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사회일반

“육아도 간병도 경력, 돌봄은 왜 자격증이 없나요?”

등록 2022-03-19 09:59수정 2022-03-19 18:23

[한겨레S] 인터뷰 _ 돌봄인증서 제안하는 사람들

휴식·헌신으로 취급된 돌봄노동
지자체가 ‘경력 인증서’ 준다면?
돌봄은 고도의 서비스·소통 능력
“인증 넘어 경제적 보상까지 가야”
구은경 상임이사(왼쪽부터), 김가영 부위원장, 김민석 사무국장이 11일 <한겨레> 사옥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구은경 상임이사(왼쪽부터), 김가영 부위원장, 김민석 사무국장이 11일 <한겨레> 사옥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한겨레S 뉴스레터 구독하기 https://bit.ly/319DiiE

“누군가를 돌본 시간은, 당신에게 소중한 경력이 됩니다. 성별이나 연령 무관하게 노인, 환자, 아동, 장애인 등을 돌본 시간을 지방자치단체에서 경력으로 공식 인정해드리는 조례를 만들고자 합니다. 지난해 서울 성동구에서 동일한 내용의 조례가 통과됐습니다. 우리 지역에서도 성공시킬 수 있습니다.”

서울 마포구에서 청년 정치인으로 활동을 하는 김가영(37) 정의당 마포구 지역위원회 부위원장은 지난겨울 마포구 성산동 주택가 일대를 돌며 지역 주민들에게 작은 시민운동을 제안했다. 자녀 육아나 가족 간병처럼 고된 돌봄노동에 평생을 헌신했지만, 그저 경제활동 없이 집에 있던 사람으로 평가받는 사회적 인식을 바꾸기 위한 조례 제정 운동이었다. 시민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다른 건 다 자격증이 있는데 왜 돌봄은 자격증이 없나요?” “그러니까 나라에서 종이 쪼가리 하나라도 한번 줘보란 말이죠.”

김 부위원장이 조례 내용의 가안을 만들어 손팻말을 들고 홍보하자 지나가던 중년 여성들이 공감의 말을 보탰다.

지난 11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 사옥에서 김가영 부위원장과 김민석(24) 정의당 마포구위원회 사무국장을 만났다. 이들은 정당의 풀뿌리 지역모임을 하는 동시에 ‘마포구 돌봄경력인정 조례제정 추진본부’에서 각각 본부장과 활동가로 육아나 간병 노동에 대한 사회적 인정과 경제적 보상의 제도화를 요구하는 운동을 하고 있다. 오랜 기간 돌봄노동이 사회적으로 드러나고 경제적 가치를 보상받는 일에 힘쓴 구은경(48) ‘여성이 만드는 일과 미래’ 상임이사도 이날 한자리에 모여 아이디어를 보탰다.

운전면허증 같은 ‘돌봄 증명서’ 상상

지난해 11월 서울 성동구는 ‘경력보유여성 등의 존중 및 권익 증진에 관한 조례’를 제정해 돌봄노동 경력에 대한 인증서를 발급할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 구청이 조례를 통해 육아, 간병 등의 경력에 인증서를 발급하면, 지역의 기업을 포함해 다양한 일자리에서 이 인증서를 채용과 임금 협상의 근거로 쓰도록 하는 게 목표다. 이를 계기로 대전 유성구의회와 전주시의회 등에서 성동구에 관련 문의해 왔고, 서울 마포구에서는 이 같은 조례를 도입하고자 시민운동을 펼치고 있다.

가영 : 코로나 시기를 거치며 돌봄 문제에 관해 우리가 뭐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했어요. 그러던 중 성동구 사례를 보고 참신하다고 생각했죠. 최소한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해볼 수 있겠다 싶었어요. 무엇보다 시민들의 반응이 무척 좋아 힘이 났죠. 지역 맘카페에 갔는데, 성동구에 이런 조례가 생겼다는 글에 환호하는 댓글이 많이 달리더라고요.

민석 : 가영님을 따라 저도 한번 거리로 나가 봤는데, 시민들의 반응이 뜨거운 걸 보고 ‘이거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지자체 자치법규인 조례를 만드는 일은 국회에서 법을 만드는 일보다 쉽고, 그 과정에서 시민 목소리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장점이 있거든요.

은경 : 제도가 상식을 이끄는 측면이 있잖아요? 이런 조례가 있으면 돌봄도 노동이란 인식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돌봄노동은 마치 운전면허증처럼 대부분의 사람이 기본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이어야 해요. 자기 먹을 음식은 자기가 챙길 수 있어야 하듯이요. 지금은 특정 성별이나 특정 연령대에서 가정 내 돌봄을 주로 맡는데, 아직 돌봄이 노동이라는 말에 공감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기도 합니다.

가영 : 직장에 다니다 누군가가 육아휴직을 하면 주변에서 “이제 좀 쉬겠네?”라고 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누군가는 돌봄이 그저 사랑이고 헌신이며 경제활동 대신 ‘집에서 쉬는 것’ 정도로 인식하고 있어요. 적어도 이 조례가 만들어지면 육아나 간병을 하는 사람들이 ‘내가 지금 쉬는 게 아니구나’ 하고 자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 같아요.

이들이 추진하는 ‘돌봄의 경력 인정 및 권익 증진 조례’(가안)는 세 가지 항목이 뼈대를 이루고 있다. 첫째, 돌봄에 대한 정의다. 다른 사람에게 의존해야 하는 환자나 노인, 어린이, 장애인 등 사람을 돌보는 모든 활동으로 폭넓게 돌봄을 정의하기로 했다. 둘째, 지자체는 사회적 돌봄이 필요한 이들을 대상으로 활동한 이에게 해당 기간의 경력을 인정하는 증명서를 발급할 수 있다. 셋째, 증명서는 보유자가 경력 인정을 필요로 하는 곳에 제출할 때 지자체나 연관 기관, 출자 기업 등에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이 증명서를 발급하기 위해 지자체는 위원회를 구성해야 하며 이해관계가 발생할 수 있는 이의 개입을 차단해야 한다. 이들은 지난달 9일 ‘돌봄의 경력 인정 및 권익 증진 조례 제정 간담회’를 서울 마포구 의회에서 열었다.

지난달 9일 ‘돌봄의 경력 인정 및 권익 증진 조례 제정 간담회’가 서울 마포구의회에서 열렸다. 돌봄경력인정조례 추진본부 제공
지난달 9일 ‘돌봄의 경력 인정 및 권익 증진 조례 제정 간담회’가 서울 마포구의회에서 열렸다. 돌봄경력인정조례 추진본부 제공

“그래서 어디다 써먹냐고?”

20대 민석부터 30대 가영, 40대 은경은 세대도 다르고 성별도 다르지만 ‘돌봄’이란 하나의 단어로 공감대를 이루었다. 20대 주변에는 쓰러진 부모님을 부양하는 ‘영케어러’들이 있고, 20~30대엔 육아로 인해 사회활동에 참여하지 못한 여성들이 많다. 40대는 연로한 부모를 누가 부양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가 현실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한 나이대다.

은경 : 돌봄은 나이가 들수록 뜨거운 감자예요. 그나마 자녀 돌봄은 자기가 낳은 자녀니까 책임이 확실합니다. 하지만 부모 돌봄은 또 달라요. 결국은 돌봄 문제 때문에 가족 내 분란이 생기고 해체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비용을 들여 해결할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생계를 위협받기도 합니다. 돌봄 문제에 관한 여러 이야기가 이 조례 운동을 계기로 수면 위로 올라왔으면 좋겠어요.

가영 : 돌봄 이슈에 관해선 당사자 이야기를 듣기가 쉽지 않았어요. 당사자들은 가족 상황에 대해 발언하기를 꺼리고, 돌봄 부담을 이야기하는 걸 다른 가족이 반대하기도 하고요. 가족 내 어려움은 감춰야 미덕이라는 인식도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육아나 간병을 맡는 분들이 사회적 발언을 할 창구가 필요한 것 같아요.

민석 : 마포구에 아동을 키우는 인구나 노인을 부양하는 인구, 환자 또는 장애인을 돌보는 가정이 적지 않아요. 그래서 돌봄경력 인정에 관한 조례도 우리 지역에서 시민들 힘으로 추진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 지역의 특징이 성미산마을 같은 공동체를 만들어 돌봄이나 교육 같은 걸 함께 해결한 역사가 있다는 점입니다.

가영 : 돌봄경력 인증서라는 종이 한장엔 많은 의미가 포함될 것 같아요. 돌봄 당사자가 자신의 노동을 하나의 언어로 설명해보고, 이걸 받아보는 기업이나 기관에서도 이 사람의 역량에 대해 다시 재정립하는 과정을 밟게 될 겁니다.

민석 : 꼭 돌봄 영역에만 국한해 활용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인증서는 어떤 직장에 들어가든지 보유자의 소통 능력을 파악할 수 있는 참고 자료가 될 것 같아요. 마포구에 많은 사업장이 있는데, 일자리센터 같은 곳과 연계해 인증서를 홍보하고 쓰일 수 있도록 권고하면 어떨까요. 지역 협동조합 등에 인증서 활용을 하나의 요건으로 넣어 활용도를 높이는 것도 방법입니다.

은경 : 성동구는 지역 기업과 양해각서(MOU)를 쓰고 지역 주민 고용과 연관시키려 하고 있고요.

가영 : 조직에서 사람을 채용할 때 구직자의 역량 중 갈등 상황 대처를 잘할 수 있는지 알고 싶을 때, 돌봄경력 인증서가 하나의 자격증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돌봄노동을 하면 타인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파악하고 충족시켜주는 능력이 발달하죠. 그래서인지 돌봄노동 하시는 분들이 대체로 소통 능력이 좋거든요.

서울 마포구의 한 지하철역에서 김가영 정의당 마포구 지역위원회 부위원장이 ‘돌봄경력 인정 및 권익 증진에 관한 조례’를 제정하자고 제안하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돌봄경력인정조례 추진본부 제공
서울 마포구의 한 지하철역에서 김가영 정의당 마포구 지역위원회 부위원장이 ‘돌봄경력 인정 및 권익 증진에 관한 조례’를 제정하자고 제안하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돌봄경력인정조례 추진본부 제공

돌봄 사회화하는 한걸음

가영 : 조례가 강제력이 없다는 게 한계이지만, 이 조례를 만들고 실행하는 데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 것도 장점입니다. 보통 법이나 제도를 만들 때 예산을 넣느냐 마느냐 하면서 무산되곤 하거든요.

은경 : 비용이 안 든다는 게 과연 장점일까요? 저는 한 가지 우려되는 점이 있는데, ‘돌봄경력을 인정한다’고 했을 때 저는 무조건 경제적 보상이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증서라는 종이 한장으로 공공기관이 제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할까 봐 걱정입니다.

가영 : 돌봄의 책임을 제도화하라고 했더니 기껏 종이 한장 발급하겠다는 소리냐고 하실 수도 있지만, 경제적 보상 같은 책임까지 정부나 지자체가 탄탄하게 책임지는 단계로 나아가도록 이 조례가 작은 한걸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조례 제정은 최종적으로 돌봄경력에 대한 확실한 수당 지급까지 실현되도록 하기 위한 과정입니다.

은경 : 그리고 지자체에서 돌봄경력 인증서를 주는 게 오히려 가족 내에서 돌봄을 알아서 해결하라는 잘못된 메시지로 이어질 우려도 있어요. 우리 사회의 분위기상 가족 내에서 누가 돌봄을 맡을 것인가로 논쟁할 때 ‘집에서 육아하면 돌봄노동으로 인정된다는데 집에 좀 있어라’ 이런 식으로 논의가 흘러갈 수도 있거든요.

가영 : 여러 우려가 있을 수 있지만 일단 돌봄도 경력이 되는 노동이라는 사회적 메시지를 확실히 만들어보자는 게 지금의 목표입니다.

민석 : 한 지역에서 성공적 조례가 한 건 나오면 다른 지역까지 너나없이 확산되고, 전국적으로 퍼진 조례는 다시 국회에서 입법이 될 수 있습니다. 돌봄노동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고 보상에 이르게 하는, 돌봄의 사회화란 전체 퍼즐 중에 이 조례가 한 조각이 되면 좋겠어요.

‘가사돌봄사회화공동행동’이 세계 여성의 날이던 지난 8일 서울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연합뉴스
‘가사돌봄사회화공동행동’이 세계 여성의 날이던 지난 8일 서울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연합뉴스

👉 ‘영케어러’ ㄱ씨의 돌봄노동

돌봄노동 경력 인정을 제도화하면 어떤 변화가 만들어질 수 있을까? 서울 동작구에 사는 직장인 ㄱ(29)씨는 직장 일과 아버지 간병을 병행하는 ‘영케어러’다. ㄱ씨는 4년 전 아버지가 치매에 걸렸다는 것을 처음 안 순간 두려웠다. 가족이 모두 일을 하고 있어 아버지를 돌볼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안정되고 행복함을 되찾는 순간은 누군가와 함께 그림을 그리고, 커피를 마시러 나가고, 산책 가는 시간이었다. 최근에는 요양보호사를 소개받아 하루 4시간가량 아버지의 돌봄을 맡기고 있다. 하지만 4시간이 종료되면 다시 아버지는 홀로 남는다. 가족 중 누군가 일을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이 계속해서 발생한다. ㄱ씨의 어머니는 자신이 일을 포기하는 게 어떻겠냐고 하곤 한다. 하지만 ㄱ씨는 반대한다. 일을 하지 않으면 먹고살기 어려워지는 것도 있지만, 각자 일상을 잃어버리는 상실감이 크게 다가올 것 같아서다. ㄱ씨는 많은 생각을 했다. 돌봄휴직 제도, 돌봄을 위한 유연근무제가 늘어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족 내에서 돌봄을 수행한 것을 노동으로 인정해줄 순 없을까? 다음은 ㄱ씨의 말이다.

“‘돌봄’의 중요성에 비해 돌봄을 대하는 사회의 시선은 여전히 한발짝을 나가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특히 가족을 돌보는 일을 노동이 아닌 ‘희생’으로만 인식합니다. 돌봄을 위한 다양한 제도적 뒷받침이 생겨나면 좋겠습니다. 마포구에서 ‘돌봄의 경력 인정 및 권익 증진’ 조례를 추진하는 데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김미향 기자 aroma@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계엄 해제, 윤석열 체포”…국회 앞 시민들, 계엄군 온몸으로 막았다 1.

“계엄 해제, 윤석열 체포”…국회 앞 시민들, 계엄군 온몸으로 막았다

“윤 대통령, 진짜 국민의 모습 보라” 아침까지 국회 지킨 시민들 2.

“윤 대통령, 진짜 국민의 모습 보라” 아침까지 국회 지킨 시민들

법조계 “내란 해석도 가능…윤 대통령 탄핵 사유 명확해져” 3.

법조계 “내란 해석도 가능…윤 대통령 탄핵 사유 명확해져”

“윤 대통령, 탄핵으로 들어갔다”…법조계도 계엄 선포에 분노 4.

“윤 대통령, 탄핵으로 들어갔다”…법조계도 계엄 선포에 분노

[영상] “계엄 해제”에서 “윤석열 체포”로…국회 앞 시민들 환호 5.

[영상] “계엄 해제”에서 “윤석열 체포”로…국회 앞 시민들 환호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