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평범한 대한민국의 학생입니다. 제 소개를 다시 하자면, 저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성소수자 중학교 2학년(곧 3학년이 될) 학생입니다.” 지난달 3일, 한 독자가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한겨레S> 1월1일치 “요즘 세상에도 차별이 있냐고요? 나의 일터에 학교에 일상에 있죠”(이종걸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공동대표 인터뷰) 기사를 보고 곧 본인의 이야기라면서요. 자신의 마음이 많은 사람들에게 가닿으면, “세상이 조금 바뀔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메일을 보내본다”며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습니다. 용기 내어 이메일을 보내온 정지호(가명) 학생을 두 차례에 걸쳐 서면·전화 인터뷰로 만났습니다. 그의 목소리를 정리해 담습니다.
차별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차별금지법은 지난해 6월 국민동의청원 요건을 갖춰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로 넘어갔지만, 논의되지 못한 채 2024년 5월까지로 심사가 미뤄졌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뉴스레터 공짜 구독하기 https://bit.ly/319DiiE
저는 중학교 2학년에서 3학년으로 넘어가는, 이틀에 한번꼴로 풀어야 하는 수학 숙제 100문제에 허덕이는 평범한 학생입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제 성적 정체성을 확인한 뒤 하루 중 가장 오래 머무는 공간인 학교에서 성소수자에게 수많은 차별이 난무한다는 걸 느낍니다.
2학년 첫 학급회의를 앞두고 처음으로 학교 교칙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교칙엔 성소수자를 염두에 둔 내용이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야심차게 회의 안건을 제출했습니다. 교칙에 쓰인 양성평등이라는 말을 성평등으로 바꾸자고요. 그리고 여학생들이 바지 교복을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남학생들에게도 치마 교복을 선택할 자유를 주자고요.
남학생 치마 교복 안건에 대해선 갑론을박이 일었습니다. 친구들 몇몇은 여성, 남성이 아닌 다른 성정체성을 가진 친구들이 불편함을 느낄 수 있으니 찬성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친구들이 교칙이 바뀌어도 남학생들은 치마를 안 입을 것이라고 단정하고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내용이라며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저는 2학기 때 직접 학급 부회장이 되어 이 안건을 가지고 전교 회의인 대토론회에 나섰습니다. 여전히 의견이 갈렸고, 교감 선생님에게 올라간 안건은 다음과 같은 답변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안 된다,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내용이다”라고요. 저는 교감 선생님 말씀에 대한 반대 의견을 담은 편지를 써서 교장 선생님, 교감 선생님, 그리고 각 학년 부장 선생님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이 내용은 현재 학생회 정식 안건으로 남아 있는데요, 새 학기에 다시 토론에 부쳐질 예정입니다.
이외에도 학교에서는 수많은 차별이 존재합니다. 저는 인권 교육, 성평등 교육을 들을 때마다 성소수자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씁쓸합니다. 친구들은 ‘게이’, ‘레즈비언’, ‘트젠’(트랜스젠더) 등의 말을 누군가 비하하거나 놀릴 때 욕처럼 사용합니다. 친구들이 이런 말을 일상적으로 해도, 선생님들이 특별히 제지하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성교육을 할 때, 다양한 성정체성에 대해서도 설명해주면 좋겠어요. 성소수자 친구들이 자신의 성정체성을 찾을 때 대부분 인터넷에 있는 정보에 기댑니다. 맞는 내용도 있지만 가치 판단을 하기 어려운 정보도 있잖아요. 학교에서 정식으로 설명해주면, 자신의 성정체성에 혼란스러운 친구들이 ‘나도 틀린 존재가 아니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요.
저희는 ‘존재하는 존재’잖아요. 존재하는 이들의 당연한 권리에 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지 저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도 상처받는, 똑같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인데 왜 차별을 자제해달라고 말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때때로 제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마음이 쪼그라들 때도 있어요. 1학년 때 제 성정체성을 규정하며 궁금한 게 많아 여러 자료를 인터넷으로 많이 찾아봤어요. 어느 날 어머니께서 컴퓨터 쓸 일이 있어 제 노트북을 빌려갔습니다. 그날 밤 어머니가 “좀 심각한 얘기 할 게 있는데, 내일 이야기하자”라고 말씀하셔서 ‘들켰나’ 싶어 엄청 떨리고 무서웠어요. 그런데 다음날 어머니가 꺼낸 얘기는 영어 학원 어디로 옮길 건지에 대한 거였어요. 저 자신을 숨기게 되니 가끔 부모님과 서먹한 기분이 들어요. 거짓말을 못 하는 성격이라 부모님께는 얘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정말 자주 드는데, 솔직히 제가 커밍아웃을 하면 두 분이 혐오하거나 반대하지 않으시겠지만 , 그렇다고 온 마음을 다해 지지해주시진 않을 것 같아요 .
그나마 마음 터놓고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친구들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학교는 제게 안전한 울타리가 아니지만, 그래도 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친구들이 있거든요. 학교와 학원에서 친한 친구 열명 남짓에게 제 성정체성을 알렸습니다. 말하기 전엔 너무 떨렸어요. 넌지시 얘길 꺼냈을 땐 긍정적이었는데, 막상 그 당사자가 저라고 하면 거부당할까봐요. 여자인 친구 예닐곱명, 남자인 친구 두명이 제 성정체성을 알고 있습니다. 그중 한명은 본인도 자신의 성정체성이 헷갈린다며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성소수자 또래 친구들이 모여 있는 오픈 채팅방에 들어간 적이 있어요. 시험 기간이라 공부해야 해서 그 방을 나오긴 했는데, 그때 친구들을 보면 커밍아웃을 했다가 친구들이나 가족에게 거부당해서, 고백이 가정 폭력으로 이어져서, 자해를 하거나 가출을 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저도 주변에 저를 마음 깊이 이해하는 친구들이 있지만, 학교에서 제 성정체성이 밝혀져 왕따를 당하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저는 틀린 존재도, 남들과 다른 존재도 아닌 평범한 학생입니다. 학교 갔다가 집에 들러서 숙제하고, 밥 먹고, 학원 갔다가 집에 와서 숙제하다 놀다가 자는 게 일상입니다. 인스타그램에 ‘공스타그램’ 계정을 운영하며 학생으로서 열심히 사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하기도 하고요. 하루에 짧게는 2~3시간, 길게는 5시간씩 하는 학원 숙제가 힘들어서 고민이고, 얼마 전 배우기 시작한 기타 연주는 너무 재밌는, 그런 평범한 청소년입니다. 인권 변호사가 되어 국회에 진출한 다음 대통령이 되어 저 같은 소수자들을 위한 정책을 펴고 싶은 원대한 꿈이 있는 학생이기도 하고요.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이런 제 일상을 좀 더 일상답게 누릴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차별을 차별인 줄 모른 채 차별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행동하는 일이 줄어든다면, 좀 더 안정적인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의 존재를 나라에서 인정하고 보호해준다는 사실만으로도 소수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바뀔 것이라고 생각해요. 제 정체성이 들통날까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삶, 평등하고 평화로운 삶, 대한민국의 평범한 청소년인 제가 이걸 바라는 게 허황된 꿈은 아니겠죠?
정리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