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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딸 같아서’ 그랬다고요? 그건 ‘성범죄’입니다

등록 2018-11-27 09:17수정 2018-11-27 19:03

[함께하는 교육] 십대 성착취 문제, ‘그루밍 성폭력’

‘그루밍 성폭력’ 주 연령층이 14∼16살
취미·관심사·빈곤 정도 파악한 뒤
신뢰 얻고 고립시키며 성폭력 가해
가해자가 ‘보호자’ 자처하는 성범죄
피해 사실 인지 못하는 십대들 많아
“이제는 ‘가해 예방’ 교육이 필요해”
지난 11월6일 인천의 한 교회 남성 목사에게서 그루밍(grooming) 성폭력 피해를 당한 여성 청소년들이, 서울 한국기독교회관에서 가해자인 목사를 고발하는 기자회견 도중 서로 손을 꼭 잡은 채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지난 11월6일 인천의 한 교회 남성 목사에게서 그루밍(grooming) 성폭력 피해를 당한 여성 청소년들이, 서울 한국기독교회관에서 가해자인 목사를 고발하는 기자회견 도중 서로 손을 꼭 잡은 채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목사님이 ‘내가 딸이 없어서 너를 딸처럼 생각한다’라며 계속 밥 사주고, 아프다고 하면 약 사주고…. 가끔 따로 불러서 막 끌어안고 뽀뽀하더니,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된다고 그랬어요. 하나님이 우릴 사랑하듯 나도 너를 사랑하는 것뿐이라고요.”(17살 ㄴ양)

“그때는 그게 범죄인 줄도 몰랐지요. 국민학교 다닐 때 남자 선생님이 무릎에 좀 앉아보라고 하면서 몸이나 손을 계속 만지면 굉장히 싫었지만, 거부할 수가 없었고. 초·중·고 어딜 가든, ‘그런 남자교사’는 교내에 몇 명씩 항상 있었습니다.”(37살 ㄱ씨)

17살 고교생 ㄴ양과 37살 직장인 ㄱ씨. 스무 살 차이 나는 두 여성의 공통된 경험이다. 지난 11월16일 오후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ㄱ씨는 최근 뉴스와 신문기사에 오르내리는 ‘그루밍 성폭력’ 개념을 접하고 ‘어렸을 때 싫었던 그 순간이 바로 그루밍 성폭력이었구나’라고 깨달았다고 한다.

최근 인천 부평구 ㅅ교회 목사가 10여명의 청소년 신도들에게 그루밍 성폭력을 저질러온 사실이 밝혀졌다. 지난 6일 피해 학생들이 기자회견을 열었다는 기사를 본 뒤 ㄴ양은 자신도 그들과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걸 알게 됐다. 당시 상황을 피하지 못한 스스로에게 자괴감이 든다고 했다. ㄴ양이 전화 인터뷰 요청을 수차례 고사한 이유다. 성폭력 사건은 이렇듯 피해자가 이중고에 시달린다. 가해자의 입은 ‘잘못했다’를 말하지 않고, ‘딸 같아서’라는 핑계뿐이다. 어째서인지 ‘딸 같아서 성폭력을 저지르게 됐다’는 말이 아직까지 통용되는 사회다.

‘길들여 세뇌하는’ 그루밍 성폭력

‘탁틴내일 아동청소년성폭력상담소’가 지난 2014년 7월부터 2017년 6월까지 3년 동안 미성년 성폭력 피해자의 상담사례를 분석했다. 그 결과 접수된 성폭력 사례 78건 중 34건이 그루밍(grooming, 길들이기)에 해당하며, 피해 당시 연령은 14~16살이 44.1%, 11~13살 14.7%, 6~10살 14.7%로 분석됐다.

그루밍은 원래 주인이 자신의 취향대로 반려동물의 털을 손질하거나 몸단장하는 것을 뜻한다. 주인 마음대로 동물을 길들이는 행위에서 착안해, 피해자를 성적 대상으로 삼는 ‘길들이기 성범죄’를 뜻하는 용어로도 사용한다. 그루밍 성범죄자는 피해 학생의 고민을 들어주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공감해주며 조금씩 도움을 주는 등 호감을 산 뒤 심리적으로 지배한다. 피해자는 대부분 어린 여자 초등학생이나 여중고생이다.

ㄴ양은 “부모님과 싸운 뒤 속상한 마음을 털어놨더니 목사가 교회에서 자고 가라고 했다. 안전한 곳이라 생각했다”며 “그런데 밤에 목사의 손이 옷 속으로 들어왔고, 계속 만졌다”고 했다. 평소 목사가 집안의 경제적 어려움과 고민 등을 잘 들어주고 보호자 역할을 자처했던 터라 ㄴ양은 이게 범죄인지 아닌지조차 판단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ㄴ양은 “그저 기분이 안 좋은 채로,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이 ‘이상한 비밀’이 생겼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게 성범죄이고, 목사가 가해자라는 것을 안다”고 말했다.

ㄱ씨도 비슷한 말을 했다. 교실에서 절대적 권위를 가진, 하루 종일 자신과 친구들을 가르치고 돌보는 보호자인 교사의 말을 거절한다는 건 당시에는 상상해볼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10살 안팎의 초등학생들이 ‘무릎에 앉아봐라. 속옷 색깔 검사하겠다’ 등 교사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건 ‘나쁜 아이’가 된다는 뜻이었다.

오는 11월28일부터 12월9일까지 이화여자대학교 이시시(ECC) 대산갤러리에서 성착취 피해 아동·청소년 '오늘'전(展)이 열린다. '오늘'전(展)에서는 소위 ’조건만남’, ’원조교제’라 불리는 성착취 피해 아동·청소년들의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될 예정이다. 십대여성인권센터 제공

‘피해 학생 고르기’부터 ‘고립시키기’까지

그루밍 성폭력 가해자는 대부분 학교 교사나 학원 강사, 교회·절의 지도교사, 친오빠나 친척 오빠 등이다. 최근에는 연예 기획사 사장이나 매니저, 사회복지사와 돌봄교실 교사 등도 가해자로 나타나고 있다.

그루밍 성폭력에는 단계가 있다. ‘피해자 고르기→피해자의 신뢰 얻기→욕구 채워주기→피해자 고립시키기→관계를 성적으로 만들기→통제 유지하기’ 등 단계를 통해 피해 아동을 길들인다. 배상훈 프로파일러(전 서울지방경찰청 범죄심리분석관)는 “가해자는 피해 아동·청소년들의 취약점이 무엇인지 너무 잘 알고 있다”며 “아이들에게 잘해주면서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한다. 이 때문에 피해 학생들은 ‘저 사람이 나를 특별하게 생각하는구나’라는 착각에 빠진다”고 말했다.

특히 피해자의 신뢰를 얻는 단계에서, 아이를 관찰하고 취미와 관심사 등 정보를 수집하며 천천히 다가가 ‘우리는 특별한 관계’라는 인상을 준다. 아이와 쌓아온 신뢰 관계를 이용해 성폭력을 저지르는 것이다. 조진경 십대여성인권센터 대표는 “그루밍뿐 아니라 가스라이팅(gaslighting, 가해·피해 상황을 조작해 상대방이 판단력을 잃게 하는 정서적 학대행위)도 피해자들 입장에서는 성범죄 여부를 판단하기 힘들게 만든다”고 강조했다. 그루밍과 가스라이팅 모두 가해자가 성폭력 등 범죄 발생의 책임을 피해 학생에게도 캐묻는 악질 범죄라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18세 남성 청소년이 담배를 살 경우 해당 학생을 ’보호’하기 위해 어른들을 처벌한다. 그런데 대체 왜 성범죄에서만큼은 14세 여성 청소년을 남성 성인과 동일선 상에 놓은 뒤 함께 벌하는 걸까. 조 대표는 “피해 여학생은 어른들이 자신에게도 ‘책임’을 물을까 두려워 상담소나 경찰서에 신고할 수 없게 된다”며 “성폭력 피해를 당한 여성청소년을 위한 국가지원체계가 전무한 현실에서, 성착취 플랫폼을 제공하는 채팅 앱 운영자 등을 ’사이버 포주’로 인식해 제도 개선을 해야만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제는 성폭력 ‘가해 예방’ 교육이 필요하다

십대 인권 분야에서 오래 활동해온 전문가들은 “이제는 여학생 대상으로 ‘짧은 치마 입지 마라, 밤늦게 다니지 마라’는 등 피해자를 탓하는 ‘성폭력 예방’ 교육을 그만둬야 할 때”라고 입을 모은다. ‘피해자가 어리숙해서, 피해자가 당할 만해서’ 성범죄가 일어나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루밍 성폭력을 비롯해 모든 성범죄가 일어나는 이유는 단 하나, 가해자가 성범죄를 저지르기 때문이다.

외국에서는 그루밍 성폭력 범죄를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 영국은 지난 2003년 일명 ‘그루밍법’을 만들었다. 채팅 앱 등을 통해 성인이 만 16살 이하 청소년에게 성적으로 접근하는 모든 행위를 최소 10년 이하 징역형에 처할 수 있도록 했다. 실제 만나지 않고 대화를 통해 제안만 해도 처벌받는다. 캐나다의 경우 피해 학생들이 자신도 고소당할까 두려워하지 않도록 성착취 행위를 한 남성만 처벌한다. 특히 아동·청소년에 대해 ‘성매매’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아동 성착취’(child sexual exploitation)라는 표현만 사용한다. 캐나다 형법은 16살 미만 아동·청소년이 설령 자발적으로 ‘동의’했더라도, ‘진짜 동의’로 인정하지 않는다. 조 대표는 “영국에서는 채팅 앱을 통한 ‘온라인 그루밍’도 처벌 대상”이라며 “그런데 한국에서 그루밍 성폭력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너도 잘못한 것’이라고 약점을 잡은 뒤 갈수록 심한 요구를 하고 빠져나올 수 없게 만든다”고 설명했다.

주로 십대 학생들이 피해를 입는 그루밍 성폭력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우선 법부터 바꿔야 한다. 한국은 성관계에 동의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는 기준인 ‘미성년자 의제(擬制) 강간 연령’이 만 13살이다. 이 기준에 따라 성폭력으로 처벌받는 기준이 피해자 나이로 만 13살 미만이다. 하지만 미국의 대부분 주나 영국, 호주 등에서는 의제강간 연령을 만 16살로 규정하고 있다.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배상훈 프로파일러는 “한국 사회는 권리 부여의 척도에서는 청소년의 성숙도를 낮게, 보호조치의 척도인 성문제에서는 청소년의 성숙도를 높게 평가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다”며 “성착취 피해 청소년을 탓하는 사회는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 단언컨대 아동·청소년 성착취 범죄의 모든 원인은 어른이 제공하고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김지윤 <함께하는 교육> 기자 kimjy13@hanedu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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