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동문고 학생들이 각자 자신이 쓴 책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동문고 제공
대구 성화중학교 3학년 권영서양은 지난해 선생님의 권유로 책쓰기 동아리에 가입했다. 한 달에 두세 번 모여 책의 주제를 잡고 글을 쓰고 제목과 목차를 정하고 표지를 디자인해서 책으로 펴내기까지 꼬박 1년을 매달렸다. 공식적인 동아리 시간 외에 틈틈이 글을 써서 선생님께 들고 가 조언을 받아 수정했고, 방학 중에 집중적으로 글을 쓰기도 했다.
다른 동아리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활동이었지만, 책이 출간되었을 때는 그 노고가 모두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권양이 동아리 친구들과 함께 성적, 진로, 외모, 가족 등 청소년의 고민을 담아 펴낸 <엄나들이>는 현재 인터넷 서점에서 만나볼 수 있다.
권양은 “책쓰기를 통해 앞으로의 전공과 진로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친구들의 고민도 알 기회가 되었다”며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글쓰기를 계속하고 싶고 언젠가 꼭 소설을 펴내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 교과수업·동아리 활동과 연계
글을 좀 쓴다는 어른도 엄두 내기 어려운 책쓰기에 도전하는 중학생, 고등학생 저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대구시교육청은 ‘학생 저자 10만명 양성을 위한 책쓰기 프로젝트’를 지원해 대구에선 올해에만 40권의 학생 저자 책이 출간됐다. 2009년 첫 책 <13+1>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교과 수업 연계 또는 동아리 활동을 통해 총 343종의 책이 세상에 나왔다. 절판이나 품절된 책이 아니면 인터넷 서점에서 살 수 있다.
김정희 장학사(대구교육청 미래교육과)는 “처음에는 아침독서 10분 운동으로 시작해서 이것이 삶쓰기 100자 운동으로 연결되고, 독서 토론과 한 권의 책쓰기 운동으로까지 이어지게 됐다”며 “교육의 본질이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하는 것인데, 그걸 알게 하는 데 책쓰기만큼 좋은 게 없다는 걸 발견하게 된 선생님들이 한번 책쓰기 지도를 시작한 뒤로 멈추지 못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중학생들에게 책쓰기는 자신을 돌아보고 성취감을 느끼는 기회가 된다고 한다. 지난 2월 동아리 친구들과 함께 <중딩들은 반성중>을 펴낸 대구 고산중학교 3학년 김민규군은 “내 이름이 박힌 책을 받아 보고선 이게 정말 내가 쓴 게 맞나 하는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며 “나에 대한 이야기를 쓰다 보니 자신에 대해 많이 성찰하는 기회가 됐다”고 말했다.
지난해 중학생들을 지도해 <대구데이>를 펴낸 김일식 대구 성화중학교 국어 교사는 “교사인 나도 처음에 시작할 때는 과연 책이 나올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시작하는데, 결과물이 나오면 아이들이 해냈다는 성취감이 커서 나 역시 보람이 크다”고 말했다. 대구 청소년의 눈으로 본 대구 관광 안내책인 <대구데이>는 아이들이 쓰는 구어체로 재미나게 쓰여서 다른 학교의 사회 교재로 쓰일 정도로 인기다.
책쓰기 동아리를 지도해 <중딩들은 반성중> <중딩들은 혁명중> <중딩들은 행복중> 등을 펴낸 김다정 고산중학교 사서 교사도 “지식을 정리하는 책을 쓰든, 소설을 쓰든 그 글에는 자신의 모습이 담겨 있어서 자신을 돌아보고 성장하는 계기가 된다”고 말했다.
대구 매천고 학생들이 책쓰기 동아리에서 함께 책을 읽고 질문을 하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잡아가고 있다. 매천고 제공
■ 자존감 회복하게 해준 포토에세이
고등학생의 경우, 책쓰기를 통해 삶의 위기를 극복하고 자존감과 자신감을 회복하기도 한다. 특히 특성화고등학교는 ‘수업 참여도 낮은 아이들이 책을 쓰는 건 불가능하지 않을까’ 했지만 외려 이 아이들이 가장 눈에 띄는 변화를 보였다. 13년째 여러 고등학교에서 책쓰기 활동을 지도해온 김묘연 국어 교사는 지금까지 자신의 지도로 출간된 책 10여 권 중 가장 인상에 남는 책으로 <동감>을 꼽았다. 특성화고 학생들의 포토에세이인 이 책은 인쇄된 500부가 금방 다 팔려서 현재는 전자책으로 팔리고 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자살과 자퇴를 많이 고민하고, 야간에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수업시간에 잠들어 있는 아이들에게 ‘진달래꽃’ 하나 더 가르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고민을 하다가, 자신의 마음을 사진과 글로 표현하는 책을 함께 만들게 됐는데, 솔직한 표현에 많은 청소년들이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책쓰기를 하는 과정에서 아이들이 자기 이야기를 하게 되고, 그러면 교사와 자연스럽게 상담이 되기도 하면서 밀도 있는 관계 형성이 돼서 자퇴를 생각하던 아이가 공부를 시작하게 되고, 부모가 없는 아이가 살아갈 힘을 얻었다고 고백하는 등 책쓰기는 실로 아이들에게 엄청난 변화를 일으킨다”며 “해마다 아이들이 성장하는 걸 느끼니까 책쓰기 지도가 힘들지만 그만둘 수가 없다”고 말했다.
13년째 책쓰기 활동을 지도하고 있는 대구 시지고등학교 이금희 수석교사(국어)는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내 인생도 괜찮고 나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느끼게 하는 게 책쓰기의 목표여서, 그런 표현력과 성찰력을 키워주기 위해 주로 ‘자서전 쓰기’를 주제로 책쓰기를 진행해왔다”며 “평소 수업 참여도가 낮은 학생들 중에서 책쓰기 수업에는 집중하는 아이들도 많이 나오고, 책을 쓰고 나서는 ‘나는 책을 쓴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되면서 자기소개서 정도는 그 자리에서 휘리릭 써내는 걸 보고 굉장한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대구과학고 학생들이 지난해 펴낸 과학시집 <시이언스> 출판기념회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대구과학고 제공
■ 시집 내는 과학고 학생들
성적과 입시 압박에 시달리는 일반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책쓰기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김묘연 교사는 “처음 책쓰기 동아리 활동을 지도했던 2009년, 다른 아이들이 수학 문제를 풀고 있을 때 책을 쓰고 있자니 자신도 불안하고 엄마들도 불안해했는데, 그 아이들이 점점 글쓰기를 통해서 숨통이 트이고 힘을 얻어서 성적이 오르고 대학을 잘 가게 되자 그다음해에는 ‘책을 쓰면 대학을 잘 간다’는 소문이 나서 동아리 지원자가 몰리기도 했다”며 “자기표현에 대한 즐거움이 무기력했던 아이들을 변화시켜 그 결과가 성적 향상으로 나타난 것 같다”고 말했다.
과학고 아이들도 출간 대열에 서기도 했다. 대구과학고 학생들은 <이과생이 풀어쓴 국어 문법>과 과학시집 <시이언스> <순수-수에 진심을 담다>를 펴낸 데 이어 지금은 환경적 실천에 대한 책을 만들고 있다. 아는 건 많지만 쉽게 풀어 쓰는 건 어려운 과학도들의 책쓰기 방향은 ‘정재승 박사처럼 글쓰기’다.
<이과생이 풀어쓴 국어 문법>의 공동저자인 박지현양은 “책쓰기를 통해 내가 알게 된 것을 남들에게 알려줄 수 있다는 점이 큰 보람이었다”며 “앞으로도 기회가 되면 여러 주제로 책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흥미롭고 재미있는 작업이었다”고 말했다.
특성화고든 일반고든 과학고든 상관없이 책쓰기에는 공통점이 있다. “3줄 이상 글쓰기가 안 되던 학생들도 책을 쓰고 나서는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책을 펴낸 그 뿌듯한 감정을 기억해내며 이겨낸다고 연락이 오는 등 제자들이 한결같이 책쓰기가 자신감과 자존감을 높여주었다고 말한다”고 김묘연 교사는 강조했다.
이러한 학생들의 책쓰기 바람은 부천과 서울 등 다른 지역에서도 불고 있다. 경기 부천시는 상동도서관 주도로 2년 전 지역 내 8개 중학교에서 ‘일인일저 책쓰기’를 시작해 내년까지 지역 내 모든 중학생들이 참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책쓰기 강사를 중학교에 파견해 17차시에 걸쳐 책쓰기를 지도해 지난 2년간 283종의 책을 펴냈으며, 펴낸 책들은 각 학교와 상동도서관에서 만나볼 수 있다.
서울시교육청은 2년 전 ‘협력적 독서 인문교육 프로젝트’를 발표하면서 “서울의 모든 학생이 ‘저자’가 돼 졸업 전까지 책 한 권씩은 쓸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2019년 중학교 50곳에 대한 시범 지원을 시작으로 올해는 전체 학교를 상대로 예산 신청을 받고 있다.
김아리 객원기자
ar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