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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초량동 168계단, 누구나 오르는 세상과 차별금지법 사다리

등록 2022-02-12 10:25수정 2022-02-12 11:05

[한겨레S] 차별금지법 있는 나라
릴레이 연재⑦

달동네 꼭대기 집 가려는 의지가
비탈길에 계단·모노레일 만들어
누구나 오르내릴 길쯤은 달라는
최소한의 요구가 바로 차별금지법
초량의 계단을 상징하는 168계단. 그림 박조건형
초량의 계단을 상징하는 168계단. 그림 박조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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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초량동에는 계단이 많다. 언덕길로 두지 않고 계단이 필요했던 이유는, 비탈이 너무 가팔랐기 때문이다. 아닌가, 높고 높은 비탈을 오르다가 언제든 그 자리에 앉아 쉬어 가도 괜찮다는 배려가 담겼던 걸까? 잠시 들었던 짐을 내려 놓고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돌아볼 여유를 허락하는 손바닥 크기만큼의 평지.

이십대 초반까지 경기도 끝자락 달동네에 살았기에 나는 비탈에 매달리듯 사는 삶을 아는데, 불편이었던 내 몫의 그 삶이 꼭 지긋지긋하기만 했던 건 아니다. 홍수가 나 마을 전체가 잠길 때는 우리 집만 아무 일도 없던 유일한 피난처이기도 했고, 서북향이던 대문 앞에서 하늘을 보면 휴전선 북쪽 산자락 너머로 노을을 뿌리던 그 하늘이 비현실적으로 아름답기도 했다. 그런데도 나는 그 아름다운 풍경을 향해 감탄 한번 제대로 뱉을 줄 몰랐다. 그래서 그런가, 최근에는 열심히 감탄하고, 감동하고, 감격하며, 호들갑을 떤다.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기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열심히 그래야지 다짐하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초량의 계단을 상징하는 168계단. 사진 김비
초량의 계단을 상징하는 168계단. 사진 김비

계단과 모노레일, 그리고 사다리

이따금 지금의 내 평온이 결핍의 결실인가 느껴질 때가 있다. 덕분에 태생과 다르게 강해진 면도 있긴 한데, 그렇다고 그 결핍을 누구에게도 권할 마음은 없다. 나에게는 자식이나 후손이 없겠지만, 나 역시 미래 세대인 아이들을 보면 그들이 부족함 없이 자라기를 바라고, 별일 없기를 바라고, 웃는 날만 계속되기를 바라는 평범한 한 사람이니 말이다.

내가 특별히 이타적인 마음을 품어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린 누구나 타인의 행복에 같이 행복해지고, 타인이 울 때 같이 울게 되며, 타인의 기쁨에 괜히 나까지 울컥해지는 그런 순간을 안다. 나도 왜 그런지 알 수 없는 이 자동적인 감각이, 생김이나 태생, 혹은 다리 사이의 그 모양과 상관있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경계와 친근함을 동시에 품을 수 있는 게 인간인 걸 보면, 훼손되었거나 왜곡되었을 뿐 우리를 살게 하는 그 뿌리에 그러한 마음이 내재되었다고 확신해도 괜찮지 않을까? 우리가 염려해야 하는 건 우리의 뿌리가 아니라, 훼손과 왜곡의 뿌리인지도 모른다.

초량 언덕에 무수히 많은 계단을 맨 처음 만든 게 제 집으로 돌아가려는 그곳 주민들의 의지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좀 뭉클했다. 온통 산비탈이던 구봉산 자락에 가족들과 살아남기 위해 제 손으로 판자를 엮고 집을 지었지만, 가파른 언덕은 피할 수 없는 고난이었고 그래서 떠올린 해결책이 계단이었다.

비탈에 사는 누구라면 이제 계단은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는 오르내리는 방식이지만, 그 언덕에 처음 계단을 만든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그걸 보고 자신의 집 앞에도 계단을 만들고, 또 다른 사람이 만들고, 모두가 같이 오르내려야 하는 큰길에는 더 넓고 단단한 계단을 만들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제 집 문 앞에나 가닿고자 만든 길이었겠지만, 결국 그 모든 길은 하나로 만나 이어졌고 비탈을 가득 채운 곳곳에 계단은 그곳에 사는 모두를 위한 계단이 되었다. 모든 삶을 밀어올린 그 의지의 역사가 되었다.

그리고 2016년, 그곳에 사는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168계단 옆에 모노레일이 설치 되었다. 변화를 직면하는 일이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모노레일을 설치하는 과정에 반대 의견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오직 단 하나, 매일 그곳에서 살아가야 하는 주민들 당사자만을 고려해 결정은 내려졌고, 모노레일은 까마득한 높이의 계단과 나란히 설치되었다. 모노레일을 반대했던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흉물처럼 보이겠지만, 관광객들에게는 그저 놀이기구처럼 기억되겠지만, 그곳에 살았고, 살고 있고, 여전히 살게 될 주민들에게는 결코 사소하다고 할 수 없는 매일의 수고를 덜어주는 결정이었을 것이며, 나는 그 결정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그곳에 주민이 아니지만, 고통받는 타자는 나로부터 멀지 않다는 그 감각을 공유할 때, 최소한 팽개치지 않을 때, 다른 장소 다른 시대에 또 다른 이름의 주민으로서 내 몫의 삶은 존중받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여전히 누군가는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모노레일이 아닌 계단을 오르고 계단에 앉아 쉬기도 하며 계단을 잊지 않고 있을 테니, 모노레일의 삶과 계단의 삶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같은 곳에서 출발해 같은 곳에 도착한다는 오직 그 하나의 순리만큼은 결코 변할 수 없으니, 우린 같은 길 위에 같이 있을 뿐이다.

나는 지금 그곳 초량에 관한 소설을 집필 중이지만, ‘사다리’에 관해 적어야겠다고 생각한다. 물론 계단도 모노레일도 사다리도 모두 비유적인 언어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계단이나 모노레일이 아니라 왜 하필 사다리인 거냐고 묻겠지만, 나는 계단을 오르고 모노레일을 타야 하는 그들의 시간 속에, 그들의 마음속에, 각자의 사다리가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 사다리는 모두 다르고 왜 다른지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서로 다른 크기와 모양의 그것을 들고서 ‘오르고야 말겠다’는 의지와 꿈을 움켜쥘 수 있었을 것이다.

사다리를 오를 수 있는 우리였으니, 올라보겠다는 마음을 품을 수 있었으니, 그래서 우리는 계단을 만들고 모노레일을 만들 수 있는 우리가 되었던 게 아닐까, 나는 조심스럽게 짐작한다.

부산 초량동 168계단 모노레일 안 사람들의 모습. 그림 박조건형
부산 초량동 168계단 모노레일 안 사람들의 모습. 그림 박조건형

‘누구든 오를 수 있다’는 메시지

차별금지법은 고작 사다리를 오를 수 있게 해달라는 요구다. 내 사다리는 내가 오를 테니, 그 사다리를 갖게 해달라는 요청이다. 언젠가 우리의 사다리는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을 위한 계단으로 이어질 테고, 모노레일을 앞에 두고 격론을 벌여야 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가 사는 여기 이 사회는 모두에게 오르내릴 길을 내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우리 사다리 정도는 받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할 수 있는 게 아니냐는, 확인이고, 부탁이다. 고작 사다리 가지고 무얼 하겠느냐고, 당신들이 그걸 오를 수 있기나 하겠느냐고 누군가는 걱정을 핑계삼은 조롱을 버릇처럼 쏟아내겠지만, 그래도 당신이 가져본 것을 우리도 가져야 하는 것 아니냐는 당연한 요구다.

풀밭에 들보를 얹는 일과 다름없을 인간의 역사에 차별금지법이 계단이 될지 모노레일이 될지 알 수 없지만, 구덩이 안에 갇혔던 누군가의 ‘사다리’가 될 것임에는 분명하다. 어디에 받쳐야 하는지 알 수 없어, 받칠 곳이 없어 혼자만 움켜쥔 꿈이 자리를 찾을 때, 그는 기어이 어떤 비탈을 오를 열망을 품을 수 있을 것이고, 자신의 방식으로 오를 것이다. 우리의 자손이거나 지인이거나 미래 세대의 누군가에게, 그 사다리는 ‘누구든 오를 수 있다’는 이 시대의 중대한 메시지가 되어줄 것이다.

할 수 없다고 어차피 안 된다고 자멸하지 않고, 불가능성의 비탈을 올려보며 단단하게 받쳐 의지하게 될 그것. 몸으로든 입으로든 힘있게 움켜쥐어, 기어이 매달릴 수 있게 할 그것이.

김비 소설가. 50대에 접어들어 성전환자의 눈으로 본 세상, 성소수자와 함께 사는 사람들과 그 풍경을 그려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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