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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흠뻑 빠지다, 천천히 곱씹다, 함께 즐기다

등록 2017-08-07 21:14수정 2017-08-07 22:36

[함께하는 교육] 슬로 리딩, 추천합니다

일본 국어교사가 시작한 독서법
어려운 단어 뭔가 하나씩 찾아보고
‘이 인물이 왜 무궁화호 탔지?’ 등
주인공 상황·감정 등 이입해보기도
책속 물건, 음식 만들며 직간접 체험

나주 중앙초 학생들이 슬로 리딩 수업에서 작품 속 장면을 교육연극으로 표현해보고 있다. 나주 중앙초 제공
나주 중앙초 학생들이 슬로 리딩 수업에서 작품 속 장면을 교육연극으로 표현해보고 있다. 나주 중앙초 제공

■ 이 주의 교육노트

“천천히, 꼭꼭 씹어야 소화 잘되지.”
아이들 밥 먹을 때 많이 하는 이야기.
한데 책 읽기 앞에선 다른 반응 보이시죠?
더 빨리, 많이 읽고 쓰는 게 미덕인 시대.
방학만큼은 독서에도 숨 쉴 틈 주면 어떨까요?
‘글밥’도 밥이라 빨리 먹다간 체합니다.

“기자님, 혹시 아이들이 1년 동안 배우는 국어 교과서가 몇 권인지 아세요?”

유새영 교사(나주 중앙초)가 물었다. 즉답을 못 하고 머뭇거리자 그가 말했다. “6학년 아이들을 기준으로 8권이고, 초등학교 6년 동안 총 48권의 국어 교과서를 배워요. 아이들에게 기억에 남는 수업이나 작품을 물으면 대부분 없다고 하더라고요.”

‘국어 교과서에 실린 작품은 정말 좋은데 학생들은 왜 감동이 없을까.’ 유 교사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계기로 수업의 문제점을 생각해봤다. 먼저, 의미 있는 수업을 하기보다 진도 나가기에 급급했던 자신을 반성했다. 또 다른 원인은 ‘토막글’이었다. 한 권의 책에서 서너 쪽만 잘라 실은 교과서 지문으로 등장인물의 성격, 줄거리, 작가 의도까지 설명해야 했다. 아이들이 작품을 온전히 즐길 리 만무했다. 아이들에게 한 권이라도 깊게 읽게 해주자 고민하다 ‘슬로 리딩’을 알게 됐다.

한 여학생이 그림책 <알사탕>을 읽고 작품 속 주인공처럼 알사탕을 먹으면 어떤 소리가 날까 상상하고 있다. 나주 중앙초 제공
한 여학생이 그림책 <알사탕>을 읽고 작품 속 주인공처럼 알사탕을 먹으면 어떤 소리가 날까 상상하고 있다. 나주 중앙초 제공

’독해’ 아닌 ’읽기’ 자체에 오롯이 초점 맞춰

슬로 리딩은 일본의 중학교 국어교사 하시모토 다케시가 아이들과 소설 <은수저>를 3년에 걸쳐 읽으며 처음 시작한 독서 방법이다. 공부를 싫어하는 아이들에게 놀이를 통해 배움에 대한 흥미를 느끼게 하는 게 목적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온작품읽기’ ‘온책읽기’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요즘 학생들은 스펙을 쌓기 위해 책을 읽는 경향이 강하다. 학년별 추천도서를 빨리, 많이 읽어내야 한다. 원래 책을 좋아하던 아이가 억지 독후 활동으로 책과 멀어지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몇 해 전부터 ‘슬로 리딩’이 새로운 독서법으로 떠올랐다. 슬로 리딩을 해본 이들은 “책을 곱씹고 음미하면서 읽는 즐거움을 느끼고 예기치 않은 ‘인생책’을 만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유 교사는 “일반 독서가 ‘경주’라면 슬로 리딩은 ‘책 여행’”이라고 했다. “일반 독서는 의미 파악 즉, ‘독해’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요. 책을 읽고 나서도 주로 내용을 확인하거나 감상을 묻는 독후 활동을 하죠. 반면, 슬로 리딩은 ‘읽는 것’ 자체에 중점을 둡니다. 낱말의 의미를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보고 작가나 주인공의 마음까지 함께 나누는 거죠.”

그는 처음 6학년 아이들과 <불량한 자전거 여행>(김남중 지음, 창비)을 1년 동안 읽었다. 내용이 쉬워서 아이들이 모르는 낱말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용산역’을 모르는 친구들이 있었다. 마침 당시 근무했던 지역에 기차역도 없었다. “용산역에 대해 알아보고 주인공이 왜 용산역에서 무궁화호를 타야 했는지 노선을 찾아봤어요. 이후 직접 기차를 타고 수학여행도 가봤어요.”

이처럼 그가 생각한 슬로 리딩 수업의 기본은 ‘당연해 보이는 것에 의문을 품는 것’이다. 그냥 지나치거나 당연시했던 일을 깊게 들여다보는 것. 그 과정에서 책을 소재로 아이들과 자연스레 어울리게 됐다.

“2학년 아이들과 읽었던 <짜장면 로켓발사>(한윤섭 지음, 문학동네)를 보면 주인공이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풍선로켓을 만들어요. 주인공처럼 6학년 아이들을 미리 섭외해 물로켓을 직접 만들기로 했어요. 시키지도 않았는데 선배들이 교실에 들어서며 전문가처럼 ‘나사(NASA)에서 왔습니다’라고 하면서 상황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준 덕분에 함께 즐겁게 수업했어요.”

슬로 리딩은 교사와 아이들의 소통을 돕는 매개체가 됐다. 유 교사는 이전에 아이들 유행을 따라가려고 최신 게임을 검색하고, 아이돌 노래를 찾아 듣고, 개그 프로그램을 봤다. 하지만 지금은 아이들과 책 속 주인공이나 벌어진 일에 관해 얘기하며 마음을 나눈다.

“저학년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주인공 얼굴을 그려서 제게 보여주기 바쁘고요. 고학년은 작품 속에 나오는 장소나 사건을 자기 경험과 연결해 들려주며 이야기꽃을 피워요. 시간이 지나도 그 책을 보면 함께 읽었던 아이들이 생각납니다.”

통영 용남초 학생이 <몽실 언니> 슬로 리딩 수업 시간에 작품에 나온 암죽을 만들기 전 생쌀을 씹어보고 있다. 용남초 제공
통영 용남초 학생이 <몽실 언니> 슬로 리딩 수업 시간에 작품에 나온 암죽을 만들기 전 생쌀을 씹어보고 있다. 용남초 제공

통영 용남초 학생들이 <몽실 언니> 슬로 리딩 수업을 통해 역할극으로 작품 읽기를 하고 있다. 용남초 제공
통영 용남초 학생들이 <몽실 언니> 슬로 리딩 수업을 통해 역할극으로 작품 읽기를 하고 있다. 용남초 제공

책에 애착 생기고 전체 맥락도 쉽게 이해

아이들에게 “책 읽으라” 소리는 많이 하지만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슬로 리딩 수업에서는 책을 천천히 깊게 읽으며 함께 이야기 나눈다. 좋은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인상적인 장면을 따라 하듯 책 한 권을 온전히, 몰입해 읽으며 감정이입을 하고 직간접적인 체험을 하는 것이다. 보통 ‘어려운 낱말 찾아보기’, ‘감동받은 문장 써보기’, ‘궁금한 내용 함께 조사해 발표하기’ 등 학생이 주도적으로 활동하며 책 내용에 흠뻑 빠져보도록 한다.

강슬기 교사(양산 양주초)는 지난해 동료 교사인 강민정 교사와 함께 수업지도안을 만들어 슬로 리딩 수업을 처음 해봤다. “매번 수업을 새롭게 짜려니 부담스러웠어요. 일단 국어과 성취기준을 뽑은 뒤 텍스트는 미리 선정한 책 <몽실 언니>(권정생 지음, 창비) 내용으로, 활동은 주로 교과서에 나온 대로 했어요.”

한 학기 동안 한 권을 천천히 읽자 아이들은 책에 대한 애착이 생겼다. 단편적인 글을 읽고 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고 등장인물을 이해하기도 쉬웠다. 강 교사는 “아이들은 대개 좋아하는 책이 있으면 대여섯 번을 계속 읽는다. 미리 책을 읽어 온 아이도 자기가 아는 부분을 이야기하며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좋아했다”고 했다.

단순 국어 수업뿐 아니라 인성교육이나 미술, 과학 등 교과 통합 수업으로도 진행할 수 있다. 가령, <몽실 언니>를 보면, 장골 할머니가 암죽을 만드는 과정에서 쌀을 직접 씹는 장면이 나온다. 아이들은 실과 시간을 이용해 집에서 가져온 생쌀을 씹어보고, 직접 죽도 끓여봤다. 몽실 언니가 다리가 부러져 절었던 장면을 읽을 때는 도덕 시간에 장애 이해 교육을 주제로 이야기했다.

강민정 교사는 “몽실이가 동생 난남이를 키우는 어려움을 직접 느껴보게 하려고 날달걀에 얼굴을 그려서 일주일간 ‘내 동생 키우기’ 활동을 했다. 아이들은 몽실이의 동생 위하는 마음에 공감하고, 애착을 품고 동생을 돌보는 게 어렵다는 것도 느꼈다”고 했다.

아이들은 역할을 분담해 읽거나 상황을 재연하는 등 내용을 직접 표현하면서 독서에 흥미를 더 느꼈다. 강 교사는 “밥을 먹으면서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오면 직접 책을 들고 나가서 밥을 먹으면서 읽었다. 누워서 별을 보면서 이야기하는 장면이라면 똑같이 바닥에 드러누워 읽었다”며 “어려운 단어 찾기, 짧은 글 짓기, 역할극 등 어느 정도 정해진 수업 패턴이 있었지만, 내용이나 단어가 달라 아이들이 재밌어했다”고 했다.

수업을 들었던 강서연양은 친구들과 <몽실 언니>에 나온 등장인물이 돼서 특정 사건에 대한 기분을 서로 묻고 답했다. “제가 직접 체험한 게 아니라 그 사람 입장에서 대답을 생각하면서 감정이입이 됐어요.”

강양은 이 수업을 통해 <몽실 언니>를 처음 읽었다. 평소 교과서에 나온 글을 읽고 주어진 질문의 답만 찾던 수업에 비해 직접 활동을 하니 책이 재밌게 다가왔다. “전에는 책을 거의 읽지 않았어요. 특히 소설은 읽을 양이 많아 지루하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앞으로 두꺼운 책도 읽을 수 있을 거 같아요.”

강슬기 교사는 수업을 통해 아이들이 책을 좋아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아이들이 삶을 살면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수단 가운데 하나가 책이면 좋겠어요. 초등학교 때 읽었던 책 가운데 기억에 남는 책을 나중에 다시 찾아보면서 다르게 받아들일 수도 있고요. 독서를 의무적으로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천천히 즐길 수 있었으면 해요.”

유 교사는 올여름 학생들이 읽을 만한 책으로 이현 작가의 <푸른 사자 와니니>(창비)를 추천했다. “푸른 여름밤에 매미 소리 들으며 초원의 밤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작품이에요. 와니니처럼 우리 아이들도 책을 읽고 건강하게 쑥쑥 자라나길. 어른들도 함께 읽으며 아이들과 초원의 이야기를 밤새 나눠보세요.”

최화진 <함께하는 교육> 기자 lotus57@hanedu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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