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오전, 충북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호죽보건진료소에서 출발한 도보행진 참가자들. 서혜미 기자
지난 2일 오전 10시15분께, 충북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부근 시골 도로 옆길을 기자를 포함해 7명이 뚜벅뚜벅 걸어갔다. 앞서 걷는 이들의 옷 주머니와 가방에 꽂힌 무지개 손깃발이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 때마다 팔랑거렸다. 김성진(가명·54)씨는 경부고속도로가 지척에 보이자 목덜미에 꽂았던 무지개 깃발을 손에 쥐고 달리는 차량을 향해 흔들었다. 이들의 등이나 가방에 붙은 “차별금지법 백만보 앞으로 #평등길 1110”, “국회는 차별금지법 제정하라”고 적힌 천은 바람이 불 때마다 펄럭였다.
이들의 종착지는 국회다. 161개 단체로 구성된 차별금지법제정연대(차제연) 소속 활동가 2명은 지난 12일 부산시청에서 길을 나섰다. 차별금지법 연내 제정을 목표로 서울 국회의사당 앞까지 약 500km를 도보로 행진하겠다고 다짐했다.
이종걸 차제연 공동대표와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는 휴식일 3일을 제외하고 매일같이 예닐곱 시간 약 20km를 걷는다. 지난 2일 <한겨레>는 충북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호죽보건진료소에서 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신계초등학교까지 이어진 도보행진에 동행했다. 행진에는 지역 시민사회 단체 활동가들이나 참여를 신청한 일반 시민이 함께 참여한다. 이날도 지역 시민단체 활동가와 시민 등 모두 6명이 오전과 오후 교대로 번갈아 도보행진에 참여했다.
이날 오전 11시께, 일행을 안내하는 차량에서 친숙한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동요 ‘머리 어깨 무릎 발’의 가사를 바꿔 차별금지법이 필요한 이유를 11절까지 담은 노래였다. “다양한 삶을 존중하라”, “있는 그대로 존재하자”, “차별금지법을 만들자” 등의 노랫말이 바람을 타고 흘러갔다.
앞서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는 국회 국민동의청원은 지난 6월14일 10만명 이상의 동의를 얻었다. 국민동의청원은 청원 등록 뒤 30일 안에 10만명의 동의를 받으면 소관 상임위원회로 자동 회부한다. 법제사법위원회는 90일 안인 지난 9월11일까지 청원을 심사해야 했지만 심사를 연기했다. 2007년 첫발의 이후 14년 동안 발의와 폐기가 반복돼온 차별금지법의 역사가 반복될까 많은 이들이 우려했다. 미류 활동가는 “(국회가) 계속 연장 통지만 하게 둘 수는 없었다”며 “뭐라도 해야 했기 때문에 도보행진을 기획한 것”이라고 밝혔다.
2일 차별금지법 연내 제정 촉구를 위한 도보행진 중인 미류 활동가의 두 다리. 서혜미 기자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기자의 오금엔 통증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미류 활동가의 양쪽 종아리에 둘러맨 손수건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패션용으로 맨 것”이라고 웃었다. 사실은 매일 20km씩 이어지는 강행군에 다리를 보호하기 위해 두른 것이다. 이들은 무릎·발목보호대, 소염진통제 등에 기대 행진을 이어간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다시 행진을 재개한 오후 1시10분께, 버스정류장에서 마주친 시민은 박수를 치면서 “응원합니다”라고 소리쳤다. 일행은 “감사합니다“라고 화답했지만, 시민은 “그런데 이게 뭐예요?”라고 물었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기 위한 도보행진이라는 답을 듣자 “이게 효과가 있을까요?”라고 되물었다. 이날 새벽 6시께 서울에서 출발했다는 김성진씨는 “그래야겠죠”라고 대답했다. “오늘 안 오면 못 올 것 같아서…” 그는 도보행진에 참여하기 위해 휴무일이 돌아오는 걸 기다렸다고 했다. “주변에 차별금지법을 싫어하는 분이 계셔서 오히려 관심을 갖게 됐어요. 일상에서 차별을 안 받는 사람이 없을 텐데 관심을 갖고 본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는 법이잖아요.” 그는 버스정류장에 ‘평등길’이라고 적힌 동그란 스티커를 꾹꾹 눌러붙였다.
이종걸 공동대표는 “14년 동안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싸워온 사람들이 있다. 어떤 사람들에겐 소중한 권리가 유예됐다는 것이 자기 일처럼 와 닿지 않기도 하지만, 소수자들이 살기 쉽지 않은 조건을 바꾸기 위해서 싸우고 있다”며 “(정치권이)사회적 합의를 이유로 들지만, 저는 시민들은 바뀌고 있다고 생각한다. 바뀌지 않는 건 정치와 책임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두 활동가가 지난달 부산에서 출발했을 무렵엔 고개 숙인 황금빛 벼를 자주 지나쳤다. 이제는 단풍이 울긋불긋해지며 완연한 가을 날씨에 추수도 끝이 났다. 이들은 오는 10일 국회 앞에 도착할 예정이다.
21대 국회에는 차별금지법·평등법 4개가 발의돼있다. 지난 2일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원회 의장인 박완주 의원은 기자간담회에서 “정기 국회 내에 차별금지법 논의를 시작할 것”이라고 밝혔다.
2일 충남 천안시 동남구 성안면에 있는 버스정류장에 스티커를 붙이고 있는 김성진씨(가명) .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제공
서혜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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