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권의 스마트 돋보기
디지털은 우리가 과거처럼 시간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가져다주었다. 지구 반대편에서 치러지는 월드컵 축구경기를 시청하기 위해서 밤을 새우거나 재방송 시간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게 만들었다. 방송 시간을 놓치더라도 내가 편할 때 시청할 수 있게 됐다. 스마트폰은 ‘주문형’ 시청의 편리함에 공간의 자유까지 보탰다. 출퇴근하는 지하철에서 어제 놓친 경기나 드라마를 즐길 수 있다.
‘본방 사수’가 팬으로서의 본분이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미디어 시청 습관은 크게 달라지고 있다. 자녀가 티브이(TV)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별로 보지 못했는데도 언제인지 모르는 새 아이는 인기 프로그램들을 시청했음을 알게 된다. ‘8시 주말드라마’ ‘9시 저녁뉴스’처럼 특정 시간을 기다려서 가족이 공동의 경험을 하던 일상이 사라지고, 각자 사정에 맞게 보고 나중에 시청 경험을 공유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멀티플렉스 영화관은 가족이 함께 영화를 보러 가도 부모, 자녀가 서로 다른 작품을 본 뒤 다시 만나는 방식의 감상문화를 만들었다.
디지털 기술은 타자의 시간에 우리의 시간을 맞춰야 하는 기다림의 지루함을 사라지게 만들고 있다.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원하는 것을 누리는 게 가능해지고 있다. 과거에는 애타게 기다려온 그 순간을 비로소 잠시 경험하고 나면, 곧바로 그 순간과 경험이 사라졌다. 그걸 오래 마음에 담아두기 위해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글로 적곤 했다.
너무 쉽고 편하게 늘 원하는 콘텐츠에 접속할 수 있게 된 디지털 세상에서 중요해진 것은 무엇일까? 여전히 그 순간에만 주어지는 경험이자 ‘아우라’라고 하는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살아있는 느낌과 분위기다. 비틀스의 전성기 시절 음악을 주머니 속에 갖고 다니며 늘 좋은 음질로 들을 수 있는 세상이지만, 지난달 28일 예정됐다가 무산된 폴 매카트니의 공연 좌석 4만석이 순식간에 동났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구본권 사람과디지털연구소장 starry9@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