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ㅣ강원국의 공부하면 뭐 하니
초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그 후 외할머니가 ‘엄마’ 역할을 해주셨습니다. 나는 자주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꿈을 꿨습니다. 엄마처럼 떠나가실까 무서웠습니다. 엄마 없는 손주가 측은했던지 할머니는 늘 용서하고 아량을 베푸셨습니다.
학교에 가기 싫어 내가 꾀병을 부릴 때, 그것이 거짓인 줄 아셨지만 담임 선생님에게 ‘손주가 많이 아프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나는 할머니가 나이를 먹어 내게 속는 줄 알았습니다. 시험기간만 되면 왜 그렇게 영화가 보고 싶던지. 그럴 때도 할머니는 영화표를 끊어주셨습니다. 항상 나를 품어주셨지요. ‘나는 우리 손주를 믿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래도 제멋대로 살지 않을 거야. 잘할 거고, 잘될 거야.’ 할머니는 눈빛으로 말하셨습니다.
아버님도 말없이 저를 지켜봐주셨지요. 어느 한순간도 저에 대한 기대를 놓지 않으셨습니다. 고교 입시에 떨어졌을 때도, 고등학교 때 정학을 맞았을 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언젠가는 정신 차릴 것이라는 믿음으로 지켜봐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알았습니다. 아버지 심정이 어떠한지. 나만 그렇지 않지요. 누구나 압니다. 죄송해서 모른 체할 뿐이죠.
외할머니는 10여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할머니 영전에 노무현 대통령의 조화가 놓였습니다. 제가 연설비서관 할 때였습니다. 나는 할머니에게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용기를 배웠습니다. 하고 싶지 않은 걸 참으면서 할 수 있는 끈기와 인내는 학교나 직장에서 가르쳐줬지만,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용기는 할머니가 주셨습니다.
아버지도 올해 구순을 넘습니다. 돌아보면 아버지의 기대는 세상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힘찬 격려가 됐습니다. 그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고,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다시 일어서 한발 한발 내디뎌왔습니다. 기대하지 않은 사람이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낼 순 없습니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기대가 필요합니다. 한 사람이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기대라는 자양분이 있어야 하지요. 나는 요즘도 힘들 때마다 아버지를 떠올립니다.
소도시 학교에서 글쓰기 강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강의하는데 여학생 한명이 훌쩍였습니다. 이유가 궁금했지만 물을 수 없었지요. 마침 질의응답 시간에 그 학생이 내게 질문했습니다. “저는 영어나 수학 같은 공부는 흥미 없고 그림을 그리는 게 재밌습니다. 오늘 선생님께서 앞으로는 창의력이 중요한 시대가 오고, 그럴 때 음악이나 미술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 각광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정말 그런 시대가 올까요?”
내게 질문한 학생은 미술을 시작하면서부터 성적이 떨어지고, 선생님과 부모님의 기대에서 멀어지면서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은 듯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공부를 하는 데 대한 대가가 너무 가혹했던 것이지요. 국·영·수 잘하는 학생은 당장 인정받습니다. 스스로 만족을 느낄 수 있고, 이대로 가면 잘될 수 있다는 확신도 듭니다.
이에 반해 예체능 전공하는 학생은 그것을 좋아해서 하지만 학교에서 그다지 인정해주는 것 같지 않습니다. 이른바 우등생이 아니니까요. 내가 이 길을 가도 될지 불안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국·영·수를 못해서 예체능을 한다는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서럽지요. 서글픔이 복받쳐서 울었던 것입니다.
과연 국·영·수를 잘하는 것과 음악·미술을 잘하는 것 사이에 우열이 있을까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를 뿐이지요. 굳이 서열을 지으라면 저는 음악·미술이 더 창의적인 역량을 필요로 한다고 답하겠습니다.
국·영·수를 잘하기 위해서는 입력 능력이 좋아야 합니다. 남의 말이나 글을 잘 이해하고 분석해서 중요한 것을 가려내고, 그것을 암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암기한 내용을 다른 유사한 것에 적용하고 응용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역량이 필요하진 않습니다. 남이 만들어놓은 걸 잘 요리하는 역량이 필요할 뿐이지요. 의학이나 법학 공부는 그런 역량을 요구합니다. 그런 능력만 있으면 잘할 수 있습니다. 창의적인 역량이라고 할 수 없지요.
선생님 말씀을 잘 듣고 교과서, 참고서를 많이 읽으면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생님이 보라는 데를 잘 봐야 합니다. 내가 보고 싶은 데를 보면 안 됩니다. 그건 한눈파는 것이고, 주의가 산만한 것입니다.
그에 반해 음악·미술은 다릅니다. 출력을 잘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표현을 잘해야 합니다. 남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 것을 만들어 보여줘야 합니다.
창의성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입력 역량은 인공지능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인간은 출력 능력으로 승부해야 합니다. 입력 능력은 출력을 잘하기 위한 조건일 뿐 그 자체로는 가치가 없는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남이 보라는 데를 잘 보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보고 싶은 곳을 보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남이 하라는 일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잘하는 사람이 많아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몇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개개인에 대한 존중과 다름의 인정, 실패와 실수를 받아들여주는 관용의 문화입니다.
나이 쉰살이 넘으면서 내가 보고 싶은 데를 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내 글을 쓰고 내 말을 하며 삽니다. 내가 나답게 삽니다. 그렇게 살면서 느끼는 게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그런 삶을 지향하며 살아야 합니다. 다음 세대들, 우리의 아들딸에게 학교는 과연 그런 환경을 만들어주고 있는 것일까요?
이번 주말에는 아들 데리고 아버님을 찾아뵈어야겠습니다.
강원국 ㅣ <대통령의 글쓰기> 저자
나는 할머니에게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용기를 배웠습니다. 하고 싶지 않은 걸 참으면서 할 수 있는 끈기와 인내는 학교나 직장에서 가르쳐줬지만,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용기는 할머니가 주셨습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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