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2월5일 장병 53명을 태운 채 한라산에 추락한 C-123 공군 수송기 잔해. 서재철 관장 제공
1982년 2월5일, 제주 하늘에는 먹구름이 짙게 끼어있었다. 옷깃을 여미게 하는 강한 바람은 제주도의 전형적인 겨울철 날씨였다. 이날 오후 1시30분 경기도 성남 서울공항을 출발해 제주공항으로 향한 공군 수송기 C-123기에는 특전사령부 최정예 707대대 요원들이 탑승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목적지에 닿지 못한 채 시계는 오후 3시15분에 멈췄다. 특전대원 47명과 공군 장병 6명 등 53명이 탑승한 군 수송기는 한라산 개미등 해발 1060m 지점에서 추락해 전원 사망했다.
대형참사였지만 당시 정권의 보도통제로 신문 사회면에 한두차례 실렸을 뿐, 거의 보도되지 못했다. 당시 국방부는 “이상기류에 휘말려 한라산 정상 북방 3.7㎞ 지점에 추락했으며, 자세한 사고원인은 조사 중”이라고 발표했다. 그 뒤 사망자 명단이 공개된 적도, 사고원인이 규명된 적도 없었다.
한라산 군 수송기 추락사고 이후 가장 먼저 사고 현장에 접근해 촬영한 서재철 전 기자. 서재철 관장 제공
참사 당일인 2월5일 늦은 오후 <제주신문> 사진부 서재철(75·현 자연사랑미술관장) 기자는 회사에서 동료들과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침 통신사 뉴스를 수신하는 텔레타이프에서 긴급뉴스가 타전될 때 울리는 ‘땡땡땡’하는 종소리가 편집국에 울려 퍼졌다. 텔레타이프 앞으로 기자들이 모여들었다. ‘제주도 해역에서 군 훈련기 추락’이라는 기사가 떴다. ‘추락 예상지는 추자도 근해’라는 기사가 기어졌다. 서 전 기자는 지난 25일 <한겨레>와 통화에서 “텔레타이프에서 기사가 계속 이어질 줄 알았는데 더는 나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제주 한라산국립공원 관음사탐방안내소 인근에 1982년 2월5일 숨진 특전대원과 공군 장병 등 53명을 기리는 충혼비가 서 있다. 허호준 기자
“제주공항이 국제공항으로 승격하면서 활주로를 확장해 이튿날 대통령 참석 행사가 예정돼 있었어요. 공군기들이 이착륙 시험을 하느라 왔다 갔다 하고, 바다에는 해군 함정들이 모여 있었어요. 날씨는 굉장히 좋지 않았어요. 마치 전쟁영화에 나올 것 같은 장면이 연출됐지요.”
서 전 기자는 다음날 제주도를 방문한 전두환 대통령이 참석한 제주국제공항 활주로 준공식 행사를 근접취재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한라산에 군 수송기가 추락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제주공항 취재가 끝난 뒤 그날 오후, 해발 1600m 한라산 윗세오름에서 적설기 훈련을 하던 등반대로부터 ‘밤새 조명탄이 쏘아 올려졌고, 굉음이 들렸다’는 말을 들었다. 왕관릉과 개미등을 거쳐 탐라계곡을 따라 관음사 코스로 내려오다 어두워질 무렵 사고현장을 확인했다. 다음날 현장으로 출동하던 특전사 수색대원들에게 따라잡히지 않도록 ‘마라톤 하듯이’ 눈길을 뛰어 사고현장에 도착했고 흑백필름 6롤을 찍었지만 보도할 수 없었다. 회사에서는 보도하지 못하니 필름을 모두 가져오라고 했다. 그는 필름 5롤만 제출하고 1롤은 따로 갖고 있다가 1989년에야 언론에 공개했다.
특전사 충혼비 주변에 전시된 C-123 공군 수송기 잔해. 허호준 기자
“말 그대로 처참한 모습이었다. 이미 군인들이 주검들을 많이 수습한 상태였는데 군 수송기 겉면의 위장천이 나무에 걸린 채 100~200m 잘렸고, 불발된 포탄들을 늘어놓은 게 보였다. 후다닥 사진만 찍고 등산객으로 위장해 내려왔던 기억이 있다.”
서 전 기자는 “1982년 5월 위령비 제막식 때 유족들이 거칠게 항의했다. `우리 자식은 하늘에서 내던져도 살아나도록 훈련받았는데 그렇게 처참하게 죽을 일이 없다. 뭔가 잘못된 거다’라며 난리쳤던 게 기억난다. 사고원인을 규명하라는 요구였다”고 말했다.
숨진 장병들의 100일제를 계기로 그해 5월15일 결성된 특전사 2·5유족친목회는 전두환씨가 대통령에서 물러난 뒤인 1988년 12월 “하늘의 뜻을 무시하고 군인은 죽어도 좋다는 ‘살인마 일당’을 철저히 규명해 처벌하고, 악조건의 기후임에도 자기의 출세를 위해 권력 앞에 충성을 아부해 위험 사실을 알고도 죽음의 길로 보낸 특전사령관 이하 책임자를 처벌해달라”는 내용의 청원서를 국회의장에게 보냈다.
지난 2015년 충혼비 비문 내용 가운데 ‘대침투 작전 훈련 중’을 ‘대통령 경호 작전 중’으로로 바뀐 안내판이 걸려 있다. 허호준 기자
이듬해인 1989년 9월17일 처음으로 현재 충혼비가 세워진 한라산국립공원에서 첫 위령제가 진행됐다. 보슬비가 내리는 현장에서 유족들은 취재기자에게 매달려 관련자들을 살인 혐의 등으로 처벌해달라며, 사고원인을 규명해야 한다며 울부짖었다. “당시 특전사령관인 박희도가 사고가 나자 대통령 경호임무인 ‘봉황새 작전’을 조작하기 위해 다음날인 6일 오전 8시45분 5전술 공수비행단 707대대장에게 임무 명칭을 ‘동계특별훈련’(대간첩 침투작전)으로 바꾸도록 지시하고, 장병들이 대간첩 침투작전 훈련 중 순직한 것으로 사건을 처리해 국민과 유가족을 기만했다”는 주장이었다.
유족들은 그해 12월 서울지검에 전두환과 당시 주영복 국방부장관, 이희근 공군 참모총장, 박희도 특전사령관을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직권남용 등을 죄목으로 고소했지만, 1992년 12월 ‘혐의없음’과 ‘공소권 없음’으로 사건은 종결됐다.
25일 찾은 특전사 충혼비가 세워진 충성공원에는 충혼비와 당시의 군 수송기 잔해, 사건 경위를 설명하는 안내판 등이 자리하고 있다. 낙엽들이 쌓인 특수부대의 상징인 검은 베레 조형물 아래 ’안 되면 되게 하라’고 새긴 글귀가 눈에 들어왔고, 충혼비 양쪽에는 태극기가 꽂혀 있었다. 뒤쪽으로 돌아가 마주친 유리관 안에는 군 수송기의 잔해와 군인들의 숟가락 등 소지품이 진열돼 당시 처참했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한쪽 면에는 사고수습 사진들이 전시돼 있었다. 맞은편에는 수정 전 ‘대침투작전 훈련 중’이라는 충혼탑 비문이 수정 뒤 ‘대통령 경호 작전 중’으로 바뀌었다는 안내판이 눈길을 끌었다. 비문의 문구가 수정된 시점은 불과 6년 전인 2015년이다.
1982년 2월5일 C-123 공군 수송기가 추락한 지점.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참사 현장을 목격한 이들과 유족들은 53명에 이르는 장병이 몰사한 데 대한 정부의 책임있는 조사가 이뤄진 적이 없다며 악천후 속에 무리하게 비행하게 된 경위와 작전명이 바뀐 이유 등을 밝혀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사건 발생 뒤 군은 사건 축소와 은폐를 위해 관련 경찰관들에게도 평생 발설하지 말 것을 강요했다고 한다. 사고 직후 빠른 현장정리를 위해 장병들의 주검은 마대자루에 담겨 옮겨졌고 항공기 잔해 등도 폭파처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충혼탑 비문에, 유족들이 무고한 희생을 불러온 주범으로 지목한 박희도 당시 특전사령관의 글이 새겨져 있는 점은 아이러니다. 1982년 5월15일 지은 충혼탑 비문 앞면에는 “네가 죽음으로서/우리가 살고/조국은 지켜지리니/검은 베레는 죽어서 영원히 산다”. 뒷면에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젊은 나이에 생명을 바친 육군 특전부대 검은 베레 장병 47명과 공군 장병 6명의 거룩한 희생과 충혼을 기리고자 이 비를 세웠다”는 박 전 사령관의 글이 새겨져 있다.
“네가 죽음으로서 … 조국은 지켜지리니”라며 억울한 특전사 요원들의 죽음을 왜곡한 박희도는 5공을 상징하는 정치군인 가운데 한명이다. 1979년 12·12사태 당시 1공수여단장(준장)으로서 군 사조직 하나회 선배였던 전두환의 지시를 받고 휘하 병력을 동원해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한 정권창출 1등 공신이었다. 전씨의 최측근 실세였던 그는 특전사령관에 올랐고, 이 사건을 덮고 넘어간 뒤 육군참모차장을 거쳐 육군참모총장에 오르는 등 5공 시절 내내 출세가도를 달렸다. 최근까지도 태극기부대로 활동하며 박근혜 탄핵반대 집회 때 모습을 드러냈으며, “전두환 대통령은 애국자”, “5·18은 북한이라는 불순세력이 개입한 사건”이라고 발언해왔다.
자신을 경호하기 위해 출동한 최정예 요원들이 몰살당한 이 참사와 관련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던 전두환씨는 지난 23일 세상을 떴다. 박 전 사령관은 전씨 장례기간 내내 빈소를 지켰다고 한다.
허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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