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청교육대 최장기수였던 민통선평화교회 이적 목사.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전두환씨가 사망했다고 끝난 것이 아니다. 죽음은 모든 것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 없다. 아직도 전씨와 함께 범죄 행위를 저질렀던 수많은 자들이 살아있다. 삼청교육대 훈련 현장에서 활동한 중대장과 대대장 등도 모두 살아있다. 포기하지 말고 (과거 국가폭력에 대한) 진상규명을 해내야 한다.”
삼청교육대 최장기수로 3년 넘게 고통을 당했던 민통선평화교회 이적(65) 목사는 전두환씨의 사망에 대해 “끝나지 않았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 목사는 지역 신문 기자 시절이던 1980년 8월, 신군부가 만든 삼청교육대로 끌려가 4주간의 ‘순화교육’을 받은 뒤 파주 28사단에서 1년여간 강제노역을 해야 했다. 1981년 1월 계엄령은 해제됐지만 이 목사는 출소하지 못한 채 2년을 청송보호감호소에 수용돼 옥고까지 치렀다. 삼청교육대는 정부에 비판적이거나 범죄 전력이 없는 무고한 시민, 노숙인들을 ‘사회정화’라는 이름으로 잡아들이던 곳으로, 전씨 정권의 대표적인 인권침해 사건이다. 삼청교육대 사건으로 1980년 8월부터 12월까지 검거된 시민은 약 6만명으로, 이 중 4만여명이 26개 사단에 분산 배치돼 ‘교육’이라는 이유로 폭력과 고문을 당했다.
“전씨의 죽음으로 한 시대가 마감됐다. 그가 죽기 전 ‘반성하고 사과한다’는 한 마디는 남길 줄 알았는데 (그러질) 않았다. 일반 국민들은 전씨가 나쁘다고 욕할 뿐이지만, (전씨에 의한) 국가폭력 피해자들은 ‘내 손으로 죽이지 못해 원통하다’고까지 말한다.”
전씨는 반성문 한 줄 쓰지 않고 눈을 감았지만 이 목사의 싸움은 끝나지 않는다. 그는 삼청교육대 피해자들을 모아 지난 16일 서울중앙지법에 국가배상 소송에 나섰다. 이번 소송에서는 10명의 피해자가 소송을 제기하고, 2차 소송도 예정됐다. “삼청교육대 출소 뒤 후유증으로 죽은 사람, 반신불수가 되어 평생을 사는 사람도 많다. (많은) 피해자가 저학력에 노동력을 잃고, 노숙자로 살거나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살아간다.”
이 목사 역시 보호감호소에서 나온 뒤에도 경찰과 지역 주민의 감시를 받으며 생활하다가 1987년 6월 항쟁을 겪은 뒤 신학교에 복학해 현재까지 목사로 일하며 평화운동을 하고 있다. 이 목사는 “(퇴소한 뒤에도) 집에서 2㎞ 전방을 넘어 외출하면 경찰에 신고하고 갔다. 이런 상황에서 직장도 구하기 어려워 이삿짐센터에서 생계를 해결하다가 야학을 설립해 국어 선생으로 일하기도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 목사는 “전씨의 가족이라도 진정한 반성을 해야 한다. 노태우씨마저 그 가족들이 광주 망월동 묘지를 찾아가 무릎 꿇고 참배했는데, 그보다 더 (중한) 범죄자인 전씨가 반성하지 않았다면 그 가족과 자손이라도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야 피해자들의 고통에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전씨 죽음으로 산적해 있는 국가폭력 사건 진상규명 노력이 약해지는 것은 아닐지 우려한다. “국가도 삼청교육대 피해자와 같은 국가폭력 피해자들을 스스로 찾아내야 하는데 기록이 소멸되고 있다. 하지만 5·18 유혈진압 당시나 쿠데타에 관여했던 세력들이 아직 살아있는 이상 포기하지 말고 진상규명을 해야 한다.”
장예지 기자
pen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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