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민도 코로나19 피해에 똑같이 신음하는 사람이자 국가로부터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을 제공받을 권리를 가진 동료 시민이다. 사진은 지난해 9월 추석 연휴를 앞두고 붐비는 서울 중구 국립중앙의료원 코로나19 선별진료소 앞. 연합뉴스
※ ‘차별금지법 있는 나라’ 릴레이 연재는 <한겨레>와 차별금지법제정연대가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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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연·지연·혈연, 무엇 하나 의지할 구석이 없는 대한민국에서 맨땅에 헤딩한 지도 8년이 됐다. 중국에서 태어나 20년 가까이 살다가 유학을 목적으로 입국해 학부 과정을 마친 나는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성’을 갖춘 예비 사회인이 되어 있다. 하지만 국적과 출신을 묻는 순간 나는 절대다수의 공적 시스템에서 배제되는 비국민이자 ‘비정상성’을 지닌 사회적 소수자로 전락한다. 조선족, 중국동포, 재중동포, 한국계 중국인. 호명되는 이름만큼이나 우리의 삶은 차별과 혐오에 파편화되어 있다.
가끔 한국 사회의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잊으려는 즈음에 그것을 각인시켜주는 발화들이 있다. “한국어 잘하네요”와 같이 모어 화자들―한국인 사이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표현이 이주민을 향할 때 그것은 ‘칭찬’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게 된다. 언제부턴가 이주민의 한국어 실력은 사회 적응과 정착의 성공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다. 그리고 한국어 능력 부족으로 겪게 되는 여러가지 사회적 불이익은 전적으로 개인의 책임으로 귀결된다. 일례로 백신 접종을 연일 강조하는 정부의 사전예약 시스템은 여전히 한국어로만 접근할 수밖에 없다.
외국인만 PCR 명백한 낙인효과
“한국 사람 다 됐네요.” 역시 한국 사회로의 철저한 동화와 온전한 한국인에 대한 욕망만이 치열한 인정 투쟁에서 살아남는 길임을 속삭인다. 그리고 거기에는 당신이 어떻게 노력한들 한국인의 범주에 소속될 수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나는 “고향이 어디예요?”라는 물음 또한 불편하다. 언뜻 관심과 호기심에서 비롯된 질문처럼 보이지만, 당신의 존재가 지금 ‘여기’에 있기에는 위화감이 든다, 당신이 장차 돌아갈 곳―‘저기’는 따로 있다는 메시지로 다가온다. 위와 같은 발화 외에도 한국 사회의 제도와 정책은 이주민의 이방인 신세를 끊임없이 주지시켜준다.
팬데믹은 코로나바이러스 외에 차별 바이러스와 혐오 바이러스도 걷잡을 수 없이 전파했다. 코로나 사태 초기, 바이러스가 중국 우한에서 시작됐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중국인은 기피와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바이러스 발생 이전부터 한국에 체류하고 있었던 중국 출신 이주민들조차 애꿎게 숙주나 보균자로 인식됐다. 이주민이 모여 사는 대림동과 가리봉동은 잠재적 집단감염지로 언론에서 대서특필됐다.
마스크 구하기가 한때 하늘의 별 따기였던 시절이 있다. 마스크 대란을 해소하기 위하여 정부는 2020년 3월부터 5월까지 마스크 5부제를 시행했는데 대상자는 한국 국민(국적자)과 국민건강보험에 가입된 등록 외국인으로 한정됐다. 나는 유학비자를 소지한 등록 외국인이긴 하였지만, 당시 유학생의 건강보험 가입이 정부에 의해 유예되어 마스크를 구할 수 없었다. 통계에 따르면 이러한 기준 때문에 국내 체류 이주민 250만명 중 125만명이 마스크 구매 자격을 부여받지 못했다.
생계 안정과 소비 촉진을 목적으로 지금까지 지급된 다섯 번의 긴급재난지원금에서도 이주민은 원천적으로 배제됐다. 그동안 선주민과 동일하게 소득세, 재산세, 주민세 등 세금을 납부해온 이주민에 대한 지급 제외는 조세 정의에도, 인도주의 원칙에도, 그리고 효과적인 재난 극복 방안에도 반하는 인종차별적 조치라 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는 납세 여부나 납세의 다소로 결정되지 않는다. 이주민은 한국인이 기피하는 산업 현장에서 경제적 기여를 해온 노동자 이전에 코로나 피해에 똑같이 신음하는 사람이다. 재난 상황에서 국가로부터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을 제공받을 권리를 가진 동료 시민이다.
외국인만을 대상으로 시행한 코로나 전수검사 행정명령 또한 명백한 차별이다. 이것은 마치 외국인이 체질적으로 더 쉽게 바이러스에 감염된다는, 더 위험한 존재라는 낙인효과를 초래한다. 검사의 명분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일하는 좁고 환기가 안되는 밀폐된 작업 환경이었다. 하지만 그런 ‘환경’에 노출된 사람 대신 특정 출신과 인종에 초점을 맞춘 행위는 어떠한 의학적 정당성도 없다. 코로나바이러스는 모두에게 똑같이 위협적이지만 사회는 선별하고 구분하기에 바쁘다. 그렇다, 재난은 평등하지 않다.
난 여기에도, 저기에도 있는데…
한국 사회는 지금도 조선족을 향하여 중국과 한국이 축구를 하면 어느 나라를 응원하는지 집요하게 묻고 있다. 중국을 답하는 순간 배신자로, 그렇다고 양쪽 모두라 답한다 해도 회색분자, 기회주의자로 몰리기 마련이다. 필리핀 출신 이자스민 전 국회의원은 재임 기간 출신국의 태풍 피해에 대한 복구 지원 결의안을 제출했다가 온갖 혐오 댓글에 시달려야만 했다. 이주민을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시선은 늘 그래왔다. 동화의 원리와 배제의 원리가 동시적으로 작동하면서 ‘여기’와 ‘저기’는 양립이 불가능하다.
“나는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다.” 영화 <버닝> 중에 나오는 대사이다. 이주민의 ‘자아’는 여기(거주국)에도 있고 저기(출신국)에도 있다. 그 말인즉 인간의 정체성은 오롯이 한가지로 환원되거나 규정되지 않는 복합적 산물이다. 당연하게도 그 정체성(들)으로부터 비롯되는 차별 또한 단일하지 않고 중층적·복합적이다. 이를테면 20대, 남성, 유(대)학생, 한국어가 능숙한 나와 40대, 여성, 한국어가 어눌한 결혼이민자, 혹은 50대, 남성, 일용직 외국인 노동자는 모두 이주민으로 호명되지만, 우리가 겪고 있는 차별만큼은 동일하지 않다. 성별, 장애 등 특정 차별만 다루는 개별적 차별금지법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필요한 이유이다.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다는 것은 캄보디아인 속헹이 숨진 비닐하우스, 새우꺾기가 자행되는 외국인‘보호소’와 같은 한국 사회의 음지를 외면하지 않고 연대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나아가 선주와 이주의 획일적 구분 대신 우리 모두 ‘임시적 비이주민’일 뿐이라는 선언적 외침이기도 하다. 우리는 단기적이거나 장기적으로, 자발적이거나 비자발적으로 집을 떠나게 되어 있다.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의 생산 라인에서 가장 먼저 익히는 말은 ‘안녕하세요’도 ‘감사합니다’도 아닌 ‘빨리빨리’라고 한다. 왜 유독 차별금지법 제정에서만큼은 한국 사회 특유의 빨리빨리 문화가 주효하지 않는지 묻고 싶다. 차별금지법은 가족, 고향, 익숙한 환경과 분리된 채 온갖 차별과 배제 가운데 파편화된 이주민의 삶을 회복하는 지름길이다.
박동찬 이주인권활동가
중국 선양(瀋陽) 태생 유학생, 한국살이 8년차 이주민 당사자. 절대적 환대와 코즈모폴리턴을 꿈꾸며, 이주민 인권 옹호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