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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핏] <더벨로> 반영재 “빵은 시간의 기술이다”

등록 2021-10-25 11:59수정 2021-11-17 09:57

플렉스! 몸에 맞는 삶 - [핏] 첫회
우리 밀로 첨가제 없는 빵 만드는
반영재 <더벨로> 대표를 만났다
반영재 베이커·더벨로 대표 | 대한민국 서울 양재동 &nbsp;
반영재 베이커·더벨로 대표 | 대한민국 서울 양재동  

▶플렉스! 몸에 맞는 삶

[핏]은 자신의 몸에 맞는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변화가 빠른 시대에서 자신의 삶을 어떻게 꾸려가고 있는지, 그들의 생각과 고민을 들어본다.
반영재의 핏
“옷은 계절별로 2-3벌만 입습니다,
처음엔 단정한 것이 중요했지만, 이제는 실용적인 것을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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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영재 (베이커, 사업가)
1982년 충북 음성 출생. 서울 양재동의 <더벨로(the velo bread factory)> 우리밀 빵집과 공장 대표. <브레드05>, 음성 <뚜레쥬르> 공장, 서울 삼성동 <라미듀>, <롯데호텔> 잠실점, <우드앤브릭> 본점, <뺑드빠빠>를 거쳐, 2010년 개포1단지 상가에서 <더벨로>를 시작, 이후 양재동으로 이전해 현재 식품의 위생관리시스템 해썹(HACCP)을 갖춘 공장과 빵집을 운영한다.

<더 벨로> 홈페이지: www.thevelo.co.kr
반영재 블로그: blog.naver.com/beatoutdaily

서울 양재천 남쪽 삼호물산 사거리 근처, 평범한 사무동 건물 1층에 우리밀로 빵을 만드는 <더 벨로>가 있다. 로비 한쪽을 나누어 빵공장을 꾸미고 입구 쪽으로는 작은 매대를 놓아 갓 만든 빵을 판다. 양재천 북쪽에 살기에 산책 나가면 가끔 들러 빵을 사곤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더 벨로> 홈페이지나 온라인 쇼핑몰을 통해 주문하는 게 편해졌다. 오며가며 안면을 익혔던 또래의 사장님도 만날 일이 없어졌다.

빵도 사고 인터뷰 얘기도 꺼낼 겸 오랜 만에 들르니 매대 뒤 빵공장 안에서 서너 명의 제빵사들이 각자 일에 여념이 없다. 눈만 빼놓고 머리부터 발목까지 하얀색 작업복을 입은 모습이 반도체 공장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게 공장 안을 한동안 주시하고 있자 인기척을 느낀 제빵사 한 분이 나와 주문을 받는다.

“대표님요? 배달 나가셨어요.” 기웃거리는 모습을 보고 눈치 빠른 답변이 돌아온다.

“아…” 순간 주문한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현관문 손잡이에 매달려 있던 빵 보따리가 떠올랐다. 그렇게 배달 나간 대표님은 우렁각시처럼 우리 집 현관문 손잡이에 온기 있는 빵 보따리를 걸어두고 사라지곤 했구나! 빵은 여전히 맛나지만, 코로나의 시대, 자영업 몰락의 시대에 그의 사업은, 삶은 괜찮은 걸까?

―코로나 상황에서 사업은 어떤가?

“오히려 더 나아졌다. <마켓 컬리>에서만 한 달에 3000~4000만원 정도 매출이 생기고 있다.”

―거래처가 줄지는 않았나?

“지금 규모에서는 최대로 빵을 만들고 있다. 카페와 같은 납품처가 250여 곳. 서울은 직접 배달하고 지방은 택배로 보내는데, 이튿날 도착한다. 거래처 중 큰 곳으로는 현대기아차 직원식당 정도다. 돈 될 거라고 단가를 후려쳐 가면서 무조건 거래를 트진 않는다. 오히려 하고자 하는 방향이 공유되면 작은 곳이어도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 크다.”

―운영은 어떤지?

“월매출은 1억, 순익은 10% 정도. 20%는 쉽지 않다. 월세 450만 원에 (직원들) 급여 3000만 원, 재료비가 2500~3000만 원 가량 든다. 그 외에 관리비·택배비·포장비·식대·기름값·보험료 등을 합하면 한 달 총 고정비가 7000만 원 이상이다. 내가 가져가는 건 1000만 정도인데, 그 안에서 집에다 500만 원을 주고, 대출을 200만원 갚는다. 대출은 많을 때는 600만 원까지 되기도 한다.”

―사업하면서 어려웠을 때는?

“계속 어려웠다. 여전히 빚이 1억 정도 있고. (식품의 위생관리시스템인) 해썹(HACCP)을 갖추느라 5000만 원 정도 은행 빚을 졌다. 시공하다 배관 사고가 난 적이 있는데 지하에 입주해 있던 영상 스튜디오로 물이 샜다. 시공주 책임이라 6000만 원을 물어주었다.”

―채용 기준은 어떻게 되나?

“면접을 1~2시간 정도 하는데, 왜 이 일을 하려고 하는지, 또 얼마나 어떻게 해 왔는지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빵 만드는 일은 힘들다. 그래서 오래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처음 마음과 달리 편하고 쉽고 싼 방식을 따르게 된다. 대부분 1년 안에 그만 둔다. 면접 볼 때 항상 나오게 되는 말이 “빵 정말 잘하는 사람은 오래한 사람이다”라는 것이다. 얼마나 (빵에) 시간을 썼느냐는 것. 꾸준한 게 제일 어렵다고 생각한다.”

―직원들은?

“지금은 8명. 근무시간은 아침 7시~저녁 6시 전후. 8시간 초과근무는 상여금으로 지급한다. 능력 대비 월급을 준다. 팀장 월급이 350~400만 원 정도이다. 능력이 하나 더 있으면, 월급도 한 단계 올라가는 식이다. 급여 기준을 만들어 공유하고 있다.”

―사장으로서 산다는 것은?

“새벽에 먼저 와서 반죽을 준비한다. 9시까지 마치고 직원에게 10~20분 브리핑을 하는데 우리밀 관련해 업데이트된 정보를 공유한다. 분위기도 돋우는 이야기들도 하고…. 주문을 확인하고 사무를 좀 본 뒤 11시에는 배달을 나간다.

내 일에 충실하려고 한다. 직원들도 그런 데에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내가 직원이었을 때 그랬으니까.”

―사업 확장에 욕심을 부리지는 않는 것 같다. 매장을 제대로 만든다거나 아니면 공장을 더 늘려 거래처를 더 만들 수도 있을 텐데.

“작은 사업이지만, 취미가 아니고 일이다. 안정이 우선이다. 한걸음이 10년쯤 된다면, 반걸음 앞을 계산해 꾸준히 가려고 한다.”

―빵 관련 일을 하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충청도 음성의 농촌마을에서 종가의 장남으로 나고 자랐다. 큰 땅은 아니지만 대를 이어 그곳에서 농사를 지었다. 시골 어른들이 다들 그렇지만 부모님도 ‘농사는 짓지 말라’고 하셨는데, 인문계 고등학교 올라가면서 사춘기가 정말 심하게 왔다. 학교를 안 가는 날이 많아졌고, 그렇게 몇 달을 보내자 어머니가 ‘하고 싶은 거 해라. 대신 책임은 져라’고 하셨다. 당시 내 취미가 <신디 더 퍼키>, <세씨> 같은 틴에이저 잡지를 보는 것이었다. 패션에 대한 관심보다는 글 읽는 재미로 보았는데, 거기 직업에 대한 칼럼 중에 요리학과, 제빵과에 대한 소개가 있었다. 2학년 올라가면서 요리를 하기로 결심하고, 담임 선생님께 야자 대신 요리학원에 다녀도 괜찮다고 허락을 받았다. 2학년 3월부터 매일 저녁 6시에 한 시간씩 걸려 청주 쪽 학원을 갔다. 다시 밤 9시 반에 학교로 돌아와 그날 만든 빵을 야자를 하는 친구들에게 나눠줬다.

솔직히 빵을 만들려고 요리학원에 간 건 아니었는데, 원장이 ‘요리의 시작은 빵’이라고 해서 제빵반에 들어갔다. 그런데 제빵반 선생님이 원장이었다. 우습지만 그렇다. 예비합격자로 혜전대 제빵과 01학번으로 들어갔다.”

―제빵과?

“당시에 인기가 많았다. 그런데 내가 생각했던 곳은 아니었다. 취업을 목표로 산업 일꾼들을 키우는, 좀 세게 말하면 대기업들의 인력사무소 같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직 제빵에 확신이 안 들었는데 그런 상태로 군대를 갔다.

제대 후 와인 바에서 알바를 하던 시절에 우연히 가수 ‘조용필’에 대한 다큐를 봤다. 1980년대를 회상하는데, 주변사람들이 다들 ‘걔는 미쳤다. 사람들 불러놓고는 밤새 음악 얘기만 하다가 끝난다’고 하는 거다. ‘나는 밤새 무슨 얘기를 떠들 수 있지?’ ‘빵에 미쳐 본 적이 있나?’ 고민스러웠다.

복학을 하고 나서는 일단 뭐든 열심히 했다. 우연히 학교 체육대회 마라톤에 나가게 되었는데 술·담배도 끊고 매일 뛰었다. 대회 당일, 다들 초보자들인지 처음부터 전력질주를 하더라. 컨버스 운동화를 신고 뛰었는데 2등을 했다. 기대하지 않고 있다가 상위에 입상을 하자 사람들이 날 보는 뭔가가 달라진 것이 느껴졌다. 나 스스로도 그렇고. 그 때 인생이 좀 바뀌었다. 제빵 대회를 준비하고, 친구랑 제빵 동아리를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졸업하고 일을 시작했다.”

―그동안 거쳐 온 빵집들은?

“2005년, <브레드 05>라고 교수님이 오픈한 빵집에 취업했다. 합숙하며 도제방식으로 일을 했다. 월급 70만 원에 새벽 5시부터 밤 10시 반까지 휴무도 없이 일했다. 같은 건물에 바로 벽 하나 사이에 두고 파리바게트가 있었는데, 저녁 7시면 (파리바게트에서) 팥빵을 100원에 팔았다. 경영상 도저히 답이 안 나오는 상황이었다. 당시 우리 빵집의 개점 구호가 ‘타도! 파바’였다. 6개월을 버텼다. 이후 롯데호텔, 한국과 일본 교토의 <라미듀> 등 대여섯 곳을 거치며 경험을 쌓았다.”

첨가제는 공정 시간을 줄이면서도 모양을 잡아준다.
하지만 농사의 비료같은 거다.
한 번 쓰면 헤어나올 수 없다.

―<더 벨로>의 시작은?

“2009년, 그간 모은 돈을 다 털어서 프랑스 파리 여행을 갔다. 13박14일간 빵만 먹었다. 샹젤리제 거리의 어느 골목에 아침마다 가는 빵집이 있었다. 한국에도 소개된 곳이었는데 제빵사 할아버지를 만나 악수를 하는 순간 깨달음이 왔다. ‘내가 바랐던 게 이 모습인데!’ 막 빵을 만들다 나온 80살의 노인. 롤모델을 본 것이다. 파리에 다녀온 다음, 학문적으로 기본부터 공부하자 싶어 일본 유학을 생각하게 되었다.

당시엔 커져가는 카페와 브런치 시장에서 소비할 만한 빵이 없을 때였다. 프랜차이즈든 개인 빵집이든 종류가 모두 비슷비슷하고, 카페에선 케이크가 보통이었다. 친구에게는 ‘지금 사업하기에 시기가 너무 좋다’며 납품공장을 권유했는데, 결과적으로 유학을 포기하고 함께 사업을 시작하게 됐다. 2010년, 2000만 원으로 재개발이 예정된 서울 개포1단지 상가에서 ‘보증금 500, 월세 30’에 6평 한쪽을 얻어 <더 벨로>가 시작됐다.

처음에 거래처가 될 만한 곳을 150군데 정도 접촉했지만 딱 한 군데서 연락이 왔다. 안 되겠다 싶어서 매일 업체들에 우리가 어떤 빵을 하는지 소개하는 손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업체들과 본격적으로 거래가 트였다. 주문이 들어오자 직원을 3명 더 뽑았다. 친구는 1층에 매장 겸 카페를 차렸고, 나는 2층 공장에서 빵을 만들었다. 10개월쯤 됐을 때, 빵 공장을 분리해 포이동으로 이전했다. 이때 우리밀을 시작하게 되었고.”

―우리밀을 시작한 계기는?

“당시 ‘로컬’이 중요해지고 있었다. 우리 땅에서 난 우리 것을 먹는 것. 우리밀로 빵이 가능할까? 아버지께 월동작물로 호밀을 부탁드렸는데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밀도 제분도 잘 몰랐다. 우리밀 전문가로서 홈베이킹 교육을 하는 ‘월인정원’님을 만나기도 하고, 테스트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한 달에 한 번 우리밀로 홈베이킹을 하며 아침에 빵 만들고 밤까지 얘기하는 형식의 모임을 3년간 이어갔다.”

―우리밀에 비전이 보이나?

“정부에서 1984년부터 밀 수매를 중단했다가 작년부터 다시 우리밀을 지원하고 있다. 자급률 5%를 목표(현재는 1% 수준)로 1000억 원을 쓴다고 한다. 쌀 1인당 연소비량이 50~60kg인데, 밀은 30kg다. 게다가 코로나 같은 상황에서 단일종(쌀)만 키우면 수입단가가 오를 때 경제에 치명타가 된다. 우리밀의 필요는 더 커질 것이다.

하지만 수매를 해도 사용처가 문제다. 우리밀은 품질이 균일하지 않아 많은 양을 소비할 대기업은 쓰지 않는다. 여러 지역 밀을 한 곳에 모아 빻으니 포대에 따라 빵맛이 달라진다. 밀은 종자에 따라, 때와 지역에 따라, 밭과 논인지에 따라 수분함량 및 질이 다르다. 삶고 찌는 건 상관없는데 발효되면 풍미에 차이가 크다. 밀가루는 제분인지 멧돌에 빻는지에 따라 또 다르고, 디테일하게는 멧돌의 크기까지 따진다(멧돌이 크면 낮은 온도로 갈아져 단백질이 덜 파괴되고 풍미가 커진다). 우리는 아직 (잘 정리된) 디테일이 없다.

정부 사람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생기면 우선은 지원금을 급식 사업에 쓰라고 제안한다. 전국에 급식지원센터가 80개소가 있다. 지방자치단체·학부모·영양사들이 참가하는 급식지원센터는 공장을 운영하며 더 좋은 먹거리를 찾는다. 급식지원센터에서 기반산업으로 우리밀 기술자를 양성하고, 취업을 연결해 주고, 제분사업·지역수매 등을 해야 한다. 또 아이들이 급식으로 나가는 우리밀을 먹고, 5~10년 후에 맛과 질을 아는 소비자로 성장시켜야 한다.”

―우리밀과 관련해 <더 벨로>에서 진행하는 일은?

“우선 나 자신은 우리밀을 경험하며 노하우를 담은 매뉴얼을 만들고 있다. 온도, 습도, 순서 등의 생산 체계를 늘려왔다. 온도 몇 도, 양은 몇 킬로, 효모의 양은 얼마인지 등 경우의 수를 팀장이 기록하고, 자료로 모으고 있다. 인력대비 능률이 오르려면 매뉴얼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제분기를 들여와 사용해 보며 제분에 관련된 내용도 넣을 생각이다. 긴 시간 여러 가지의 씨를 뿌려 ‘밭’을 가꾼다는 심정으로 하고 있다.”

―우리밀과 더불어 ‘첨가제가 없는 빵’도 하고 있다.

“일본에서 일할 때 보면 일본 빵집은 첨가물의 존재를 모른다. 공장만 첨가제를 쓴다. 반대로 한국은 기능사자격증에 기본재료 중 하나로 첨가제가 있다. 첨가제는 공정 시간을 줄이면서도 모양을 잡아준다. 종류를 늘려야 하는 빵집 입장에선 첨가제를 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첨가제는 농사의 비료같은 거다. 한 번 쓰면 헤어나올 수 없다. 빵은 시간의 기술이다. 발효시간을 무한대로 둘수록 빵맛은 좋아지는데, 3시간 발효한 빵에 첨가제를 넣으면 모양은 똑같고 맛은 없는 빵이 나온다. 첨가제가 좋다 나쁘다 할 순 없지만, 시장의 균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첨가제 없는 빵을 시도하자고 생각했다.”

―바빠 보인다. 여백이 생길 때는 무얼 하나?

“대학원(세종대 외식경영과)에 다니는데 ‘우리밀’을 주제로 논문을 쓰고 있다. 제분에 관한 책을 번역하기도 하고, 우리밀 관련 자료를 검색하고 모으기도 한다.”

―빵 말고는?

“예전엔 주말마다 아내와 딸, 셋이서 외출해서 걷는 게 취미였다. 종로의 서촌을 시작으로 홍은동, 구이동, 평창동 같은 데를 걸으면서 카페나 식당, 멀티플렉스 같은 곳도 가고... 코로나 이후에는 일주일 동안 제주도 한 번 다녀온 게 전부다. 책 읽고... 서점에 가서 <매거진 B>, <어라운드>, <내셔널지오그라피> 같은 잡지를 사기도 한다. 요즘엔 혼자서 위스키를 마시기도 하고. 감성적인 글을 좋아하는 편이다. 얼마 전엔 하루키 책들을 다시 읽어봤다. 공허한 느낌에 공감이 되더라. ‘공허’는 인생의 전부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서울 양재천
서울 양재천

―공허함?

“내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더 나아지고 싶고, 갖고 싶다가도 하나씩 내려놓게 된다. 이런 느낌은 사실 오래된 것 같다. 시골 집에서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는데, 언덕에 누워 하늘 보며, 음악 듣고 공상하는 게 취미였다. 그 시절부터 이어져 오고 있는 것 같다.”

―항상 음악이 틀어져 있다.

“1일 1CD만 하루 종일 틀어놓는다. 물론 요일마다 다른 걸로. 가게 시작 때부터 그랬다. 보통 잔잔한 재즈.” (미니콤포넌트에 ‘Bill Evans Trio - Portrait In Jazz’ 앨범의 음악이 흐르고 있다.)

―영화나 유튜브는?

“이와이 슌지 감독의 <4월 이야기>. 아직도 좋아한다. 사소한 것이라도 ‘설레는 마음’을 갖고 시작해야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게 나에게는 빵이 되었던 것 같고. 유튜브는 역사채널을 주로 본다. 조승연씨 채널을 좋아한다. 전쟁이나 중세 유럽 역사에 관심이 있다. 유럽의 암흑기라고 하지만 사실 고대 로마 시대보다 더 재미있는 시대였다.”

―블로그의 글을 보면 맞춤법을 자주 틀리기도 하는데 굳이 고치려 하는 느낌이 없다.

“실은 와이프한테 맞춤법 지적을 많이 받았다.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우습겠지만 그게 내 글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것 같다. 하하.”

―옷은 주로 무엇을 입나?

“처음엔 단정한 것이 중요했다. 이제는 실용적인 것을 산다. 색도 어두운 색으로만 산다. (지금 입고 있는) 흰티는 사실 실용적이지 않다. 신발은 조깅화를 신는다. 물론 공장에서는 가운을 입고. G마켓 중고 셀러들이 많은데, 티셔츠는 1만5천 원 정도면 산다. 안 입는 건 다 버린다. 예전엔 기부도 많이 했는데, 이젠 상태를 봐서 폐기하는 편이다.”

―차는?

“폭스바겐 폴로로 시작해서 지금은 골프 검정색. 실용적이고 엔진소리가 좋다. 계속 이 차를 탈 것 같다. 배달할 땐 레이 검정색을 탄다. 운전하면서는 그냥 93.1 라디오를 틀어놓는다.”

―집은?

“18평 빌라. 3억 전세다. 부모님이 처음에 5000만 원을 보태주셨다. 지금도 충분히 만족한다.”

―멋있는 사람?

“<지적자본론>을 쓴 츠타야의 CEO 마스다 무네아키. 전투적인 1세대 창업자들과는 다른 방식과 철학으로 시대의 상황을 읽고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다.”

―건강한 음식을 주로 먹나?

“그렇지 않다. 먹고 싶은 거 먹고, 기분 좋은 음식이 몸에도 좋다고 생각한다. 빵을 썩 좋아하진 않는다. 빵을 좋아한다고 빵 일을 시작한 사람이 오래하는 건 거의 못 봤다.”

―애착을 가지는 사물은?

“없다. 다 버리라면 버릴 수도 있다.”

―<더 벨로> 다음의 계획은?

“언젠가는 고향에 농사를 지으러 갈 생각이다. 밀밭을 만들고 싶다. 서울에서는 <더 벨로> 공장이 돌아가고, 나는 고향에서 거기에 들어가는 밀을 대는 것이다. 예전엔 평생을 땅 지키는 데 썼던 할아버지, 아버지가 답답했다. 그런데 땅이 끄는 힘이 있다는 것을 느낀다. 자란 곳에 대한 애틋함도 있고. 내려가면 전기를 쓰지 않는 원초적 빵굽기를 시도해 볼 생각이다. 크게 보면 지역에서 우리밀의 가능성을 찾고 도시와 순환되는 구조를 만들어 보고 싶다.”

―삶을 멋지게 만드는 핵심은 뭐라고 생각하는가?

“일은 수단이 아니라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일할 때 별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문제가 생기면 보완을 계속해 간다. 그 과정에서 얻어지는 것들에 만족한다.”

글·사진 이임정 기자 imjung@hani.co.kr
일러스트 김대중 mayseou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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