를 끊었다.
이들은 정치권을 향해 ‘다음에’가 아니라 ‘지금’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고 요구한다. 미류 집행위원은 “(더불어민주당은) 2017년 대선에서도, 2018년 지방선거에서도, 2020년 총선거에서도 ‘선거 다음에’라고 얘기해왔다. 2020년 국회 과반의석이 된 뒤에도 ‘2022년 대선 다음에’라고 했는데, 오는 6월 지방선거 다음이면 총선이 올 것”이라며 “본인들이 추진하는 건(검찰 수사-기소권 분리 입법) 사회가 뭐라고 하든 의지를 보여주지 않나. 차별금지법에 대한 사회적 합의의 수준은 이미 꽤 오래전부터 높아져 왔다”고 했다. 이종걸 공동대표는 “장애인 이동권 투쟁에 대한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의 인식 등 새 정부가 들어서게 되면 혐오가 득세할까 우려된다. 그래서 더 ‘지금’이라고 얘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이 단식을 시작한 지 16일째인 지난 26일, 국회 법사위는 차별금지법 제정과 관련한 의견을 수렴하는 공청회 계획서를 채택했다.
지난 25일, 서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지하 2층에서 농성 중인 전국장애인부모연대 회원들. 서혜미 기자
“우리 죽은 뒤에도 아이들 무사할 수 있도록”
지난 25일 오후 2시30분께,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 설치된 농성장에서 탁미선 전국장애인부모연대(부모연대) 부회장은 쉽사리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그는 코로나19에 걸린 뒤 자가격리가 끝나자마자 지난 20일부터 된장을 뜨거운 물에 풀어낸 차로 버티고 있다. 그와 함께 윤종술 부모연대 회장, 김수정 서울지부장, 조영실 인천지부장은 ‘발달장애인 24시간 지원체계’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국정과제로 채택해줄 것을 촉구하며 무기한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단식 하루 전날에는 발달장애 가족 등 550여명이 집단으로 머리를 밀기도 했다. 이들은 지난 2018년에도 209명이 삭발을 하고 68일 동안 천막 농성을 했고, 지난해 말에도 예산증액을 요구하며 9일간 단식 농성을 했다.
윤종술 회장은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면 ‘국가가 그렇게 지원해주면 부모는 뭐하는데’라고 하지만, 역으로 말하면 우리가 죽고 나면 지원이 없으면 못살아가는 발달장애인들이 대부분”이라며 “어머니가 죽고 발달장애인 아들이 7개월 동안 노숙했던 방배동 모자 사건이나, 장애인 염전 강제 노역사건 등을 봐라. 우리가 죽은 뒤에 이 친구들이 잘 살 수 있도록 준비를 해달라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라고 말했다.
발달장애인의 장애 정도는 천차만별이지만, 대부분 발달장애인들이 일상생활을 영위하려면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농성장에 있어도 자녀와 다른 가족들 걱정에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마음이 불편한 이유다. 윤 회장은 “문재인 정부에서 발달장애인 종합대책이 처음 나왔지만, 내실 있게 추진되지 못했다. 새 정부의 국정과제로 채택해서 정책을 좀 더 발전시키고 완성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지난 25일 서울 종로구 서린동 에스케이 본사 뒤편에서 농성 중인 조순미 빅팀스 투쟁본부 위원장. 서혜미 기자
조순미 ‘빅팀스’(가습기살균제 피해자 단체 연합) 투쟁본부 위원장은 지난달 26일부터 서울 종로구 서린동 에스케이(SK)본사 건물 후문 쪽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산소호흡기를 단 그는 13일 동안 단식농성을 했지만 건강 악화 등의 이유로 단식을 중단했다. 그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로 지난 2020년 설암이 재발했지만, 폐 기능 저하로 마취 수술 뒤 깨어나지 못할 가능성 때문에 병원에서도 수술을 꺼릴 만큼 몸이 좋지 않은 상태다.
지난해 10월 가해 기업과 피해자 단체들이 모인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를 위한 조정위원회’(조정위)가 구성됐다. 김이수 전 헌법재판소 권한대행이 위원장을 맡았고, 정부는 빠진 채 민간 차원에서 만들어졌다. 조정위는 지난달 최종 조정안을 내놨지만, 조정은 무산 위기에 놓여 있다. 빅팀스는 조정 금액이 충분하지 않다며 농성에 돌입했고, 옥시와 애경은 조정안을 거부했다.
조 위원장은 “정부는 가습기 살균제 참사에 책임이 없다는 식으로 나오고 있다. 하지만 정부가 일부분 책임이 있었다고 인정해야지만 기업에 대한 강제도 할 수 있는데 애당초 정부가 빠진 조정위의 한계는 명확했다”고 말했다. 현재 피해자들은 △정부·피해자·기업 모두 참여한 2기 조정위 구성 △국가의 책임 인정과 진상규명 등을 촉구하고 있다.
지난 2011년 가습기 살균제 참사가 수면 위로 드러난 지 11년째, 조 위원장은 “그동안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이 이렇게 장기간 농성을 한 적은 없었다”며 천막농성을 계속 이어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로, ‘어느 한 시대에 있었던 에피소드’로 남길 수 없어요. 그건 정말 억울하고 분한 일입니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어요.”
서혜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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