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 양정여고 소학회 학생들은 관심분야가 비슷한 이들이 모여 다양한 활동을 꾸려나간다. 2일 만난 컴퓨터, 중국어, 간호소학회 친구들. 최화진 기자
학생들에게 소논문은 부담이다. 입시를 위해 해야 하지만 논문 쓰기 자체에 익숙지 않고, 뭔가 그럴듯한 결과를 내기도 어렵다. 일부 특목·자사고의 경우 대학생 멘토나 전문 강사를 통해 논문 쓰는 법을 알려주기도 한다. 똑같은 논문이라 하더라도 수준이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흔히 ‘소학회’라고 하면 팀을 짜서 주제탐구 하는 걸 생각하는 학생이 많다. 목표는 입시 때 스펙이 될 만한 소논문 쓰는 것. 꼭 소학회가 아니라 동아리나 교내 탐구발표대회 등을 통해 활동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목적은 같다.
이천 양정여고는 입시에 유리한 논문 쓰기가 목적이 아닌 학생들의 재미와 관심 위주로 소학회를 이끌어가고 있다. 혼자서는 하기 힘든 활동, 흥미로운 프로젝트 등을 친구들과 모여 직접 꾸려나가는 소학회 소속 학생들을 2일 만났다.
“학생도 지식생산자 될 수 있잖아요”
중국어 소학회는 3학년 학생 4명이 활동 중이다. 글로벌 기업에 취직하고 싶거나 호텔리어를 꿈꾸는, 중국어에 관심 있는 학생들이 모였다. 이들은 이태경 지도교사의 제안으로 위키피디아 백과사전(이하 위키백과)에 중국에 관한 정보를 등재하기로 했다. 위키백과는 누구나 자유롭게 정보를 올리며 함께 만들어가는 다언어판 인터넷 백과사전이다.
이 교사는 “학생들이 다양한 콘텐츠를 소비만 하는 게 아니라 프로슈머처럼 ‘소비하는 생산자’ 역할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정보의 창작자가 돼보자는 의미였다”고 했다. 학생들이 활동 주제를 찾으려고 위키백과를 검색했을 때 중국 관련한 정보가 많지 않았던 것도 프로젝트의 계기가 됐다.
학생들은 각자 관심 가는 주제를 조사·연구해 직접 위키백과에 올려보기로 했다. 신승은양은 자금성에 있는 ‘박물관’, 이예원양은 20년 된 중국의 대표 종합예능 프로그램 ‘쾌락대본영’, 스포츠에 관심이 많은 남다예양은 중국의 테니스 선수 ‘리나’, 권수빈양은 중국의 ‘결혼문화’를 주제로 조사를 시작했다. 도서관에서 책·논문도 뒤져보고, 인터넷 커뮤니티나 블로그 등에서 정보를 구해보기도 했다.
중국어소학회 학생들은 위키미디어재단이 학교에 찾아와 진행한 '에디터톤'을 통해 편집 능력을 끌어올리는 작업을 했다. 위키백과 한국 제공
이렇게 정리한 정보를 위키백과에 올렸지만 바로 삭제됐다. 저작권 등 위키백과 쪽 등재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던 탓이다. 시험 삼아 올린 내용이 5분 만에 사라져버리자 힘이 쭉 빠졌다. 학생들은 정확한 이유를 듣기 위해 이 교사를 통해 위키백과 쪽과 통화하다 ‘에디터톤’에 참여해보라는 제안을 받았다. 에디터톤은 편집을 뜻하는 ‘에디터’와 ‘마라톤’을 합친 말로 편집자들이 특정 주제나 콘텐츠의 종류를 편집하며 능력을 향상하기 위해 모이는 행사다. 일반적으로 편집자를 위한 기초적인 편집 훈련도 포함한다. 위키백과 쪽은 “여성, 청소년 편집자가 적어서 저변을 확대하려고 노력 중인데 이렇게 직접 도움을 요청한 청소년들도 처음이라 학교를 방문하고 싶다”고 했다. 학교에 찾아온 위키백과 편집자는 학생들에게 정보를 찾고 올리는 과정, 정보가 삭제되는 기준 등을 가르쳐줬다. 이후 각각 ‘고교 급식 정보 소개 애플리케이션’, ’유튜브 채널’, ’사회적기업’, ‘아이스크림’ 등을 주제로 한 지식을 위키백과에 올리는 데 성공했다. 이 활동을 바탕으로 현재 ‘청소년을 위한 위키백과 가이드북’ 발간 작업도 하는 중이다.
학생들은 “소학회라 하면 중국 역사나 문화 가운데 하나만 주제 삼아 파헤칠 거라 여겼다. 하지만 컴퓨터 작업, 영어 번역, 중국 연구, 글쓰기 등 다양한 것을 배웠다”고 입을 모았다.
다예양은 “논문 쓰고 발표 피피티(PPT) 만드는 법을 배울 거라 생각했는데 소학회에서 컴퓨터 다루는 방법과 영문 자료 번역하는 것부터 배우니까 ‘이대로 괜찮나’ 싶었다. 실패도 있었지만 특별한 활동을 하고 결과물도 나오니 정말 뿌듯하다”고 했다.
수빈양은 “솔직히 지금까지 과제 할 때 저작권 등 따지지 않고 인터넷 검색해서 아무거나 퍼와서 붙이곤 했다. 이번 작업을 통해 정보를 생산하기가 쉽지 않다는 걸 알았다. 과제 하는 태도나 방식도 달라졌다. 논문 근거 자료 등을 인용할 때 저작권 부분에 대해서도 생각한다”고 했다.
‘간호소학회’…꿈 주제 활동하며 직업관도 생겨
양정여고 학생들은 단순히 논문을 쓰거나 결과물을 만드는 데 치중하기보다 각자 하고 싶은 일에 대해 깊게 고민해보고 구체적인 경험을 쌓는 데 방점을 찍고 있다. 보통 이런 학회는 학생 혼자 하기 벅차고 어려운 연구를 팀으로 묶어 진행하는데, 이 학교의 경우 대학원 세미나나 세부 전공 학회처럼 각자 공부한 내용을 공유하며 지식을 넓혀가는 식으로 활동한다.
간호사가 되고 싶은 학생들이 모인 간호 소학회 ‘나이팅게일’은 보건교사의 지도 아래 활동 중이다. 혈압이나 당뇨 혈당을 직접 재보고 노인정, 요양센터에 가서 말벗도 해드리고 독거노인 댁을 방문해 살피고 지자체에서 주는 무료 도시락도 신청해 드렸다.
안지현양(3학년)은 “전에는 단순히 간호사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소학회를 하면서 노인성 질환에 대해 많이 공부했다. 간호사도 전문 분야가 있다는 걸 알았다. 나중에 ‘노인 전문 간호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교내 축제 때는 근처에 사는 노인들을 초청해 공연도 하고, 한편에 부스를 차려 노인 체험도 진행했다. 노인처럼 등이 굽고 거동하는 게 힘들도록 팔·무릎에 억제대를,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걷는 체험을 해본 것. 김홍진양(3학년)은 “녹내장 체험 안경을 써서 앞이 흐릿하게 보이게 했다. 아이들이 생각보다 관심을 많이 보였다. 음주 체험 안경을 쓰고 일자로 걸어보려다 우당탕 넘어져서 한바탕 웃기도 했다. 소학회를 통해 이런 특별한 체험도 하게 됐다”고 회상했다.
최근에는 ‘좋은 간호사란?’이란 주제로 토론도 했다. 지현양은 “이전까지는 동정심 많고 착한 간호사가 좋은 간호사라고 생각했지만 감정 절제도 필요하고 때론 단호한 면도 필요하다는 것을 다같이 이야기하면서 느꼈다”고 했다. 홍진양도 “대입 면접 예상 질문도 뽑고 ‘해외 간호사 취업’ 등 몰랐던 정보들을 친구들과 서로 나눴다. 직업에 대한 구체적인 로드맵을 세웠고 직업관을 갖는 데 도움이 많이 됐다”고 했다.
컴퓨터 프로그래밍 분야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박한음양은 인공지능에 관심이 있어 컴퓨터 소학회를 신청했다. 한음양은 “선생님 추천으로 유튜브를 통해 고려대 ‘오픈렉처 강의’를 찾아 듣고 구글의 ‘시에스(CS)언플러그드’ 활동으로 컴퓨터 언어와 알고리즘의 기초를 배웠다”고 했다. 한음양은 관심 분야가 다른 소학회 친구들과 각자 주제를 정해 공부한 뒤 내용을 공유하기로 했다. 이후 ‘정보보안’, ‘게임개발’, ‘가상현실(VR)기기’, ‘인공지능’ 등과 관련해 조사한 내용을 서로 알려줬다. 자기가 관심 있는 분야만 공부해서 결과물을 만들고 끝나는 게 아니라 아이티(IT) 분야 정보를 폭넓게 알면 나중에 진로를 정할 때 좋을 거 같아서다.
이 교사는 “소학회는 기본적으로 학생 스스로 안 하면 아무것도 얻어 갈 수가 없다. 컴퓨터 소학회도 담당 교과 교사가 없어서 영어교사가 맡았다. 교사는 아이들이 공부할 창구를 안내하거나 도움을 요청할 때 알아봐주는 역할이 전부”라고 했다. 공부나 체험을 통해 뭔가를 이뤄내는 건 온전히 아이들 몫이라는 의미다. 최화진 <함께하는 교육> 기자
lotus57@hanedui.com
간호소학회 학생들은 교내 축제 때 근처 어르신들을 초청해 행사를 함께 즐기고 금연캠페인 홍보 부스를 직접 운영했다. 양정여고 제공
간호소학회 학생들은 교내 축제 때 근처 어르신들을 초청해 행사를 함께 즐기고 금연캠페인 홍보 부스를 직접 운영했다. 양정여고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